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증언

by 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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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드라마의 장면은 나의 경험보다 선명하고 강력하게 뇌리에 박혀서 살면서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그 이유는 드라마를 시청할 때의 심박수와 내가 겪은 어떤 사건의 심박수가 동일했기 때문이다. 바로 2015년 JTBC에서 방영한 드라마 <송곳>의 이야기다.

최규석의 동명 웹툰이 원작인 드라마 <송곳>은 외국계 대형마트에서 벌어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해고 이야기를 담고 있다. 2화에는 쓰레기 수거업체 ‘부진환경’에서 일하는 홍 씨 어르신과 동만이 등장한다. 홍 씨 어르신은 고봉밥처럼 수북하게 쌓인 하얀 쓰레기봉투 더미를 몸으로 누르며 가다가 수거차에서 떨어진다. 회사는 홍 씨에게 병원비를 지원해 주었지만 고령의 몸은 쉽게 낫질 않아 작업에 지장이 생긴다. 일을 쉬어야 했고 산재 인정을 받기 위해선 동료들의 증언이 반드시 필요한데,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운 동료들은 홍 씨를 외면한다. 홍 씨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노동법률사무소 소장 구고신은 부진환경을 찾았고, 홍 씨의 동료들에게 자신의 명함을 나눠주며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증언을 해서 회사에서 잘리게 되면 제가 무료로 상담을 해드리겠습니다!”

구고신의 등장에도 모두가 살겠다고 제 갈 길을 갈 때, 딱 한 사람만이 망설인다. 젊은 수거차 기사 동만이다.

"내일부터 홍 씨 아저씨 제 차에 태울게요."

"너 또 쓰레기봉투 들고 뛰어다니려고? 기사는 관리자야. 회사엔 기강과 위계가 있어야 하는 거야!"

상사는 동만의 발언에 덜컥 화를 냈지만 말리진 못한다.

"홍 씨 아저씨. 내일부터 제 차에 타세요."

그렇게 동만은 모든 기사들이 기피하는 홍 씨와 2인 1조로 움직이기로 한다. 수거차에 올라탄 동만은 어린 두 아들과 찍은 사진을 어루만지다 구고신이 건네고 간 노동법률사무소 명함을 바라보며 망설인다.


증언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동만의 이야기를 보며 나는 아득하고 머나먼 2008년의 여름을 떠올렸다. 학교폭력 예방주간에 있었던 일이다. 아침 조회 시간이었고 반 아이들의 책상 위엔 빈 종이가 한 장씩 놓여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그동안 우리 교실에 있었던 학교 폭력 제보를 받을 거라고 했다. 당시 우리 반의 담임은 큰 눈에 두툼한 쌍꺼풀이 있어서 부리부리한 인상을 가진 과학 선생님이었다. 게다가 키도 크고 몸집이 있으며, 조회시간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카리스마를 담은 큰 눈으로 반 아이들을 싹 둘러보는 모습은 마치 여장부 같았다. 학생들을 혼낼 때는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는지 맨 뒷줄에 앉은 친구들도 깜짝 놀라 귀를 막곤 했다.

"절대 빈 종이로 제출하는 일 없도록 해. 내가 본 거, 겪은 거 전부 솔직하게 적어 내. 쓸 말이 없으면 애국가라도 써서 내!"

담임의 모습은 마치 내부 고발을 통해 범죄자를 색출해 내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진 형사 같았다. 그제야 사각사각 글씨를 적는 소리가 들렸다. 망설이고 있던 나도 샤프를 들었다.

‘우리 반에 폭력을 당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담임이 나의 필체를 모를 리가 없을 터.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다. 들키는 순간 나는 분명 교무실로 불려 가 담임의 취조를 받게 될 것이고, 친구들이 목격을 한다면 내가 써냈다는 사실이 순식간에 알려질 게 뻔했다. 아무도 알 수 없게 왼손으로 삐뚤삐뚤 글씨를 썼다. 뒤에서 종이를 걷고 있는 도진이 읽을 수 없게 종이를 꾸깃꾸깃 두껍게 접어서 건넸다.

우리 반엔 폭력을 당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었다. 주 가해자는 지후와 도진, 그리고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동조했다.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은 나의 초등학교 동창이자 같은 반 친구인 정훈이었다. 정훈은 여느 친구들처럼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자연스럽게 동일한 중학교에 진학하게 된 남학생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와 몇 번, 그리고 나의 쌍둥이 언니와 같은 반을 했을 뿐이었고 그다지 친하지도, 말을 몇 번 해보지 않은 평범한 교실 풍경 속 남학생에 불과했다.

정훈은 어렸을 때부터 눈이 나빴다. 남들과 다른 특이한 안경을 썼는데, 안경을 쓰면 돋보기를 눈에 얹은 것처럼 눈이 안경알을 비집고 나왔다. 작은 키에 통통한 체구, 게다가 약간의 안구돌출증도 있어서 정훈의 외모는 마치 작은 개구리 같았다.

정훈과 처음 같은 반이 된 건 초등학교 4학년, 열한 살 때다. 나와 정훈이 함께 급식 당번을 맡은 어느 날이었다. 4교시가 끝나자 우리는 교실 앞에 배달된 급식차를 끌고 들어가 배식 준비를 했다. 나는 한 손으로 급식차 위를 붙잡고 반찬통을 꺼내기 위해 급식차 아래 쪽 문을 열고 있었다. 정훈은 급식차 위에 올려진 내 손을 보지 못하고 40인분의 밥으로 가득 찬 무거운 밥판을 '퍽!'하고 내려놓았다.

"아악!"

‘퍽!’하는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신을 차렸을 땐 중지 손가락이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급하게 보건실로 달려가 상처를 치료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나는 잔뜩 겁을 먹었다. 응급치료를 하고 교실로 돌아왔다. 친구들이 남겨 놓은 점심도 먹지 않고 나는 아프다고 정신없이 울었다. 손가락이 시리고 욱신거렸다. 마치 내 중지 손가락 안에서 누군가 힘껏 방망이질을 하는 것 같았다.

그날 하굣길엔 낯선 차 한 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훈의 엄마였다.

"네가 혜림이구나. 정훈이 엄마야. 아이고. 많이 아팠겠다. 지금은 어떠니?"

정훈의 엄마는 선생님을 통해 급식 시간에 있었던 사고 소식을 전해 들었고, 나를 차에 태우고 곧바로 정형외과로 데려가 이것저것 검사를 했다. 다행히 찢어진 손가락은 꿰맬 정도는 아니었으며, 인대를 다친 정도였다. 내 손엔 중지 손가락 길이의 작은 깁스와 붕대가 감겨졌다.

치료를 마친 후 정훈의 엄마는 나를 차에 태우고 집으로 데려다주고 있었는데, 사거리에서 파리바게트를 보더니 차를 멈춰 세웠다.

"혜림이 빵 좋아하니? 오늘 점심 잘 못 먹었을텐데 배고프겠다. 빵 먹으러 갈까?"

"…… 네. 좋아요."

"그럼 같이 들어가서 먹고 싶은 거 골라보자."

나는 붕대를 감은 작은 손으로 초코크림이 잔뜩 들어간 소라빵을 조심스럽게 집었다. 정훈의 엄마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쟁반을 들었다. 그리곤 분주하게 쟁반 위를 빵으로 수북하게 담았다.

"롤 케익도 좋아하니?"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정훈의 엄마는 양손 가득 빵이 든 쇼핑백을 들었다.

그날 정훈의 엄마는 나를 우리 집 현관문 앞까지 데려다줬다. 집에 있던 할머니가 문을 열었고, 정훈의 엄마는 침착하게 인사를 하며 할머니에게 빵을 건넸다. 같은 반 정훈의 엄마다. 오늘 급식 시간에 정훈이가 모르고 혜림이 손가락을 다치게 했다. 방금 병원에서 검사받고 오는 길인데 인대를 조금 다쳤다고 했다. 앞으로 병원은 제가 책임지고 데리고 다니겠다. 할머니도 건네준 빵을 받았고, 우리 남매들은 빠르게 그 빵들을 먹어 치웠다. 그로부터 한동안 나는 하굣길마다 정훈의 엄마 차를 타고 정형외과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았고, 종종 빵을 얻어먹었으며, 중지 손가락은 깁스에서 테이프 밴드만 붙여도 될 정도로 빠르게 회복했다.

내가 정훈의 엄마를 만나봤다고 정훈과 가까워질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정훈과 쭉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알게된 건 유독 중학교 2학년 시기가 재수가 없었다.

정훈은 친구가 없는 아이는 아니었다. 정훈의 곁엔 조용하게 함께 어울리는 평범한 남학생 몇몇이 있었다. 그 해의 반편성은 지독했다. 정훈에겐 친하게 어울리는 반 친구가 없었다. 사춘기 시기와 중2병을 지나는 같은 반 남학생들은 정훈을 쉽게 공격했다. 개구리 같은 눈, 통통한 몸, 느릿느릿한 몸짓을 'X신' 같다며 욕을 하고 문제 삼았다. 가방이 걸린 책상을 발로 차거나 침을 뱉었다. 소지품 검사를 하는 날이면 자신들이 피우던 담배를 정훈의 가방 속에 숨겼다. 정훈은 참다못해 같이 눈을 부라리며 자신을 만만하게 보지 말라며 저항했다. 폭력이 계속되자 저항은 멈췄다. 정훈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는 거친 중2들의 쉬운 먹잇감이 되어 있었다.

종례 시간이 되었다. 담임은 몽둥이와 출석부를 들고 심각한 표정으로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침 조회 시간에 쓴 학교 폭력 제보 종이를 내가 방금 다 읽고 왔어. 별 내용 없었어. 그런데 딱 하나 제보가 들어왔어. 뭐라고 쓰여 있었는지 알아? 우리 반에 학교 폭력을 당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부로 누가 감히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잡아낼 거야. 우리 교실에서 누군가가 괴롭힘을 당한다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

그날 이후 한동안 담임의 교과목인 과학 시간이 되면 반 남학생들은 땡볕에서 운동장을 달렸고 남은 친구들은 자습을 했다. 나는 창문으로 힐끔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지후와 도진은 입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달리고 있었다. 교실 앞엔 정훈이가 홀로, 그리고 교실 맨 뒤엔 오직 폭력에 가담하지 않았던 유일한 남학생 승준만이 교실 안에서 조용히 자습을 했다.

"야! 윤정훈! 네가 썼지? 우리 반에 학교 폭력 있다는 거!"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채 교실로 들어온 지후가 정훈의 책상을 발로 차면서 말했다. 볼과 귀가 시뻘겋게 익은 모습이 극도로 흥분한 것 같았다.

"……나 아니야." 정훈이 말했다.

"X발! 네가 아니면 누가 썼는데?" 옆에서 도진이 정훈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운동장 뺑뺑이를 돈 지후와 도진은 지친 기색이었고, 정훈의 얼굴에 욕설을 뱉었으나 감히 때리진 못 했다. 그날 이후 반 남학생들은 예전만큼 정훈을 괴롭히지 못했다. 남학생들은 담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는 중2들은 정훈을 괴롭히는 대신 담배를 피우거나 선생님들에게 대드는 등 다른 일탈을 보였다.

성인이 되고 난 후 언론에서 학교폭력 이슈를 마주칠 때마다 종종 중학교 2학년 시절의 일이 떠올랐다. 부들부들 떨면서 종이에 글씨를 써 내려갔던 그 시간. 다른 친구들도 말할 거라 생각했으나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시간. 정훈 자신조차 써내지 않은 학교 폭력 제보. 다들 안 본 것인지, 못 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내가 분명하게 본 것을 망설임 끝에 써냈고, 정훈을 괴롭히던 아이들은 모든 반 친구들 앞에서 체벌을 받았다. 응당 받았어야 할 체벌이어서 속이 후련했다. 그 익명의 제보를 정훈이 반가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담임은 나에게 네가 썼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괴롭힘 행위를 보았는지 묻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담임은 누가 주도하여 정훈을 괴롭혔는지, 누구만큼은 절대 폭력에 가담하지 않았는지 정확하게 골라내어 체벌했다. 마치 우리 교실 속 괴롭힘의 진상을 이미 알고 있으니 그저 누군가가 증언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다.


드라마 <송곳>의 동만은 노동법률사무소 소장 구고신에게 전화를 걸었는지가 궁금해진다. 이젠 담임 선생님이 씌워주는 익명의 우산은 없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선 내 이름과 얼굴을 걸고 나서야 한다. 결국 동만의 증언을 통해 홍 씨 어르신은 산재 인정을 받았을까? 그로 인해 동만은 회사에서 불이익을 받거나 해고를 당하진 않았을까? 어린 두 아들을 키워낼 수 있었을까? 아쉽게도 드라마는 동만의 뒷이야기를 보여주지 않았다.

내가 동만이었어도 과연 열다섯 살의 그날처럼 증언을 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어른이 된다고 결코 어린 시절보다 더 용감해지는 건 아니다.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지면 용기가 필요한 순간 쉽게 주저하게 된다. 홍 씨 어르신의 쓰레기봉투 옮기는 작업을 몰래 도와주는 관리자의 행동만이 동만이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용기일지도 모른다. 구고신에게 증언하겠다고 전화하지 않더라도 동만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다.




위 수필은 2024년 아람문예아카데미 글쓰기교실에서 발표한 합평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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