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개국 무대에 선 광야의 길
지구본을 든 탕자
“내 기도는 무모했지만, 나를 붙드신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셨다.”
어느 분야든 전문가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최소 1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주님께서 나를 세상에 하나뿐인 ‘무언극(Mime) 선교사’로 빚으시자, 사역의 지평은 내 상상을 초월하여 확장되었다. 신학 공부를 병행하던 시절, 나는 전국 교회 여름 사역의 ‘섭외 0순위’ 강사였다. 특히 5월이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무대에 올랐고, 주요 집회는 최소 3개월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였다. 20년 넘는 세월 동안 무대에 선 횟수만 대략 1,500회. 사실 내게 이런 ‘끼’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15년 만에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탕자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너무나 고맙고 송구해, 복음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배우고 온몸을 던졌을 뿐이다. 방황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다시 잡은 주님의 손은 결코 놓을 수 없는 생명줄이었다.
우리 가족은 아내와 두 딸이 한 팀이 되어 전 세계를 누볐다. 탄자니아와 케냐의 붉은 대지 위에서, 중국과 필리핀의 거친 현장 속에서 우리는 복음을 쏘아 올렸다. 현지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한국어는 물론 영어, 일어, 중국어, 타갈로그어, 심지어 스와힐리어까지 익혀 무대에서 쏟아냈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 아프리카, 북미와 중미 등 40개국 200여 선교지에서 마임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동안, 나는 내가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도구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기적의 시작은 평신도 시절에 샀던 작은 ‘지구본’ 하나였다. 나는 매일 그 지구본을 품에 안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전 세계 50개국 이상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해주세요!”
당시에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기도라며 비웃음을 샀을지 모르지만, 신실하신 주님은 지금까지 40개국의 문을 열어주셨다. 아직 기도 제목 중 ‘10개국’이 남아 있으니, 나의 사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지구본 위로 흘린 눈물 한 방울마다 주님은 새로운 나라의 지도를 펼쳐 주셨고, 몸짓으로 내딛는 발걸음마다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잔치가 벌어졌다. 탕자에게 가락지를 끼우시고 좋은 옷을 입혀주셨던 아버지의 사랑이, 이제는 나를 통해 소외된 영혼들에게 ‘하트 풍선’에 실린 복음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귀하게 사용하시는 동시에, 또 다른 계획을 준비하고 계셨다. 화려한 무대 조명 아래 쉼 없이 달려온 내 열심의 바퀴를 멈춰 세우시고, 오직 주님의 음성만 들리는 진짜 ‘광야’로 나를 부르기 위해 사역의 좌표를 조금씩 수정하고 계셨던 것이다.
내게 지시할 땅은 따로 있었다
"나의 열심으로 쌓은 바벨탑을 허무시고, 주님은 나를 진짜 순종의 좌표 위에 세우셨다."
세계 많은 나라를 다니다 보니 보기에도 아름다운 나라를 참 많이 보았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아름답지 않은 땅은 없었다. 가난한 나라는 그 나름의 고결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고, 척박한 땅은 그 안에 숨겨진 강인한 생명력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선교사에게 아름다운 땅과 사명의 땅은 별개의 문제였다.
처음에 내 마음이 머물렀던 땅은 아프리카 케냐였다. 그 꿈을 구체화하기 위해 나는 GMS(LMTC)와 온누리 세계선교훈련원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선교사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을 통해 내 열정의 바벨탑을 허무셨다. 케냐를 두 차례 방문하며 기도하던 중, 나는 현장에서 사역자들 간의 갈등이라는 아픈 단면을 목격했다. 선교사가 선교지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가 사역의 실패가 아닌 '관계'라는 말을 들어왔지만, 직접 마주한 현장의 혈기와 다툼은 내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게 했다. “주님, 이것이 과연 주님이 기뻐하시는 연합입니까?”라는 의구심 속에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아프리카를 향한 내 마음을 거두어 가셨다.
유럽의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그 광활한 대지에 비해 선교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어 수년간 기도하며 공을 들였다. 하지만 일주일간의 방문 기간 동안 주님은 이번에도 사람을 통해 길을 막으셨다. 예기치 못한 감정의 부딪힘과 사소한 오해들 속에서 나는 자칫 인간적인 자존심 싸움에 휘말릴 뻔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 거친 광야에서 나 역시 언제든 혈기를 부릴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하며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설 때마다 질문이 따라붙었다. “주님, 왜 제가 준비한 이 열심의 통로를 막으십니까? 저의 능력이 부족해서입니까?” 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명확했다.
하나님께서 그 땅들의 문을 닫으신 것은 내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내가 머물러야 할 ‘진짜 좌표’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님은 아픈 거절과 엇갈린 만남들을 통해 내 안의 ‘선교사적 자부심’이라는 교만을 꺾으셨다. 내가 가고 싶은 땅이 아니라, 주님이 가라 하시는 땅에 서기 위한 철저한 ‘자기 부인’의 훈련이었다.
비록 사역의 문은 닫혔지만, 그곳에서도 복음의 역사는 일어났다. 우크라이나의 어느 오후, 주민들을 초청해 문화 공연을 열었을 때였다. 무언극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 그들의 메마른 영혼을 흔들었다. 해 질 무렵, 공연을 보았던 한 할머니가 나를 찾아와 간절히 상담을 요청했다. 어둠이 짙게 깔릴 때까지 할머니는 하나님은 누구신지,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지 내 공연에 담긴 ‘세 줄 복음’의 의미를 다시 들려달라고 했다. 상담을 마친 할머니는 이제부터 교회에 나가겠다며 고마움을 전하고 돌아갔다.
한 영혼이 돌아오는 기쁨을 맛보면서도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길을 떠나야 했다. 그곳은 주님이 내게 지시하신 안식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를 위해 예비된 단 하나의 땅을 찾으며 복음의 나그네 길을 이어가고 있었다. 주님은 내가 그린 지도를 지우시고 주님의 지도를 내미셨다. 그 지도 위에서 내가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으로만 움직이는 겸손한 나침반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