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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승 Apr 24. 2024

이웃집 할머니가 건네준 무 15개

놈삐와 솥밥

제주도 살면서 좋았던 점 중 하나가  

사시사철 질 좋은 농산물을 얻을 수 있다는 거였다.


매서운 바람 불어닥치는 한겨울조차 산과 들, 푸르고 검은 땅 속은 부룩부룩 살 찌우는 뿌리채소로 가득했으니까. 시장에 가도 싱싱한 채소가 넘쳐 났지만 제주는 집 주변이나 안 마당에도 우엉팟이라 부르는 작은 텃밭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이웃 간 나누어 먹는 일이 많았다. 아무튼, 채소라면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호사를 누렸던 것이다.


서귀포시의 한 작은 마을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대문 앞 귤 한 콘테나(제주도에서 container를 부르는 말)가 놓여 있었다. 무게로 따지면 족히 20kg 정도 되는,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어린애들이 이사를 와 반갑다던 이웃집 할머니가 두고 가신 게 틀림없었다. 할머니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몇 차례나 가보았지만 만날 수 없었다.


며칠 후. 이번은 또 단호박 대여섯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통 집에 계시지 않았다. 나는 감사 인사 대신 육지 과일 몇 가지를 사다가 할머니 댁 대문에 걸어 두었다.


할머니는 이런저런 일로 늘 바삐 사셨다. 아침 일찍 일 나갔다 밭도 나가고, 집에 와서는 운동복을 제대로 차려입고서 운동을 가셨다. 주말은 더 했다. 새벽 일찍 어시장 다녀오거나 오일장 열리는 날에는 장에 다녀온 다음 자녀 분들의 부탁으로 손주 아이 셋을 돌보러 제주 시내까지 가셨다. 어떤 날에는 애들을 다 데려와 돌보기도 하셨다. 마침 애들이 우리 애들 또래라 올 때마다 잘 어울려 놀았다. 할머니는 종종 애들을 우리 집에다 맡긴 후 푹 쉬셨다. 망아지 같은 애 다섯이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면 정신이 하나도 없기는 했지만 내 나름 열심히 받아먹은 것에 대한 보답이 된 듯 해 뿌듯해졌다. 그러나 할머니는 늘 내 보답이 무색할 정도로 더 많이 베풀어 주셨다. 밭에서 난 채소들부터 안마당 블루베리와 옥상에서 말린 생선, 제주식 김치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4월의 알배기 자리돔무침까지. 할머니는 늘 그렇듯 말없이 이른 아침, 대문 앞에다 놓고 가셨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할머니가 보내주신 먹거리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감사히 받으면서도 종종 막막해질 때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날에는 무가 열다섯 개나 놓여 있었다. 크기도 범상치 않았다. 마트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야말로 대형 무. 일단 여기저기 나누어준 후 남은 것들로 뭇국을 끓이고 기름에 볶아 반찬도 수십 번 해 먹었다. 갈치 밑에 잔뜩 깔아 조림도 해 먹었으며 깍두기라던가 피클도 몇 통이나 담았다. 그러나 무는 좀처럼 줄지를 않았다.



아아. 이 무라는 식재료를 어떻게 소진해야 하는지 도무지 감이 안 왔다. 베란다에 켜켜이 쌓여 있는 흙 묻은 무를 볼 때마다 혹시 늘어나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워 한 번씩 세보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제철 맞은 굴 한 봉지 사 온 날, 뭐 해 먹을까, 하다가 그저 무 썬 것과 함께 넣어서 솥밥을 했다. 간은 멸치액젓만으로 살짝. 아, 쌉싸름하면서 달달한 무와 부드럽고도 바다 내음 그윽한, 부들부들 굴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참 맛이 있었다. 다음 날에는 재료 없이 무만을 들기름에 들들 볶아 다시마 한 장 넣어 밥을 지었다. 사실 별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야 제대로 무의 맛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뜨거운 불에 익혀도 아삭함과 특유의 알싸한 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고, 고소한 풍미가 그 자체로 일품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밥 지을 때마다 무를 넣었고, 아이들이 또! 또! 또! 무냐고 성화를 부릴 즈음은 아예 갈아서 물대신 밥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차고 넘치던 무는 금세 소진 되었다.


서귀포 사는 내내 할머니가 수시로 나눠 준 채소 덕분에 우리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풍요롭게 지냈다. 할머니는 한결 같이 아무 말 없이 먹거리를 대문 앞에다 두고 가셨고, 내가 고맙다는 말을 꺼내려하는 분위기만 취해도 손사래 치며 멀찍이 가버리셨다. 나는 오랜 시간 할머니가 바빠서 그렇게 하시는 건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니 할머니께서는 내가 감사하다 못해 민망해져서 부담을 느낄까 봐서 그러신 듯하다. 그러면 당신이 편하게 줄 수 없으니. 언제든 내킬 때마다 마음껏 주고 싶어서 깔아 놓은 포석인 셈.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이 같은 일방적으로 베풀고 싶은 마음이라는 게 참 낯설어 참 오랫동안 할머니의 의도를 감지조차 못 했다.


육지로 이사를 온 지 1년이 넘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마트에 갈 때마다 무시무시한 농산물 가격에 놀라고 만다. 채소가 남아돌아 걱정이라며 배부른 소리 하던 때가 퍽 그립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질리지 않던 할머니가 손수 키운 커다란 놈삐(제주어로 무)가 특히나.


무솥밥 만들기

1) 무를 채 썬다.
2) 채 썬 무를 들기름에 볶는다.
2) 불린 쌀 위에 올린 후 밥을 짓는다.

*겨울은 굴, 봄에는 바지락을 함께 넣으면 더 좋다. 굴은 생굴 그대로 넣지만 바지락을 넣을 때는 프라이팬에 볶아 수분을 날려 주어야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그 외에도 소고기 다진 것, 표고버섯 등과도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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