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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래청 Aug 07. 2020

들판에 다시 피는 야생화처럼

나도 작가다 3차 공모전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무대에서 실패의 아픔을 몸짓하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신이 미웠다.


2005년 7월은 잊지 못할 여름이었다.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내가 옆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창가에서 먼 하늘만 쳐다보았다. 1년간 준비한 가족 인형극 해외 공연이 취소되는 순간이었다     

먼저 멕시코에 전화했다. “6개월 전부터 라틴어로 녹음을 해 주시고 준비해 주셨는데 이번에 사정이 있어서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허허, 무슨 이런 일이 있나요? 무슨 사정인지 모르나 할 수 없지요.” 하면서 멕시코의 지인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다음에 캐나다 에드먼턴에 전화를 했다.

“넷! 못 오신다고요? 아~ 선생님 가족들 4명 밴쿠버에서 에드먼턴으로 오는 비행기 표 4장 모두 발권했는데 어쩌지요. 이거 큰일 났네.” 선교사님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로...”

나는 다시 한번 용서를 빌었다. “네, 할 수 없지요, 알겠습니다.” 하고는 에드먼트에서 역시 먼저 전화를 끊었다.

악속을 지키지 못한 내가 미웠고 부끄러웠다.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울었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다.


가족들이 원래부터 인형극을 한 것은 아니다. 의료기기 사업을 하다가 당좌 수표가 부도나서 몇 년 동안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 기소중지로 수배된 지 3년 만에 신도림역에서 경찰에 검거되어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재판을 받고 항소하는 과정을 거치면 최소 1년 형은 받을 것이라고 감방에 세 번째 들어온 사람이 말해 주었다. 40대의 절망이었다. 그러나 52일 만에 열린 첫 공판에서 기적처럼 출소되었다.


아내와 나는 새로운 삶을 살기로 했다. 그래서 인형극 제작과 연출을 1년간 열심히 배웠다. 가족들과 재능기부를 하면서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002년 중국 시안, 2003년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와 케냐, 2004년 필리핀을 다녀왔다. 초대형 탈 인형극과 장대 인형극이라 해외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많은 연습이 필요했지만 3개국 언어로 공연을 하였고 이번에는 영어와 라틴어로 공연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가족의 항공권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4인 가족 멕시코와 캐나다 왕복 항공료는 거의 8백만 원이었다. 출발 일주일을 앞두고 여행사에 예약해 두었던 비행기표를 구입하지 못하여 결국 일정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아마 밤새도록 울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는 좌절감과 서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좌절을 뒤로하고 새로운 퍼포먼스 준비


‘그래, 내년 여름에는 꼭 가는 거야!’ 좌절 속에 3개월이 지날 무렵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게 되었다. 매년 가족들이 다 가야 하는 인형극은 경비 면에서 비합리적이었다. 그래서 혼자 할 수 있는 공연을 찾았다. 실망하고 지내던 어느 날 문뜩 1인극 마임이 생각났다. 어느 날 성남의 한 마임극단을 찾아갔다. 마임 선생님이 몸이 굳어있고 나이가 많아서 가르쳐주기 어렵다고 했다.

“선생님, 제가 돈을 벌기 위해 배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쳐만 주신다면...” 하고 사정을 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나는 사무실을 나오면서 한마디 했다.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지 않으셔도 2-3년 안에 꼭 마임으로 무대에 설 겁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건 순전히 오기를 부리는 것이었다. 아니다. 오기가 아니고 그분에게 한 나의 일방적인 약속이었다.

     

집에 돌아와 대구의 한 마임극단에 전화했다. 마임배우 선생님이 “가르쳐 줄 수는 있는데 서울서 대구 오고 가는데 너무 멉니다.”

“아~ 아닙니다. 가르쳐 주신다면 얼마든지 달려가겠습니다.” 3일 동안 매일 전화를 했지만 역시 멀다는 이유로 거절을 당했다. 마지막으로 전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한 마임배우 선생님에게 전화했다.

“오매, 뭣땀시 이 어려운 마임을 배우려고 한당가?”

나는 지난여름 멕시코와 캐나다 일정이 취소된 사연을 얘기하고 꼭 마임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럼 한 번 시간 내서 전주에 내려와 보더라고.” 나는 이틀 후 전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무대에서 마임으로 실패의 아픔을 노래했다.


그분이 나를 만나자마자 내 두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잘 오셨당게, 요사이는 마임을 가르쳐 주려고 해도 배울 사람이 없어서 전수해 주지 못하는데 열심히 하셔유 가르쳐 드릴 것이니...”

“예, 선생님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나이 50이 넘어 마임 공연가가 된다는 것과 내년 여름에 재능기부로 해외여행도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흥분되었다. 거리가 멀었지만 6개월 동안 매주 한 번씩 전주행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 1시간씩 마임 지도를 받았다. 그분의 큰 공연이 있는 날이면 일찍 내려가 공연을 관람하고 분석하면서 나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공연을 준비해 나갔다. 어느덧 6개월이 지날 때쯤 어설프지만 혼자 무대에서 공연하기에 이르렀다.    

중앙아메리카의 코스타리카 수도의 산호세 다운타운

이렇게 마임을 배우던 시기는 50이 넘은 나이에 대학교를 입학하여 공부하던 1학년 때였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나만의 몸짓 공연이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무대에서 40분간 열정을 다해 공연을 하다 보면 땀과 함께 눈물을 흘릴 때도 있았다. 관객들은 나의 아픔을 모른다. 공연이 끝나면 “선생님 공연하신 지 얼마 정도 되었나요? 무대를 사로잡은 실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하고 묻는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사고 마을에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즉석 강연을 하고 있다.
남처럼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

나에 인생의 전환점이 된 글


다음 해 7월 방학 때 아내와 단둘이 인천 공항에서 일본 동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여보 작년에 멕시코와 캐나다에 가지 못해 많이 섭섭했지?” 아내는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묻는다. 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말없이 창가로 보이는 구름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작년에 가족들의 해외 공연이 취소된 것을 생각하니 다시 눈물이 났다.  


오래전 강남의 개포동 5단지와 일원동 사이 육교에 “남처럼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라는 문구를 보았다. 그 뒤 정말 그 글을 가슴속 깊이 담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멕시코와 캐나다 공연 취소의 아픔을 맛을 보았지만 18년 동안 매년 아내와 함께 동남아, 유럽, 아프리카, 북중미 등 전 세계 40개국 200여 지역을 다니며 '재능기부 공연'을 하였다. 그렇게 무대에서 공연한 횟수는 지금까지 1,500여 차례다.

터키와 그리스의 난민들, 집시들, 노숙자들, 엘살바도르의 교도소, 마약으로 삶이 다 망가져 가는 마약법들의 치료소, 아내의 품에 꼭 안겨 눈물을 보이던 온두라스의 고아원 소녀의 얼굴들.... 대지진의 참사가 끝나지 않은 아이티, 쿠바에서 공연을 마치고 헤밍웨이가 거닐던 바닷가에서 진한 커피를 마시며 지난날을 생각해 보았다. 이제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공연가가 되었다. 50대 초반 늦게 시작한 마임공연과 대학 입학, 대학원 공부는 나에게 아픈 상처의 치료제가 되었다.  


인생의 마지막 삶을 노래하며 다시 피는 야생화


그러나 다시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지금은 킬링필드의 땅 캄보디아 씨엠립 작은 도시에서 캄보디아 어린이들과 뒹굴며 한글, 종이접기, 만들기 등을 가르치며 선교사로, 여행 에세이 작가로 '인생의 마지막 삶의 노래'를 써 내려가고 있다. 나는 이 아이들을  “다시 피는 킬링필드의 야생화”라고 부른다.

인생은 좌절과 실패의 들판에서 피고 지는 생화와 같다. 15년 전 멕시코와 캐나다의 공연이 취소되어 밤새도록 엉엉 울었던 나의 아픔 속에서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방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행복의 메시지를 가슴에 안고 살아왔던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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