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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은비 Aug 18. 2020

아들을 낳고 싶었던 이유

딸 가진 엄마의 두려움에 관하여

아이를 계획한 순간부터 아들이길 바랬다. 병원에서 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첫째는 딸이 좋다더라, 딸 낳으면 엄마가 외롭지 않다는 등 주변의 얘기들로부터 위로받고 싶었지만 무언가 무겁고 먹먹한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왜 나는 그토록 아들을 원했을까.


그 이유를 딸을 낳고 일 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나의 엄마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엄마는 1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결혼하기 전부터 40대가 될 때까지 몸무게가 항상 40kg을 왔다 갔다 하는 마른 체구를 가지고 계셨다(물론 지금은 다이어트를 매번 실패하는 조금은 통통한 엄마이지만^^). 엄마는 지금의 큰엄마의 중매로 아빠를 만나 연애기간 없이 바로 결혼하셨다. 서로에 대해 잘 몰랐던 아빠와 엄마는 성격차이로 많이 다투셨다. 엄마는 배우거나 도전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고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셨다. 엄마의 세상은 아빠의 세상보다 넓지 못했고 아빠는 그런 엄마를 답답해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에 대한 기억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었다. 특히 둘째였던 나를 '똥강아지'라 부르며 많이 예뻐해 주셨다. 하지만 내가 커가면서 예민하고 자기주장 강한 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엄마는 점점 나에게 거리를 두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즈음에 엄마는 맞벌이를 시작하셨다. 아빠가 건설업을 하면서 모아둔 돈으로 단란주점을 차리셨고 그곳의 관리자로 엄마를 세웠다. 사회생활이 부족했던 엄마에게 주점을 운영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녁에 출근해 새벽에 집에 돌아와서 언니와 나의 밥을 차려놓고 엄마는 바로 잠이 드셨다. 내가 깰 때까지 엄마는 일어나지 못하셨고 난 차려놓은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갔다. 집에 돌아올 때면 엄마의 얼굴은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리고 저녁을 차린 후 엄마는 또 집을 나섰다.

엄마의 맞벌이는 내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이어졌고 나는 대부분의 일을 혼자 해나갔다.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나 대학교를 선택할 때에도 필요한 조언은 엄마 대신 책이나 주변으로부터 구했다.

대학교 진학 후 여러 친구들을 만나고 연애를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세상에 대한 시야가 넓어졌다. 각자 자신의 원하는 삶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마주하는 엄마의 모습은 여전히 삶을 버거워하고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못했다. 나는 그런 엄마가 숨 막히게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왜 당신이 원하는 삶이 아닌 누군가에게 끌려다니는 삶을 사는지, 그리고 그 삶을 극복해 나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지..(지금은 그만큼 엄마의 상황이 어려웠고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들이 엄마를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구분 짓게 했고, 엄마의 말은 나에게는 뭘 모르는 사람의 가벼운 조언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사실 엄마에게 바라는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엄마에게 간절히 바랬던 것은 바로 엄마의 '행복한 모습'이었다. 엄마와 함께 산 30여 년의 시간 동안 내 기억 속에 엄마의 진심 어린 미소는 본 적이 없다. 항상 지쳐있었고 무력했으며 가족과 삶을 버거워했다. 나는 그런 엄마가 어느 순간부터 미워지기 시작했다. 나에게 무엇을 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엄마가 행복하지 않아서 미웠다. 그런데 딸을 낳으니 이 마음이 무의식 중에 나에게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과 싸운 어느 날, 딸 앞에서 감정조절을 하지 못하고 소리치며 울어버렸다. 순간 그런 내 모습에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딸 앞에서 행복한 존재여야 하고 딸이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면 안 됐기 때문이다. 나는 딸에게 나의 엄마같이 미움받을까 봐 두려웠다.


이런 나의 마음을 보고 나니 내가 딸을 원치 않았던 건 조금이라도 엄마와 나와의 관계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여자로서 엄마와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았지만 나의 딸 또한 나에게 그런 생각을 가질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무의식 속에 나는 딸보다 아들을 원했던 것이다.(물론 아들이라고 그런 두려움이 없을 거라는 건 아니다)





지금 엄마는 어느 때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투자하고 있고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계시다. 지금은 엄마에 대한 미움도 사랑의 하나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지금의 엄마의 삶을 누구보다 응원하고 지지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 엄마의 행복하지 않은 모습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삶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나와 같은 딸을 가진 엄마로서의 나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자식 때문이 아닌 나 자신으로써 말이다. 적어도 아이와 가족만을 위한 인생은 살지 않기로 했다. 가족이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임은 확실하지만 나는 나를 가장 사랑하기로 했다. 계속해서 배우고 계속해서 도전하며 나를 찾아가고 그 안에서 계속 성장해 나갈 것이다. 그것이 결국은 나의 딸도 행복해지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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