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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Aug 31. 2021

[투병일기] 망쳐버린 하루

우울증 환자의 투병일기




하루를 쉽게 지울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 하루가 그렇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기 싫었던, 죽기만큼 싫어서 시간을 미루다 모든 걸 망쳐버린 하루.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해서 죽고 싶었던 하루. 밥을 먹을 때도, 책을 읽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쓸모 없는 걸 만지작거릴 때도 우울했던 하루. 스스로를 자책하기만 했던 하루. 이 모든 하루를 글을 쓸 때처럼 쉽게 지우고 다시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 까. 글자가 틀려도 지우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별것 아닌 일이면 얼마나 좋을 까. 


하루를 다시 쓴 다면 어떤 기분일 까. 하루를 다시 쓴다면 내 하루는 조금 달라질 수 있을 까 고민한다. 하지만 하루를 다시 쓰는 기회가 내게 주어진다 한들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 하루는 여전할 거란 생각을 한 채 다시 쓰지 않고 그냥 지우기만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가끔은 그런 날도 있다고 말하며 위로 할 수도 있겠지만 그 하루가 만일 가끔이 아니라면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해야 할 까. 가끔 그런 날이 있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다면, 무엇으로 내 하루들을 위로해야 할 까. 위로할 수 없는 하루가 너무 길고 지친다면,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지워버리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 까. 지나온 하루를 되새김할 때면 여러 감정이 뒤섞여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부끄러움과 후회, 죄책감, 자책, 미안함. 하루를 보낸 후에 느낀 감정들이 고작 이런 것이라니 그저 창피하다. 조울증을 앓고 난 이후의 하루들은 여전하다. 여전히 감정적이고 흔들리고 불안하다. 나를 붙잡아주는 하루가 필요하다. 붙잡아줄 수 있는 하루를 찾고 헤매고 집착했지만 결국엔 같은 하루다. 약을 먹든 먹지 않든 책을 읽던 읽지 않던 결국엔 같은 하루다. 


하루를 지우고 싶다는 생각은 종종한다. 꼭 오늘 하루가 아니어도 보이지 않는 하루를 지우고 싶은 날도 간혹 있다. 내일의 하루, 모레의 하루.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진다. 어떤 하루일지 나는 몸서리치도록 너무 잘 알고 있다. 내일이 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내일도 모레도 일주일 뒤에도 살고싶어 파닥이는 나의 하루는 말하지 않아도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아직 오지않은 하루들을 미리 지우고 싶다.

 

건강한 생각을 하고 싶다. 건강한 글을 쓰고 싶다. 좀 더 건강한 음식을 먹고 건강한 하루를 보내고 싶다. 앓고 있는 병과 아픈 감정들에 대한 무언 가가 아니라 좀 더 다른 생각을 하고 싶다. 남들이 즐길 수 있는 글. 공감할 수 있는 소재. 고민할 거리를 던져주는 생각. 위태롭고 휘청거리는 글은 이제 그만 쓰고 싶다. 그보다 그런 하루가 이제 지겹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 다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팠던 기억과 초조했던 순간들과 모든 것을 망친 내 하루를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건강한 정신이 있으면 좋겠다. 우울에 적셔진 방 구석에서 떠올리는 오늘 하루의 감정은 겨우 이런 것들이다. 


그 동안 탓하지 않았던 모든 상황과 사람들을 떠올리며 탓을 한다. 너 때문에, 그때 그 상황이, 그때 그 결정이,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탓을 한다. 감정은 연약 해져 부스러지다 못해 더욱 날카로워진다. 날카로워진 감정들은 지나온 과거에 비수를 던진다. 흥분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상황에 무기력해진 나는 다시 침대에 눕는다. 그리고 오늘 하루를 머릿속에서 지워낸다. 원래부터 없었던 하루라고 되뇐다. 그리고 내일 하루가 오지 않길 바라며 잠든다. 






불안장애와 만성 조울증을 갖고 투병하고 있습니다.

가끔의 감정과 치료과정을 적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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