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자전거 국토종주
캐나다에서 돌아와서 필수 자가 격리 2주를 했다. 예전에 아무것도 안 하고 2주 동안 집에만 있었던 적도 있었다. 크게 불편하지도 답답하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자발적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하려니 너무 답답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그 답답한 생활도 나름 적응했다. 강제 자가 격리 생활에도 루틴이 생겼다. 반갑지 않은 익숙함이 내 몸에 들어오려는 할 때 즈음 자가 격리가 끝났다. 이제 자유로운 도비가 되었다.
지긋지긋한 격리가 끝나고 그리웠던 한국 생활을 즐겼다. 그리웠던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고, 반가운 친구들을 만나며 놀았다. 그 순간만큼은 즐겁고, 행복했다. 자연스럽게 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새벽을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눈을 뜨고 핸드폰을 보면 정오를 훌쩍 지나고 있었고 늦은 점심을 먹으며 해장을 했다. 오랜만에 한국에 와서 노는 거니깐 하는 명분이 있었기에 큰 죄책감은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들이 반복되고 쌓이고 있었다. 이것도 한 달이 넘어가니 질려갔을 뿐만 아니라 허탈감을 주었다. 텅 빈 집에서 혼자 일어나 주로 짬뽕으로 해장을 했다. 해장을 마친 후 밀려오는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말 그대로 ‘현타’가 왔다.
한국에서 살아가기 위해 다시 기지개를 켰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남들 다 있는 것들은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익, 한국사, 컴활... 글쓰기 시험까지.. 종류가 많았다. 물론 어떤 일을 하냐에 따라 위의 자격증들이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만 일반 사무나, 행정 계열로 취업하기 위해서는 필수였다. 차근차근해보기로 했다. 하나하나씩. 가장 만만한 한국사부터 준비했다.
오랜만에 하는 공부라 쉽지 않았다. 공부를 하기 싫어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머리가 지끈했다. 그러나 공부를 하지 않으면 지끈했던 머리도 안정을 찾았다. 멀쩡했다. 몸이 공부를 거부했다. 내용을 외우려고 애쓸수록 손에 움켜쥔 모래알처럼 머릿속에서 빠르게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참고해야 했다. 결과는 1급 턱걸이 점수로 합격했다. 정말 운이 좋았다.
어학 점수와 자격증을 위해 공부를 계속 이어갔다. 틈틈이 자소서를 쓰고 여러 회사에 지원을 했다. 하지만 결과는 광탈. 자소서를 하도 쓰다 보니 이것이 진정 ‘나’인지 만들어낸 ‘자아’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진이 빠지도록 쓴 자소서가 탈락의 고배를 마시면 반갑지 않은 두통이 나에게 찾아왔다. 그러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대호가 애들 불러서 밥이나 한 끼 하자고 연락이 왔다.
대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했다. 남쪽 지방에 살고 있는 대호는 우리를 보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은 인천으로 올라왔다. 왕복 12시간 걸리는 거리였다. 캐나다를 가고도 남을 거리를 그 친구는 한 달에 한 번은 우리를 보기 위해 올라왔다.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는 준섭이, 퇴사가 꿈인 대호, 마지막으로 입사가 목표인 나까지. 이 술자리는 대한민국 이십 대의 현실들을 모아 두고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 술도 한 잔 기울었다. 소주 슥 잔이 들어가니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목소리의 톤도 높아졌다. 그러다 대호가 한 마디 시작했다.
"여행 한 번 가야지”
코로나 시국에 어디를 가냐고 타박이 곧바로 준섭의 입에서 나왔다. 나는 지금 코로나도 그렇지만, 내가 놀러 갈 상황이 아니야 라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어딘가를 떠나고 싶은 마음은 항상 가지고 있던 나였다. 계획했던 캐나다 여행이 코로나로 무산되면서, 여행에 대한 갈증이 풀리지 않은 채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술이 더 들어갔다. 얼굴들은 불그스름하게 상기되었고, 연한 초록빛 술병들은 한 곳에서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러다 소주를 삼키며 목에 머물게 만들었던 내 마음이 입 밖으로 나왔다.
“그러면 동해안 자전거 여행 갈래? 동해안 바닷길을 바라보면서 자전거 여행을 하는 거지. 숙소는 그 날 해 떨어지는 그곳에서 잡는 것이고, 중간중간 맛있는 것도 먹고 어때?”
대호는 곧바로 좋다고 했다. 평상시에 자전거를 즐겨 타고, 인천-부산 국토종주를 나 또한 나쁘지 않았다. 내 마음은 잔잔한 호수에 누가 돌을 던진 것처럼 파동이 일렁거렸다. 준섭은 공무원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못 간다고 했다. 우리는 이해하였고, 이렇게 이번 여행은 결정되나 싶었다. 그러나 계획을 짜던 도중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코로나 바이러스였다.
815 대규모 집회가 광화문에서 열렸다. 이로 인해 하루 확진자 300명을 넘어가는 날이 있었고, 세 자릿수 확진자는 일상이 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수도권 중심으로 행정 명령으로 떨어졌고, 일상이 부분적으로 멈췄다. 2차 코로나 바이러스 웨이브가 온 것이다. 대호는 휴가를 미뤘고, 우리의 여행도 잠정적으로 연기됐다.
그 사이에 준섭이 공무원 시험을 쳤다. 느낌이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준섭의 점수가 발표되었다. 전년 대비 합격 커트라인 점수를 충족시켰다. 1-2점 차이로 간신히 들어갔다. 점수만 먼저 나온 것이지 필기 최종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합격을 예상했다. 태평한 표정으로 일관해온 그였지만, 초조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결과가 나온 날 준섭에게 전화가 왔다. 자전거 여행 갈 수 있게 됐다고.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니 떨어졌다고 했다. 이번 합격 커트라인 점수가 10점 가까이 올라갔다는 것이다. 기대가 크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실망이 그를 무너트렸다. 어떤 반응을 해줘야 할지 난감했다. 합류해서 좋긴 한데, 마냥 좋지만은 않은 모순적인 느낌이었다. 모순덩어리 인생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왕 떠나는 여행 기분 좋게 가자고 했다. 그렇게 동해안 자전거 여행이 결정되었다.
새로운 출발에 대해 고민하기 위해 나온 준섭, 직장생활 속 인간관계에 치여 살아가던 대호는 ‘나는 누구인지’이라는 답을 찾기 위해 떠났고, 지겹도록 자기소개서를 쓰는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잠시 잊어버리려고 떠나온 여행이 되었다. 각자 저마다 다른 목표를 가진 채 떠난 여행이었다.
부드럽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어느 가을날, 우린 동해안 자전거 종주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