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동의 겨울을 지나 새로운 시간을 향해
기적의 54일과 약속
출소하는 날 아침, 배식 담당 기철이가 구치소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건네며 진심 어린 축하를 보냈다.
"형님, 마지막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나가시면 건강하시고, 여긴 다신 오지 마세요.“
날이 밝자 나는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53일간 치열하게 기록했던 일기장과 참회록은 규정상 가지고 나갈 수 없었다. 아쉬움이 컸지만, 내 영적 싸움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그 노트를 동료 영호 씨에게 맡기며 잘 보관해달라 부탁했다. 그것은 내가 이곳에 남겨두고 가야 할 53일이라는 시간 그 자체였다. 잠시 후, 복도에 간수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2887번 김매균, 출소!“
53일간 같은 공기를 마셨던 동료들과 마지막 악수를 나누었다.
"목사님, 고생 많았소. 당신 덕분에 잠시나마 행복했습니다."
10억 부도를 내고 들어왔던 사장 동료가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옆방에서도 축하 인사가 터져 나왔다.
"잘 가세요! 다신 오지 마쇼! 나가면 꼭 커피 한잔합시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28동 복도 전체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모두 건강하십시오! 재판 잘 받으셔서 하루빨리 가족 품으로 돌아가시길 빕니다!“
내 목소리가 1호실부터 12호실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험악해 보이던 동료들조차 창살 너머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육중한 철문을 향해 걸어 나가는 길, 복도 창밖 산등성이에는 겨울의 끝자락을 뚫고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내 영혼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되찾은 이름, 그리고 현실의 무게
"여긴 사람 들어올 데가 못 됩니다. 사업하다 오셨죠? 다시는 오지 마세요.“
무뚝뚝한 교도관의 배웅을 받으며 영치품 보관소로 향했다. 봉투에 적힌 '2008 김매균'이라는 글자가 54일간 잊고 살았던 나의 이름과 정체성을 되찾아주었다. 수의를 벗고 빛바랜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전원이 꺼진 휴대폰은 먹통이었고, 주머니엔 차비 한 푼 없었다. 자유의 기쁨도 잠시, 당장 집까지 갈 걱정이 앞섰다.
'어떻게 가족에게 연락하지? 버스 기사님께 교대역까지만 태워달라고 사정해야 하나?'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마지막 정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높은 벽과 육중한 문을 통과하자 총을 든 보초가 경례를 했다. 사형수와 대기업 회장들을 스쳐 지나며 보았던 53일간의 기묘한 동거가 끝나고, 나는 마침내 세상으로 귀환했다. 그 순간,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사회에서 늘 든든한 형제 같았던 친구 철호였다.
"매균 형님! 고생 많으셨어요. 난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철호야! 네가 오늘 출소하는 걸 어떻게 알았어?"
"어제 재판 내내 어머니랑 뒤에 서 있었거든요. 형님이 변호사도 없이 홀로 서 계시는 걸 보면서, 저 정직함이 반드시 기회를 얻을 거라 확신했습니다.“
철호는 어제 이미 아내에게 연락해 출소 소식을 전했다고 했다. 그의 세심한 배려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차에 올라 서울로 향하는 길, 창밖의 풍경은 꿈속처럼 아득했다. 춥고 칙칙했던 공간에서 신을 향해 울부짖던 나의 육신과 영혼은 이제 단단한 올무를 벗어나 재기의 세상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낡은 성경책 갈피에 담긴 보물들
구치소를 나서며 내가 얻은 가장 귀한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닌, 바로 '사람'이었다. 동료들은 떠나는 나에게 서툰 필체로 적은 쪽지와 편지들을 건네주었다. 낡은 성경책 갈피나 몰래 숨겨둔 포장지 속에 담긴 그 글귀들에는 '성공하세요',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투박하지만 진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 편지들은 나에게 '김매균'이라는 이름을 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잊지 말고,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는 무언의 명령이 되었다. 감옥은 나를 구원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곳에 남겨져 있었다. 그들의 눈빛과 마지막 인사는 내가 평생 짊어져야 할 사명이 되었다.
이 금쪽같은 편지들을 가슴에 품고 세상 밖으로 나섰다. 훗날 이 이야기들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고, 캄보디아에서 만날 수많은 낯선 이들에게 위로가 될 것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서울로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낮은 곳을 향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이제 곧 만날 아내에게 무슨 말을 먼저 건넬까. 54일 만의 자유, 그리고 다시 시작될 사랑의 이야기가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옥중 동료의 방문과 53일간의 비밀
출소 후 한동안은 현실과 감옥 사이의 가느다란 경계선을 걷는 기분이었다. 서울의 봄바람은 54일간 몸에 배었던 구치소의 퀴퀴한 냄새를 씻어냈지만, 내 마음의 지도는 여전히 28동의 차가운 복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구치소의 높은 벽을 넘어 희미한 연기처럼 동료들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그것은 고난의 밑바닥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재기를 향한 의지를 다지는 생생한 야생의 목소리들이었다. 얇은 편지지에서 풍기는 잉크 냄새는 28동의 좁은 감방을 서울 한복판의 내 사무실로 단숨에 소환해 놓았다.
나의 53일간의 겨울은 끝났지만, 누군가의 겨울을 어루만지는 사명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못다 한 이야기, 그리고 새로운 시작
공식적인 연재는 오늘 30화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하지만 53일간의 올무를 벗어던진 후, 캄보디아라는 새로운 땅에서 마주한 기적 같은 후일담과 담장 밖 동료들의 못다 한 이야기는 오직 정식 출간될 종이책을 통해 독자 여러분께 가장 먼저 전해드리려 합니다. 이제 저는 무거웠던 과거의 옷을 벗고, 일상의 사소한 풍경과 캄보디아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 길어 올린 일상 수필로 여러분을 다시 찾아뵙고자 합니다. 구치소의 쇠창살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들의 미소와 낮은 곳에서의 봉사를 통해 발견한 소박한 진실들을 하나씩 써 내려가겠습니다.
비록 연재는 여기서 멈추지만, 저의 시계는 이제 더 넓은 세상을 향해 힘차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흐르기 시작한 저의 시간 속에 여러분도 늘 함께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서울구치소 28동의 겨울'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더 깊고 따뜻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