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가 사라진 삶의 슬픔

읽어야 삶이다

by 림태주

사람의 일생은 세 곳에서 시작되고 마침표를 찍는다. 병원에서 태어나 학교에 수용되고 직장에 몸을 바치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른다. 이 세 곳에는 고치고 가르치고 욕망을 부추기는 전문가들이 있다. 이들은 생명을 연장시켜주고 돈 버는 기술을 습득시켜주고 나의 쓸모를 돈으로 환산해 준다. 병원과 학교와 기업의 카르텔은 공고하다.


국가는 이 전문가 집단의 용도를 통합하고 경영해서 개인의 일탈을 통제하고 자유를 제한하고 경제 성장의 도구로 사용한다. 우리가 기를 쓰고 직장에 다니려고 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기업조직이 제공하는 의료와 재교육, 여가 서비스 같은 각종 복지혜택을 제공받기 위해서이다. 국가는 시민들의 사회의존성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제도와 장치를 고안해낸다. 체제 안에서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설계하고 관리한다.


동사가 사라진 삶을 우리는 살고 있다.


'배운다’라는 말을 ‘학점 취득’이라는 명사가 대신하고, ‘재미있다’라는 말을 ‘게임'이나 ‘놀이공원 회원권’이라는 명사가 대체했다. 스스로 배우고 즐거움을 체험하는 동사적 능력은 퇴화하고, 이미 만들어진 필요에 누가 더 빨리 세련되게 적응하는지 경쟁하는 삶을 살고 있다. 스스로의 만족에 기반한 욕구를 만들어가는 능력은 좀체 발현되지 않는다. 그 능력을 발휘하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아주 가난하거나 아주 부자여야만 가능하다.


내가 나의 쓸모를 되찾으려면 자발적 가난, 자발적 실업을 감행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불운하게도 산업조직의 체제에 속해 있는 한 내가 나의 쓸모를 회복할 길은 없다. 사람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고유한 기술들, 채소를 기르거나 장작을 패거나 동물의 털가죽을 벗기는 일을 하지 않아도 지금은 사는데 문제가 없다. 그 일들은 각기 분업화된 전문가들이 알아서 해주기 때문이다. 노동 능력이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인, 직업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까닭에 자율적이고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조건으로 실업을 선택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집에서 아이를 낳을 수도 감기를 치료를 할 수도 전기를 설치하고 수도를 고칠 수도 없게 되었다.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는 '현대화된 가난'을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우리의 전통사회는 침몰하고 있다. 이에 대한 비통한 애도사를 줄기차게 써온 이가 있다. <학교 없는 사회>를 쓴 이반 일리치는 학교, 교통, 위성도시, 대형병원, 매스미디어와 같은 대량생산 산업시스템이 시민들의 자발적 행동능력을 어떻게 빼앗아갔는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저작들을 줄곧 써왔다.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살 권리’를 주창한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를 읽으면, 산업사회가 그토록 찬미하고 계몽했던 ‘해방된 인간’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에 대한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산업성장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있다. 빨리 달리기 위해 만든 자동차가 끝없이 많아져서 다 같이 천천히 달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병원은 생명을 살리는 곳이지만 병원에서도 통제할 수 없는 슈퍼박테리아가 생겨나고, 예방약도 치료약이 없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병원에서 감염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메르스 사태로 알게 되었다. 철저하게 자본으로 성장한 병원이 병의 진원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진보가 더 이상 인류의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양적으로 임계점에 달하면 진보란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만한 성장은 결코 성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농경문화에서 산업사회로의 전 지구적 변화를 성찰하는 사람이다. 농경문화의 죽음은 극적인 사회변화로 이어졌고, 이러한 격변으로 현대는 과거와 영원히 결별하게 되었다. 이 격변은 인류가 수천 년간 생계를 해결하며 지속해온 문화적 진화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저마다의 고유성을 지닌 문화형식들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진화해온 인류의 역사는 대량생산 시스템의 보편적인 요구에 따라 획일화되고 통제되면서 인간 조건은 자발성과 자립, 자급과 자족이라는 인류 본연의 가치를 상실해버렸다.


타락한 우리의 노동 공동체, 성장 시스템에 우롱당하고 기만당하는 노동은 스스로의 진정한 쓸모와 가치를 회복할 수 있을까? 불편하지만, 우리는 너무 늦지 않게 ‘성장으로부터의 해방’이 이 행성 전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율적 공생, 창조적 실업의 관점에서 대안적 희망을 찾기 위해 문명과 맞서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비루해서 견딜 수 없는, 너무나 하찮은 존재로 전락해버린 우리의 삶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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