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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태주 Apr 23. 2021

나는 식물집사를 거부한다

픽사 영화 <소울>에 집중하지 못한 근사한 변명


요즘 새로 알게 된 용어가 있다. 식물집사. 반려식물을 키우고 돌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반려견이나 반려묘 집사 얘기는 많이 들었으나 이제 식물에까지 집사가 붙는구나 싶었다. 나는 집사라는 말에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건 자발적 책임성의 정도를 지나 무언가에 종속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식물을 좋아하고 식물을 기르고 돌보며 살지만 식물집사가 되고 싶지는 않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면 아끼고 살피고 돌보게 된다. 그걸 사랑이라고 믿기도 한다. 그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그 대상에 따라 사랑의 방법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끼고 살피고 돌보는 것이 때로 사랑이 아니며, 그게 능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식물이라고 사람과 다르겠는가. 식물 입장에서 보면 사람의 보살핌과 돌봄의 강도를 최소화하는 게  오히려 더 사랑에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사랑의 시작은 나의 기쁨과 나의 유익이지만, 사랑의 궁극은 대상의 온전함과 안녕함이 아니겠는가.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식물을 화분에 가두고 기른다는 말은 인간의 돌봄, 즉 개입을 최대화한다는 의미다. 즉 내가 관리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편의적 환경이지, 식물이 자기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때 나는 식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의 필요를 이용하는 것이다.

      

나는 식물 화분을 구입하거나 선물 받으면 딱 두 가지로 분류한다.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가, 내가 보살펴야 하는가. 즉 노지에서 월동을 할 수 있는가, 실내에서 키워야 하는가를 구분한다. 월동이 가능한 식물이면 화분 밖으로 꺼내 밖에 심는다. 그렇게 해서 돌봄을 최소화한다. 스스로 생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월동하지 못하는 식물들은 화분에 있어야 겨울에 실내로 들일 수 있다. 때가 되면 물을 주고 분갈이를 하고 보온해줄 뿐이다. 최소한의 개입으로 나의 책임을 다한다. 잘 자라고 못 자라고, 죽고 살고의 문제까지 내가 관여하는 걸 제한한다. 그건 식물 자신의 힘이고 자연의 조건에 맡긴다. 관상용인 것은 맞지만 어항이 아니라 매일 먹이를 줄 필요가 없는 연못에 풀어준다. 환경에 스스로 적응해가며 제 삶을 살아내도록 하는 것이 나의 사랑법이다. 그래서 나는 식물집사 노릇을 거부한다.

 

내가 식물을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길게 얘기한 이유는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가 보는 내내 불편했다. 나쁜 영화라는 의미가 아니다. 지나치게 나를 가르치려드는 영화여서 그랬을 것이다. <소울>은 지금 여기, 나의 삶의 의미를 묻는 영화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훌륭하고 분명하고 좋은데,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과정이 집착적으로 보였다. 치밀하게 짜인 계산된 각본이어서 다른 생각을 끼워넣기가 애매한 영화였다. 나는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답이 정해진 일보다 답이 없는 일을 하는 게 재미있고, 그 일에 나의 방식들을 이리저리 적용해 보기를 좋아한다.

      

나는 식물을 기르면서도 그렇지만, 내가 하는 일에 어떤 의미를 과하게 부여하는 걸 경계한다. 나는 의미에 집착하는 걸 버렸다. 의미가 있어야 가치를 얻고, 의미심장할수록 삶의 위대함과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클리셰를 싫어한다. 육체적인 것은 추하고, 영혼적인 것은 아름답고 숭고하다는 통념에는 몸서리를 친다. 인간의 삶은 분명하기보다는 오히려 모호하고, 특별하기보다는 일상적이고, 가득하기보다는 허허롭고 외로운 조건에 더 적용돼 있다. 그렇지만 인간은 그 조건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소불위의 문명을 일구었을 것이다. 고상함과 세련됨을 추구하느라 디테일에 집착하고,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소유와 비움의 방법론을 찾아 끊임없이 비교하고 탐색한다. 인간은 계발되어야 하지만 개조되어야 할 대상은 아니다. 계발이든 변화든 삶의 과정이어야지,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면 안 된다. 행복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현상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관념이고 허구이다.


나는 식물을 기르면서 자주 생각한다. 나라는 한 생명체도 자연이 기르는 식물에 불과하다고. 우주의 어느 한 귀퉁이에 스스로 살아내도록 바깥에 방치해둔 것이라고. 자연이나 신이 내게 그런 메시지를 준적은 없지만, 나는 그렇게 여기며 산다. 자연이 내게 부여한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생명을 얻었으므로 생명의 책임을 다해 살아간다. 그것도 아주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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