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신도림역, 운명의 시간

도망자의 마지막 체념

by 임래청

어깨 위로 떨어진 서늘한 손길

5년이라는 긴 터널의 끝이 보일 것 같던 3년 9개월째의 아침, 나의 계절은 그날 신도림역의 차가운 보도블록 위에서 영원히 멈춰버렸다. 나는 습관적으로 큰 전철역이나 환승역에서는 짐승 같은 직감으로 주위를 살피곤 했다. 전철에서 내리면 사람들 틈에 섞여 걷다가도, 광장의 중앙이나 개찰구 근처에 다다르면 본능적으로 멈춰 서서 주변을 살폈다. 사복을 입은 형사들이 잠복해 있다가 불심검문을 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당시 경제범죄의 기소중지 기간은 5년이었다. 5년째 되는 날 밤 0시가 되면 자동으로 기소중지가 풀린다. 그 사실은 경찰 동생에게서 듣게 되었다. 주민등록증이 없다고 둘러대도 지문 하나면 단 몇 분 만에 기소중지자 신분이 탄로 난다. 일단 걸리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게임이었다. 2년 넘게 이어온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끝내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이 나를 늘 긴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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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중순, 막 겨울의 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날도 신도림역을 빠져나와 건널목 앞에 섰다. 무심하게 켜진 빨강 신호등을 바라보며 파란불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내 뒤에는 평범한 점퍼 차림의 젊은 남자 넷이 담배를 피우며 서 있었다. 그저 퇴근길의 직장인들이겠거니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신호가 바뀌려는 찰나, 옆에 있던 청년 하나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잠깐만요. 선생님,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어요?

그 순간, 온몸의 피가 발끝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3년 9개월간 수만 번 시뮬레이션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로 닥친 것이다. 나는 당황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지갑을 만지작거렸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후였다. 나를 에워싼 그들의 눈빛은 차분하면서도 나를 향하여 직감했던 분위기였다. “형사들은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고” 하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신분증을 건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날따라 유난히 맑은 하늘에 앙상한 가지들이 마지막 몇 개 남은 나뭇잎을 떨구려는 듯 바람에 흔들렸다.

내 심장은 9천5백만 원의 부도 어음보다 더 큰 공포에 짓눌려 터질 듯 요동쳤다.

나의 신분증을 기계에 찍어본 형사가 고개를 들며 무심하게 툭 뱉었다.

“당신, 이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닐 사람이 아니구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3년 9개월, 그 길고 긴 도망의 기록이 신도림역 길바닥 위에서 단 몇 줄의 데이터로 종결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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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9개월의 정적

“선생님, 자 갑시다.” 하면서 두 명의 형사가 나를 데리고 신호등을 미처 건너지 못한 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나는 그들이 가르치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형사들의 손에 이끌려 걷는 동안 내 머릿속엔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지금이라도 뛰어버릴까?’ 나는 초·중·고 시절 육상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무작정 달린다면 충분히 따돌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저만치 서 있는 경찰차를 보는 순간, 도망 끝에 잡히면 ‘도주죄’가 추가되어 형량이 늘어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형사들은 마치 내가 도망치기를 기다리는 사냥개처럼 나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솟구치는 본능을 눌렀다. 이제는 모든 것을 신의 처분에 맡기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보! 놀라지 마. 아마 오늘 집에 가지 못할 것 같아. 아니,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혼잣말이 가슴속에서 맴돌았다.

“야, 빨리 걸어. 저기 경찰차 보이잖아.” 형사의 짜증 섞인 재촉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남대문 경찰서였다. 검거 지역 관할이라 이곳 유치장에서 잠시 대기하다가, 나를 수배한 강남 경찰서로 연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차가운 유치장 구석에 앉아 있으니 비로소 모든 현실이 실감 났다. 나 외에도 4명의 수배자가 어떤 사연인지 모르나 잡혀 와 있었다.

30분 정도 지날 무렵, 유치장을 지키던 젊은 경찰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기요…. 제 친동생도 형사인데….”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젊은 경찰이 무심하게 되물었다.

“경찰청 외사과에 근무하는 김매규입니다.”

“아, 매규요? 제 경찰학교 동기입니다! 그럼 형님 되시는 겁니까?”

순간, 얼어붙었던 공간에 희미한 온기가 돌았다. 젊은 경찰은 눈을 크게 뜨더니 나를 다시 보았다. “아이고, 형님…. 어쩌다가 이렇게 되셨습니까. 저도 고향이 부산이라 매규이랑 친하게 지냈습니더.” 동생의 이름 하나에 팽팽했던 긴장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그는 내게 물 한 잔을 건네며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었다. 유치장에 있던 4명이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빨리 이 차가운 유치장을 나가서 강남경찰서로 가고 싶었다.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경제사범은 일반 죄인과는 다릅니다. 강남서에 가서 조사 잘 받으시고 합의 의사만 확실히 밝히면 바로 집에 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이 들리는 순간, 꽉 닫혀 있던 하늘이 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망자로 살 때는 보이지 않던 '희망'이라는 단어가, 역설적이게도 쇠창살 안에서 나를 찾아왔다.




PS: 절망의 끝에서 뜻밖의 인연을 만났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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