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운 우리 동네, 불타는 아랫동네

삶의 터전 속 추억과 상실

by 리무
2006~2007년에 방영한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한가해진 일상을 보내는 도중, 유튜브는 바쁘게 추천 콘텐츠를 쏟아냈다. 내 이목을 사로잡은 콘텐츠는 바로 중학교 시절 배꼽을 부여잡고 깔깔 거리며 시청했던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이다. 박해미의 "오케이~", 서민정의 "이 선생님~", 풍파고 교감의 "아주 굿이에요 굿!" 등 어른이 된 나에게도 시트콤 속 명대사들은 자주 메아리친다. 박해미와 이순재가 세미나를 가는 도중 접촉사고가 나는 도로, 한방병원 건물, 신지와 이민용이 이혼 후 우연히 마주친 편의점 골목까지. 드라마 곳곳의 풍경 모두 수년간 동네를 산책할 때마다 마주치는 장소다. '지금 내가 사는 동네의 옛 모습은 이랬구나.' 하며 현재 우리 동네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건 없는지 드라마 속 풍경을 유심히 본다.


내가 사는 고양시 D동의 지하철역 근처에는 유난히 노포가 많다. 임대문의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있고 공실로 가득한 라페스타, 웨스턴돔 상권과 다르다. D역 근처의 오래된 가게들은 여전히 폰트만 봐도 벌써부터 촌스러운 낡은 간판을 달고 있다. 촌스러움과 낡음, 오랜 기간 장사를 이어온 가게의 상징이다. 동네 상권은 좀처럼 바뀌지 않으며, 터줏대감처럼 동네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게들이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다.


나는 오래된 가게의 경영에 기여하는 동네 주민 중 하나다. D동으로 이사 오고 난 후 자주 방문한 가게를 꼽으라면 나는 ○○손만두를 뽑고 싶다. ○○손만두 역시 오래된 간판을 달고 있는 가게 중 하나다. 늘 사장님 혼자서 만두를 빚고, 찌고, 손님을 응대한다. 가끔가다 사장님의 지인이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사장님을 도와 만두를 빚곤 한다. 바로 옆의 24시간 분식집과 함께 일찍 문을 열고 늦게 문을 닫으며 불을 오랜 시간 켜 놓고 있는 노포 중 하나다. 만두를 좋아하는 나는 D동네로 이사 온 후 역을 지나칠 때마다 습관처럼 만두를 사 먹었고, 이사 2년 차 때부터 역 근처 체육관으로 수영을 다니면서, 만두를 사 먹는 횟수는 늘어갔다. 누가 봐도 나는 단골 만두귀신이었지만 나와 사장님은 지난 몇 년간 '단무지 필요하세요?', '젓가락은 빼주세요'와 같이 똑같은 대화만 나눴다.


사장님과의 대화는 늘 별 볼일 없었지만 이 노포는 나의 개인적인 일에 있어서도 소중한 가게다. 2년 전의 어느 가을, 나는 세 번째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내 인생 통틀어 가장 힘든 직장 생활을 보내던 시기였다. 무례하고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는 상사, 책임을 전가하는 공무원과 정치인,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직원들까지. 정신적 고통이 나를 압도하고 있어서 다음 일을 정해두지 않고 급하게 퇴사 결정을 내렸다. 입사한 지 두 달만이었다. 어차피 퇴사할 운명이니 나는 뻔뻔하게 불필요한 야근을 했다. 야근 시간에 책을 읽었고, 친구와 카톡을 하며 시간을 떼웠다. 야근 수당을 '타 먹으며' 땡땡이를 치고 있는 거였지만 파괴적인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근태관리가 필요 없는, 시한폭탄 사업단의 '제 발로 나가기로 결정한' 일개 계약직 직원이었으니까.

나를 더 슬프게 한 건 당시 만나고 있던 남자친구였다. 퇴사를 앞두고 남자친구와 크게 싸웠고, 냉전을 겪고 있었으며 이별 직전이었다. 매일매일이 괴로웠고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마지막 퇴사날에도 나는 땡땡이치듯 야근을 했다. 냉전 중이었으니 당시 남자친구에게 '고생했어'라는 말 한마디 들을 수 없었다. 10시에 마지막 퇴근 지문을 찍고 역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저녁도 먹지 않고 사무실에서 빈둥댔으니 배가 많이 고팠다. 춥고 배고프고 '그동안 수고했어' 소리 한번 못 듣는 퇴사날 밤이 외로웠다. 비참한 감정을 느끼는 나에게 차가운 음식을 먹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토스트집도, 자주 가던 호두과자 가게도 10시가 넘으니 문을 닫았다. 울적한 기분에 버스정류장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았는데 하얀 김이 솟아나는 가게가 보였다. 자주 가던 ○○손만두였다. 다행히 사장님은 안에서 바쁘게 만두를 빚고 계셨다. 아직 가게 문을 닫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의 인기척을 듣고 사장님은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김치왕만두를 주문했고, 거대한 찜기 뚜껑 아래 몇 개 남지 않은 왕만두가 보였다. 마치 나에게 팔려고 남겨 놓은 마지막 만두 같았다.


온 세상이 나에게 등을 돌렸던 세 번째 직장 퇴사날 밤, D역 한켠의 작은 만두가게는 나에게 따뜻한 온기를 건네주었다. 그날 밤 사장님과 나눈 대화 역시 단무지가 필요한지, 젓가락은 안 넣어도 되는지였지만 반복적이고 똑같은 그 대화가 그날의 나에게 얼마나 간절했는가. 사장님이 빨리 문을 닫고 귀가했다면 늦은 시간 차가운 음식을 먹고 있을 나를 생각하니 눈앞에 뿌옇게 흐려졌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엉망일까' 싶을 정도의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상황 속에서도 단 한 사람만큼은 '아직 괜찮은데 뭘'라며 말로, 행동으로, 혹은 온기가 가득한 찜기의 뚜껑을 열며 알려준다.


왕만두의 기운을 받고 일이 술술 잘 풀렸다는 신비로운 동화 같은 스토리는 없었다. 그날로부터 약 한 달 후 남자친구는 이별을 고했고, 나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직장을 잡기까지 수개월이 걸렸다. 새직장에서 적응하는 것도 지금까지 다닌 직장 중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건 엉켰던 실들이 풀리는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손만두를 지나칠 때마다 떠올릴 수 있는 서러웠던 퇴사날 밤의 온기와 추억이었다. 그날 이후로 수백 번은 만두 가게 앞을 지나다녔고 수백 번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N 년 된 나의 습관에 이끌려 올봄 어느 날에도 수영 강습을 마치고 허기진 채로 ○○손만두에 갔다. 축축하게 젖은 수영가방과 오리발 주머니를 들고 있는 나는 사장님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 체육관으로 수영 다니세요?"

"...! 네 맞아요. 고양 체육관으로 다녀요!"

"제가 아는 이모님도 체육관으로 수영 다니고 싶어 하셨는데. 등록이 엄청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찜기 속에서 주문한 김치만두가 익어가는 동안 사장님은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순간 따뜻한 비눗방울이 확 터지며 온기가 뿌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비밀스럽게 혼자 품고 있었던 퇴사날 밤의 장면이 새로운 장면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 등록이 어려워서 한 번 등록하면 절대 놓치면 안 돼요!"

사장님의 한 마디에 나는 체육관 등록의 꿀팁이라도 알려드리고 싶은 듯 재잘재잘 입을 열었다.

만두가 담긴 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설명할 수 없는 흐뭇함과 뿌듯함이 올라왔다. 사장님과 몇 년만에 대화를 트던 이후, ○○손만두를 지나칠 때마다 떠오르는 건 퇴사 날의 기억이 아닌, 사장님과 처음으로 스몰 토크를 나눈 장면이었다. D동으로 이사 오고 난 후 나에게 있었던 일들 중 가장 뿌듯한 일 중 하나로 꼽히는 그날의 대화. D동에 산다는 사실에 더 행복해졌다.


D동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거침없이 하이킥>을 보는 시간이 즐거워졌다. 지난주도 유튜브가 추천해 준 <거침없이 하이킥>을 보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하지만 유튜브가 추천해 준 건 다름 아닌 산불 소식이었다. 경북 지방에 큰 산불이 번지고 있었고, 연일 뉴스특보가 떴다. 뉴스 영상을 계속해서 봤다. 소방대원들이 진압 중이니 상황이 괜찮아지겠지... 제발.... 더 나아지지 않았다. 산불은 더 심각해졌고, 온 시민들이 대피 중이었으며, 산불을 진압하는 소방관들이, 대피하던 사람들이 불 속에서 희생됐다.


천년고찰은 그동안의 세월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구십 평생 이렇게 큰 불이 마을을 덮친 걸 본 적이 없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어르신의 모습이 보였다. 화마가 마을을 집어삼키고 남은 폐허 속에 가족사진이 모두 타버렸다며 울음을 꾹꾹 삼키며 인터뷰를 하는 마을 주민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키우던 개들을 구출하러 온 어느 부부의 모습까지. 소중한 것을 잃는 건 한 순간이고 찰나였다. 아픈 소식들에 입술이 떨리고 심장은 계속해서 뛰었다. 어떡해.. 어떡하지... 거대한 재해 속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무력해졌다. 소중한 것을 앗아가고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화마의 장난을 그저 내버려두고만 있는 신이 참 원망스러웠다.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건 그곳에서 보낸 나의 세월이 함께 사라지는 것과 같다. 산불로 마을이 폐허가 된 것은 비단 아랫동네에서만 일어나는 슬픈 일로 넘어가기가 어렵다. 불길이 마을을 휘감아 잿더미로 만들 수 있고, 재해가 아닌 다른 위기가 나의 터전을 어떤 방식으로 덮칠지 알 수 없다. 언제까지 웃으며 <거침없이 하이킥>을 볼 수 있을까? 늙어가고 후퇴해 가는 나의 일산 신도시가 위태롭다. 동네 노포와의 추억은 계속 쌓여만 가고, 더 없이 소중하기만 한데, 고령화, 도시 노후, 지역상권 쇠퇴 등 앞으로 닥쳐올 도시의 위기가 몹시 선명하다. 도시의 위기 속 나의 노포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상실감이 너무나 잘 상상되어 벌써부터 가슴이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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