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문장들
연상의 여자였다.
입대를 앞두고 이별했다. 그때 나의 현실이 녹록하지 않았다. 학업도 마쳐야 하고 군대도 다녀와야 하고 취업도 해야 하고 돈도 모아야 하고. 앞날을 생각하면 모든 게 암담했다. 변명에 지나지 않겠지만 나는 내가 가진 미래를 신임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내게는 사랑을 지켜낼 용기도, 뜨거움도 모자랐다.
상병 계급장을 달고 휴가를 나갔다. 봄꽃은 분분히 흩어지고 새잎들이 하늘을 장악해 갈 무렵이었다. 밭에 나가 고구마 순을 심는 어머니를 도왔다. 내가 일하는 요량이 서툴게 보였던지 어머니가 내게 일렀다.
“고구마 줄기 서너 마디가 묻히도록 깊게 묻고 흙을 잘 덮어줘라. 뿌리를 내릴 때까지 줄기가 마르면 안 되니까.”
고구마의 생명력은 경이롭다. 줄기를 잘라 심으면 뿌리를 내리고 거름을 주지 않아도 가을이면 땅속에 주렁주렁 구근을 품는다. 아무 데서나 쉽게 자라서 아낌을 받는 구황작물이 됐을 것이다.
“남향으로 누이게 심어라.”
나는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고구마 순이 남향으로 눕게 비스듬히 묻었다. 그러다 문득 이게 어떤 농법이나 이치가 있어서 그러는가 싶어 어머니께 물어보았다.
“그렇게 하라고 어디 정해진 법이 있겠느냐. 그냥 내 마음이 그런 거지. 사람도 해가 비치는 쪽으로 집을 짓고 사는데 햇볕을 먹고 사는 식물은 더하지 않겠느냐.”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어머니는 그렇게 마음을 쓰셨다. 어머니는 화초를 유난히 좋아하셨다. 몇 뙈기 되지 않는 밭에는 콩이며 참깨며 고추며 토란이며 감자가 늘 풍성하게 자랐다. 그 많은 화초며 작물들이 어머니 손만 닿으면 왜 그토록 생기를 띠고 토실토실 열매를 맺는지 알 것 같았다.
“햇볕을 많이 받은 나무와 그늘진 나무가 다르지 않더냐. 나무도 사람하고 똑같은 거지. 작물이야 햇볕 가리는 나뭇가지를 쳐주면 되지만, 사람은 자기가 만든 그늘 때문에 응달지기도 하는 법이지.”
나는 그때 멈칫, 들고 있던 호미를 놓쳤다. 자기가 만든 그늘이라는 어머니의 말이 내 명치를 찌르고 들어왔다. 아들 얼굴에서 수심을 읽었는지 어머니는 나무 그늘을 빗대 자식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다스리지 못한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나는 무안하고 민망했다.
“여태 못 잊은 게냐?”
어머니는 아들이 사랑했던 여자와의 지나간 일을 그렇게 물으셨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황토밭에 고구마 순을 묻었다. 황토밭은 고구마를 달고 단단하게 키워낸다. 황토는 봄에 가장 선명하게 붉은빛을 드러낸다. 여름에는 초록이 덮고 가을에는 단풍이 덮고 겨울에는 눈이 덮는다. 제 빛깔을 드러내는 시기는 새잎과 잡풀들이 아직 황토의 붉음을 온전히 가리지 못하는 봄날이다. 어머니의 눈에는 아직도 겨울에 덮여 제 본연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식이 안쓰럽고 애달팠을 것이다.
“억지로 잊으려고 애쓰지 마라. 잊어도 다 잊어지지않는 일도 있더라. 몸 상해가며 아파하지도 말고. 아파하느라 힘들게 살면 그것이 어디 사랑한 보람이겠느냐. 네 몸을 살피고 정성껏 살면 되는 거지.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