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심의한계를 시험하고 싶지 않았기에 '된장찌개'가 아닌 '라면'을 주문한 건 나름의 배려였다.
해달라고 부탁하는 건 뭐든 잘 들어주는 착한
이 남자는시키기 전까지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는 것과, 뭐 하나를 하려면 꼭 티를 내야 하는 게 흠이면 흠이다.
냄비를 꺼내는 달그락 소리와 함께 가늘고 긴 숨을 내보낸다.
'저리 비켜, 내가 끓여 먹고 말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내뱉는순간,착한 이 남자는 아내의 말이라면 또 곧이곧대로 들어줄 것이므로 조용히 삼켜야만한다.
누군가 그러더라.
남자들에게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줘야 한다나? 어이없지만 수긍이 빠른 나는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10년이 넘도록 알려줘야 할 줄은.
밥을 하라고 하면 ‘쌀’이 어디 있는지 묻고, 세탁기를 돌리라고 하면 ‘세제’가 어디 있는지 묻는 이 남자.
다방면에스마트한 이 남자는 10년째 집 안 물건의 위치 파악에유독 어려움을 겪는것으로 보인다.
아내를 시험에 들게 하는 걸까? 쌀과 세제를 자물쇠 고리 걸어 비밀금고에 넣어둔 것도 아닌데, 100평 자리 대저택에 사는 것도 아닌데 왜.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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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나 물건의 위치를 자주 바꾸는 부지런한 성향의 아내와 산다면 이해할 법도 하다.
하지만 변화를 싫어하는 그의 아내는 게으름에
무장한 채로 10년 넘게 웬만한 가구의 자리배치와 더불어 물건의 자리도 바꾸지 않았다.
신혼집 그대로 이사 한 번 없이 살고 있단 말이다.
설거지를 마친 그는(물론 자발적 행동은 아니었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장군처럼 기세등등한 표정과 으쓱거리는 어깨를 감출길 없이 아내를 바라본다.
이내 칭찬을 기다리며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주변을 맴도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피식 웃음이 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어깨너머로 기름기
가득한 프라이팬을 아내는 결국 보고 말았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진짜 앞만 보이는
걸까.고개를 45도만 돌려도 보이는 가스레인지 위 프라이팬에는 관심이 없다. 싱크대볼 안에만 볼 수 있는 이 남자, 집중력이 대단하다.
열에 아홉은 진짜 못 봤다는데, 이걸 믿어? 말어?
이 정도면 그의 시력을 의심해 볼 만했다.
당장 안과로 끌고 가돋보기안경이라도씌워줄 준비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 그 남자는 해맑은 얼굴로 건강검진 결과표를 내민다.
맙소사! 시력이 1.5였다. 언빌리버블..
그래서 그 좋은 시력은 도대체 언제 쓰는 건데?
'결혼생활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에게 결혼생활이란 무엇보다 '나와 안 맞는 사람과 사는 일'이었다. 생활패턴, 식성, 취미, 습관과 버릇, 더위와 추위에 대한 민감함 정도, 여행방식, 하물며 성적 취향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이렇게 나와 다를 수 있지?'를 발견하는 나날이었다. 이 질문은 점차 '이토록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어째서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살 수 있지?'로 변해갔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