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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래청 Aug 07. 2020


"동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가다

리아의 세계여행 - 가족들과 아프리카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을 달리다


고교 시절에 읽은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


학창 시절에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면서 읽었던 기억들이 장년이 되어서 다시 그 추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최고봉인 킬리만자로의 만년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아내와 두 딸과 함께 킬리만자로를 향해 달리고 있었던 것은 내 인생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로 출발하다.


2003년 7월 4일 여름, 태양이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섰다. 아내와 진수(고 1학년), 진주(중2학년)는 이미 흥분되어 있었다. 우리 가족은 인천 공항에 도착해서 청사 3층 보건실로 가서 황열(아프리카에만 발병하는 열병) 주사를 맞았다. 황열 예방접종 카드가 없으면 동부 아프리카에 입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 위에 서 있는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밥 나무들이 우리를 반겼다.

우리 가족을 태운 필리핀 항공 비행기가 오전 8시 10분 인천 공항을 이륙하여 4시간을 날아 첫 경유지인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했다. 우리는 다음 경유지인 아랍 에미리트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다. 수속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에티 항공을 타고 9시간을 날아 사막의 나라 아랍 에미리트의 아부다비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 시각으로 오후 11시 15분이었다. 아랍 에미리트에서 아프리카로 들어가기 위해 약 10여 시간을 공항에서 뜬눈으로 지내다가 다음 날 오후 9시 35분에 동부 아프리카로 가지 위해 비행기에 탑승했다. 한국인 가족이 아프리카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카운터 앞에 도착하니 직원들이 활짝 웃으며 반겨주고 탑승 수속을 잘 처리해 주었다. 아프리카로 가는 비행기라 그런지 동양인은 우리 가족뿐이었고 대부분 중동 사람들과 흑인들이었다.

   

에스카레이트를 타고 탑승구 대기실로 내려가니 대기하고 있던 승객들이 거의 모두 연신 우리 가족을 쳐다본다. 동양인은 딱 우리 가족뿐이라 그런 것이다. 모두가 이슬람의 히잡을 쓰고 눈만 보이는 여인들과 중동 사람들과 흑인들이라 우리 가족이 더 눈에 띄었다. 진수, 진주가 너무 이상하고 무섭단다. 사진과 영상으로만 보았던 중동의 여인들이라 그런 것이었다.     


늦은 밤 9시 35분, 우리 가족을 태운 비행기가 큰 굉음을 내며 아부다비 공항을 이륙하였다. 밤하늘에 고요히 날아가는 비행기 창가로 달빛이 들어왔다. 달빛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하고 많은 생각에 잠겼다. 


인천 공항을 이륙한 지 32시간 만에 킬리만자로의 자연에 안기다.


킬리만자로 만년설에 안기다


내가 정말 고등학교 시절 그토록 동경했던 아프리카의 최고봉인 만년설의 킬리만자로 산에 간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많은 생각들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느덧 비행기는 뜨거운 아침 햇빛을 받으며 아프리카의 대지 위를 날고 있었다. 창가 아래로 아프리카의 대지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가족은 모두가 흥분하면서 창가에 들어오는 아프리카의 대자연을 내려다보았다. 드넓은 아프리카의 대지 위를 날던 비행기는 동부 아프리카의 관문인 케냐의 나이로비 공항에 사뿐히 착륙했다. 사람들이 환호를 지르고 박수를 쳤다. 무사히 도착했는 것에 대한 감사의 박수다. 아부다비에서 함께 타고 온 유럽 관광객들이 거의 내리고 우리 가족을 태운 비행기는 다시 나이로비 공항을 이륙하여 최종 목적지인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 공항을 향해 날아갔다. 저 멀리 만년설 봉우리가 보였다. 중학교 때부터 꿈꾸었던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이었다. 

우리는 탄자니아와 케냐에서 총 20번의 문화공연을 하였다.

인천 공항을 이륙한 지 32시간 만에 우리 가족은 무사히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의 수도인  다르에스살람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피곤하지 않았다. 많은 짐을 가지고 공항을 나오려던 우리 가족은 출국 심사에 문제가 생겼다. 2시간 가까이 공항에서 입국 수속 때문에 영어와 스와힐리어로 쓰인 입국 도착서를 쓰고 또 쓰고........ 그러나 입국을 하지 못하고 계속 임이그레이션에 문제가 생겼다. 사실 나도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인솔자여서 겉으로는 담대한 척할 수밖에 없었다. 두 딸이 옆에서 ‘아빠, 왜 그래요?’ 하면서 눈물을 훔친다. 함께 타고 온 승객들은 다 입국 수속을 받고 나갔는데 우리 가족만 덩그렇게 남았다. 나도 조금 무서웠다. 낮 선 땅, 낮 선 아프리카 사람들...



피를 말리는 입국심사


사실 모두가 흑인들이라는 사실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입국 심사관이 자꾸만 80달러를 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옆에 있던 유럽 사람들이 절대 돈을 주면 안 된다고 하였기에 심사관의 눈치만 살폈다. 몇 번이고 입국 심사관에 가서 여권을 내밀면 뒤로 가라고 하였다. 몇 번을 거부당하고 나니 아예 우리 가족의 여권은 보지도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달러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80불과 함께 여권 4개를 다시 주었다. 그랬더니 입국 도장을 꽝꽝 찍어주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황당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1명당 20불의 입국비자 값을 심사관에게 내어야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비자를 만들어 와야 했는데 황열병과 말라리아 등 열대 지방의 질병 예방 주사는 맞았지만 비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탄자니아에 계신 분이 공항에서 절대 돈을 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종종 임국 심사관들이 돈을 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면서 나에게 당부를 했던 것이다.


공항 청사를 나오니 아프리카 특유의 진한 내음이 코끝을 찌른다. 조금 역겨운 내음이다. 나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아프리카의 대지에 무릎을 꿇고 입맞춤을 하였다. 마중을 나온 한국 지인이 비행기가 도착한 지 2시간이 넘어도 우리 가족이 항공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걱정이 되어 한국으로 전화를 걸고 여기저기 확인을 했다면서 무사히 탄자니아에 도착한 것에 기뻐하셨다.       


탄자니아의 주요 도시들을 순회하며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동부 아프리카의 탄자니아, 케냐, 우간다 공통언어)로 공연을 펼쳤다.

  

본격적으로 재능기부 공연을 펼치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서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준비한 지 5년 만에 내가 상상하고 동경하던 아프리카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가족들과 이번 재능기부 여행을 위해 인형극 공연을 동부 아프리카(탄자니아, 케냐, 우간다)의 언어인 스와힐리어로 녹음을 하여 많은 연습을 하였다. 이미 중국어와 필리핀어로 공연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 아내와 두 딸이 공연 연습을 쾌 잘해주었다. 수많은 야자수와 바나나 나무들이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족이 동부 아프리카에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우리는 다르에스살람에서 3일간 머물면서 탄자니아의 학교와 마을 넓은 공터에서 신기하고 재밌는 인형극 공연을 했다. 모두가 깜짝 놀라워했다. 멀고도 먼 나라에서 온 동양인 가족들이 자기 나라 언어로 공연을 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한 것이었을 것이다. 

 

탄자니아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던 날 우리 가족은 먼 길을 떠났다. 오전 9시에 도도마를 향했다. 도도마는 탄자니아의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온종일 달려야 하는 아프리카의 대륙, 우린 달라고 또 달렸다. 8시간을 달려 도착한 도도마는 작은 도시였다. 2박 3일간의 일정 속에서 가는 곳마다 아이들이 몰려와 우리 가족을 반겼다. 풍선을 받기 위해 밀려오는 아이들을 감당할 수 없었지만 딸, 진수와 진주는 아이들과 금방 친구가 되었다. 하얀 피부를 가진 동양 사람들이 와서 여러 모양의 풍선을 만들어 주고 인형극을 공연하니 온 동네 아이들이 수백 명씩 몰려와 소란스러웠다. 


탄자니아의 수도인 다에르살렘을 첫 방문으로 시작된 재능기부의 여행은 탄자니아 주요 도시를 순회하였다. 다르에스살람, 도도마, 모시, 아루샤를 방문하며 더 넓고 넓은 대자연을 달라고 또 달렸다.      

공연 장비를 차에 싣고 1박 2일 을 달렸다

아프리카의 선교사였던 리빙스턴이 죽어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심장은 아프리카에 묻고 방부 처리하여 유해만 바가묘요 탕가의 해변가를 통해 8개월 후 영국 본국으로 옮겨졌다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바닷가를 바닷가를 찾았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연을 간직한 채 너울거리는 파도가 밀려와 발 앞에서 부서진다. 부서지는 파도를 뒤로하고 우리는 달리고 달리며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을 향해 나아갔다.



탄자니아 탕가의 해변. 이 해변을 통하여 리빙스턴의 유해가 영국으로 반송되었다.


탕가의 해변의 파도가 리빙스턴던의 영혼을 부르다.


뜻하지 않은 리빙스턴과의 만남


우리 가족이 리빙스턴의 유해 반송 지점의 기념비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저 멀리 이슬람 사원인 스모그가 보인다. 진수 진주가 탕가의 해변을 거닐며 하는 말이 생각난다.

리빙스턴의 유해가 반송된 지점에 기념비가 있다.

‘아빠, 진짜 너무 멋져요!’ 우리 부부는 그 후 12년이 지난 어느 날 영국의 작은 마을을 방문하고 리빙스턴이 태어나서 살던 집과 그를 선교사로 파송을 해 주었던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의 많은 유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리빙스턴의 유해가 발송되었던 이 탕가의 해변을 더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몇 시간을 이 해변에 머물며 100여 년이 훌쩍 넘은 이야기를 들으며 ‘킬리만자로의 눈’ 소설을 두 딸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텅 빈 해변가였다. 관광객들이 없어서 자연 그대로인 해변을 우리 가족만이 마음껏 탐하고 마음에 담고 또 담았다. 우리는 계속 1박 2일간을 차로 달린 긴 여정을 아프리카의 최고봉인 킬리만자로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끝없이 펼쳐지는 드넓은 대지는 지평선이 어디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었다. 다만 창가에 스치는 것이 이채롭게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밥 나무들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모로고로를 지나 다시 다르에스살람을 거쳐 바가모요 탕가를 지나 모시에 도착했다. 10시간을 달렸지만 끝없는 평원이다. 꼭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환상에 빠져 달려온 길, 꿈인지 현실인지 내 앞에 펼쳐지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산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반겼다.      

                               



킬리만자로의 눈   


헤밍웨이의 숨결이 지금도 느껴지는 소설 속의 킬리만자로는 나에게 온전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참으로 아쉬웠다. 그러나 다음 일정을 위해 등반 입구에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아류사로 발길을 돌렸다. 얼마를 달렸을까, 딸들이 소리쳤다. ‘아빠! 저기 봐요, 킬리만자로 정상인가 봐요. 하얀 눈으로 덮여 있잖아요.’

킬리만자로의 만년설 봉우리에 뒤에 보인다

정말로 푸른 하늘에 구름에 쌓여 킬리만자로가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멈추고 급히 내렸다. 저 멀리 신비로운 킬리만자로의 봉우리가 보였다. 우리 가족은 카메라 샷트를 연신 눌렀다. 안내원이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킬리만자로의 웅장한 모습을 제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우린 만년설을 더욱 가까이에서 만나려고 킬리만자로에서 생산한 진한 커피 향을 맡으면 호텔 야외 커피숍에서 3시간을 기다렸다. 만년설이 우리 바로 앞에서 구름과 안개로 수없이 서성이었지만 그 신비로운 모습을 끝내 볼 수 없었다. 1년에 약 40일간 만 볼 수 있다는 아프리카의 최고봉의 킬리만자로...

  

킬리만자로 봉우리가 제일 잘 보인다는 호텔. 그러나 3시간을 기다렸는데 끝내 만년설 봉우리는 끝내 볼 수 없었다.

헤밍웨이가 나에게 이야기하고자 했던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고등학교 시절 그가 쓴 작품은 거의 다 읽었지만 그가 왜 자살을 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나는 15년이 지난 후 아내와 함께 헤밍웨이가 쿠바에서 마지막 인생을 지내며 생활했던 그 바닷가를 방문했다. 많은 비가 내리는 쿠바의 바닷가에서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을 다시 생각했다. 탐험가와 선교사였던 리빙스턴의 처음과 끝을 만났듯이 나는 헤밍웨이의 처음과 끝자락에서 그와 속삭인 것이다.   


내가 아프리카를 동경하면서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헤밍웨이 때문이다. 청년 시절 그는 나에게 킬리만자로의 꿈을 주었다. 나는 그때부터 세계 여행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제일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한다면 나는 스스럼없이 가족들과 함께 검은 대륙 아프리카를 여행했던 일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킬리만자로의 정상에 오르는 출발점. 여기서부터 정상까지는 2박3일 동안 오직 걸어서 올라야 한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킬리만자로 정상에 오른다. 그러나 그리 만만치 않다고 한다. 오르는데 3일 소요되고 하산하는데 2일 소요된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등반 도중에 그 신비한 아프리카의 최고봉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에 서는 것을 포기하다고 한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아루샤로 발길을 돌렸다.


아프리카의 최고봉인 킬리만자로의 중턱에 서다


아내의 말라리아에 감염


케냐로 넘어가기 전 국경도시인 아루샤에서 휴식을 가졌다. 미치도록 그리워했던 킬리만자로를 뒤로하고 아루샤에서 새벽에 출발, 국경을 넘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도착하여 숨을 고른다. 

동부 아프리카의 음식 우가리... 가족들이 거의 먹지 못했다.

"여보, 나 많이 아픈 것 같아요" 하면서 아내가 힘없이 말한다. 아마 계속되는 장거리 여행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안내 담당분이 검진을 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급히 아루샤에서 제일 큰 병원으로 가서 피검사 등을 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2시간 후 말라리아에 감염되었다는 의사의 말에 모두가 놀랬다.


저녁이 되니 말라리아에 걸린 아내가 고열에 시달리며 아파했다. 다행히 아루샤 병원에서 5일분의 약을 처방받았다. 그러나 불안했다. 모든 일정을 중단하고 귀국해야 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도하며 국경을 넘었다. 

다행히 아침이 되어 아내의 몸이 많이 좋아졌다. 그때 알았다. 말라리아 약은 아프리카에서 처방하는 약이 더 좋다는 사실을....


그래! 여행은 인생의 모험이다. 이 모험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녹아서 분출하고 있었다. 우리는 피로의 긴 한숨을 쉬면서 다음 목적지인 케냐의 국경을 넘고 있었다.


세계 여행 영상 - 가족 재능기부 아프리카 탄자니아 여행 편
세계여행 - 가족 재능기부 아프리카 탄자니아 여행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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