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된 창틀이 광을 내듯

글방지기의 25년 4월 회고글

by 리무

미뤄둔 창틀 청소를 했다. 마지막으로 청소를 한 날이 까마득했다. 정체 모를 검은 덩어리와 가루들이 휘날렸다. 닦아내는 게 아니라 파내고 벗겨내야 할 정도였다.


'이렇게 더러운 것들을 매일 창문을 열고 닫으며 마셨던 건가?'


닦아도 닦아도 창틀 청소는 끝나지 않았다. 자주 청소하지 않은 스스로를 탓해야 하는 게 옳을 터. 그동안 청소를 미룬 이유가 봄철 미세먼지 때문이었으니, 나는 뻔뻔하게 시커먼 덩어리의 등장을 대기오염 탓으로 돌렸다.


시커먼 덩어리가 더 두꺼워져서 창문이 닫히지 않을 지경에 이를 때까지 창틀 청소를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다행히도 비극은 막아냈다. 장시간 방치된 시커먼 창틀이 청소포에 닦여나가며, 조금씩 본연의 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치 이제야 나의 빛깔을 찾아낸 일상 같았다.


매일매일이 복사-붙여넣기를 하듯 똑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잠시 뒤돌아 봤을 때 내 삶은 창틀의 색깔처럼 많이 변하고 있었다. 4월은 여러 번 나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켜 줬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회원님은 다음 달부터 교정반이에요. 무조건 보낼 거예요."


오늘은 접영 발차기를 적당히 시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강습을 듣던 어느 날, 수영 선생님은 오자마자 진급을 통보했다. 지난 2년 동안 평영 발차기 실패, 재등록 실패로 진도 늦은 반 강등, 그리고 기나긴 슬럼프로 인해 상급반에 꽤 오래 갇혀 있었다. '어렸을 때 수영 배운 적 있어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만나는 수영 선생님마다 아무도 나에게 진급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진급은 바라지도 않고, 힘들지 않게만 강습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던 어느 날, 수영 선생님은 다음 달부터 교정반에 가라고 했다.


'전 아직 사이드턴과 블록 스타트를 못 하는데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가라면 가는 거다. 진급을 원할 땐 그렇게 느릿느릿한 상급반에 붙잡아두더니, 이제는 못 해도 교정반에 가라고 등 떠민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지금을 변할 때라고.'라는 말을 남기며 말이다.


간절히 원하던 것들은 도통 이루어지지 않다가 잊힐 때가 되어서야 이루어지는 듯하다. 아이묭의 첫 내한 공연도 그랬다. 나는 2년 전 아이묭이라는 또래 싱어송라이터를 처음 알게 되었다. 곡을 줄줄 뽑아낼 정도로 엄청난 창작력을 가진 이 가수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공감 가는 가사로 많은 MZ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년 전의 나는 괴로운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파괴적인 기분으로 출근을 할 때마다 아이묭의 노래를 들으며 기분을 달랬다. 그녀와 그녀의 노래를 정말 정말 좋아했지만, 결국 그 직장을 무척 외롭고 쓸쓸하게 퇴사해야 했고, 한동안 아이묭의 노래를 피했다. 도입부만 들어도 끔찍했던 그 시절이 떠올라 노래 한 곡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아이묭이 내한 온대. 그것도 우리 집 앞 공연장으로.'


올 2월, 들을 수 없었던 아이묭의 노래를 다시 조금씩 듣기 시작했을 때 아이묭의 내한 공연 소식을 알게 되었다. 2년 사이 그녀의 명성은 더 높아져있었고, 치열한 티켓팅 경쟁에서 나는 처참하게 패배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우리 집 앞까지 오는데 내가 가지 않으면 오래도록 후회할 거 같았다. 무엇보다 아이묭의 노래를 신나게 들으며 괴로웠던 시절을 떠나보내고 싶었다.


'우주가 나에게 좋은 걸 줄리가 없지.'라는 생각이 굳어질 때쯤 누군가가 콘서트를 못 가게 되어 티켓을 양도한다고 했고, 나는 결국 그녀의 공연에 가게 되었다. 2년 전 직장생활로 힘들어하던 나를 달래며 들었던 노래를 라이브로 들었던 그 순간, 그 시절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저 좋아하는 가수의 육성을 실제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나쁜 기억들은 떠나간 지 오래였다. 이미 나는 힘든 시절로부터 멀어져 있었고, 아이묭은 그저 우리 집 앞으로 와 그 사실을 축하하는 공연을 했다.


살면서 나를 가장 우울하게 만들었던 생각은 "내 삶만 변하지 않아."였다. 이 생각의 함정에 빠지게 되면 나는 끝도 없이 초라해진다. 하지만 삶은 반드시 변한다. 나는 분명히 괜찮아진다. 나 혼자만 깊은 우물에 빠져있다고 느낄 땐 이 사실을 계속 떠올려야 한다.


"どんな未来が (어떤 미래가) / こちらを覗いてるかな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까) / 君の強さと僕の弱さをわけ合えば (너의 강한 부분과 나의 약한 부분을 서로 나누면) / どんな凄いことが起きるかな?(얼마나 멋진 일이 일어나는 걸까?")


아이묭의 'Harunohi(봄날)'라는 곡의 가사 중 가장 좋아하는 소절이다.

나는 지금 2년 전의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과거의 나는 꽤 괜찮은 미래에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2년 전의 나는 시간이 흐른 만큼 더 멋진 어른이 될 것이라는 걸 상상할 수 있었을까? 아니. 상상할 수 없었을 거다. 상상이 불가능했다.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였다. 변화가 더디어도 계속해서 나를 돌보고 갈고닦는 것. 멈춰서는 안 된다. 괜찮아질 때까지 끊임없이 나를 닦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긁어내고 파내고, 쓸어내고, 닦아내다 보니 창틀도 본연의 색을 드러낸다. 창틀의 원래 색깔은 검정이 아닌 짙은 녹색이었다. 광을 내는 창틀의 녹빛이 참 단단해 보인다. 마치 앞으로 다가올 계절에 자주 마주할 녹음 같다. 더울 땐 그늘이 되어주고, 부채가 되어줄 푸른 녹음의 물결 소리가 들린다. 봄날이 떠나도 후회 없이 여름을 맞이할 수 있을 거 같다.


아이묭의 'Harunohi(봄날)' 라이브 영상


아이묭 콘서트 당일 오전, 올 봄의 꽃비를 실컷 맞으며 동네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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