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넘어의 사랑
현대판 유다들
유난히 센터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은 아름다움의 침묵으로 내게 다가와 속삭인다. 그 별빛 아래서 나는 종종 묻곤 한다. ‘주님,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아셨으면서 왜 그에게 빵을 떼어 주셨나요?’
25년 사역하며 나도 숱하게 유다들을 만났다. 정성을 다해 키워놓으면 제 갈 길로 휙 떠나버리는 리더들, 어느 날 이유 없이 등을 돌리는 동역자들... 그럴 때마다 내 속은 숯검덩이가 된다. 하지만 그때마다 주님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속삭이신다. ‘나도 그랬다. 그래도 나는 빵을 주었단다.’ 배신을 알고도 사랑을 베푸는 것, 그것은 선교사의 선택이 아니라 숙명이었다.
캄보디아 사역의 고독함과 더딘 변화 속에서 나는 성경 속의 한 질문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배신을 처음부터 아셨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는 예수께서 처음부터 자기를 팔 자가 누구며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아심이러라”(요한복음 6:64)고 명확하게 답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는 신적 통찰력을 가지셨음에도, 유다에게 3년간 똑같이 복음을 가르치고, 능력을 행하게 하고, 사랑을 베푸셨다. 나는 이 모순적인 사랑에 늘 주목했다. 배신할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의 기회를 열어두신 그 사랑, 그리고 유다의 악한 행위마저 인류 구원이라는 가장 선한 결과를 이루는 데 사용하신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섭리를 깨달았다.
마음 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다
이러한 주님의 섭리를 알게 되자, 나의 사역을 바라보는 시선도 점점 달라져 갔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눈에 보이는 풍성한 열매를 당장 수확하는 일이라기보다, 보이지 않는 땅에 씨앗을 뿌리는 고독한 농부의 일과 같았다. 우리 부부는 매일 아이들과 리더들의 마음 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다. 그들의 삶의 고통과 상처 위에 사랑과 용서의 말씀, 그리고 소망의 메시지를 조금씩 심는다. 내가 흘린 땀방울과 눈물과 비교하면 수확은 너무나 더디고 불확실해 보였지만,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떤 씨앗은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종교적 관습의 무게이자 가난이 짓누르는 삶의 고통이라는 단단한 흙에 떨어져 좀처럼 싹을 틔우지 못했고, 어떤 씨앗은 아이들을 유혹하는 세속적인 문화나 킬링필드의 상처가 만들어낸 뿌리 깊은 불신이라는 잡초에 뒤덮여 사라지는 듯했다. 특히 노력과 정성을 쏟아도 씨앗이 자라다가 다시 시들어 말라버리는 경우를 참 많이 보게 되어 깊이 낙심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하신 말씀을 붙든다.
이 땅에도 많은 동역자가 쉽게 오고 떠나간다. 이 땅의 변화가 더디다는 이유로, 예상했던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는 더 빠르고 화려한 열매를 맺을 다른 밭을 찾아 떠났다. 그들이 남기고 간 것은 다시 파헤쳐진 흙과 상처 입은 현장이었다. 홀로 남은 선교사는 그 상처를 수습하고 다시 씨앗을 묻는다. 이 고독한 노동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성실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좌절의 순간마다 깨달는다. 복음의 씨앗은 내가 뿌렸지만, 그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의 역할은 그저 씨앗을 뿌리는 것뿐이었고, 그 씨앗이 아름다운 야생화로 피어날 것을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은 결과에 대한 조바심과 책임을 내려놓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역은 봄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절망 속에서도, 반드시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리는 믿음의 싸움이다. 씨앗이 땅속에서 죽어야 열매를 맺듯, 우리의 수고와 고독이 이 땅에 스며들어야 비로소 진정한 복음의 뿌리가 내릴 것이다. 낡은 기타에서 흘러나오는 단조로운 찬양 소리 속에서, 보잘것없어 보이던 그 작은 씨앗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자라나, 이 캄보디아 땅에 생명의 힘을 끈질기게 퍼뜨리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묵묵히, 주님이 맡기신 밭에서 기약 없는 봄을 기다리는 고독한 농부로 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