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란 무엇인가

새해를 낯설게 맞이하는 자세에 대하여

by 림태주




‘설’이란 말은 두 가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왜 설을 ‘설’이라고 부르게 됐는가? 언제부터 우리는 신정 설과 구정 설을 쇠게 됐는가?


설이 양력설과 음력설로 나뉜 이유는 조선 고종이 1896년에 ‘태양력’을 공식 채택했기 때문이다. 국가의 행정 기준이 양력으로 전환됨에 따라 양력 1월 1일을 ‘새로운 정월’, 즉 신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국가는 새해의 시작을 앞당겨 선포했지만, 농경하는 백성들은 여전히 ‘달력’의 기준대로 살아왔다. 이 괴리를 인정해 신정과 구정이라는 명칭이 생겼고, 휴일로 지정되었다. 신정을 지나 대략 20일에서 50일 사이에 설날이 온다. 지구와 달의 공전주기 때문이다. 매해 신년 초가 되면 태양의 질서와 달의 리듬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고 있음을 상기하라는 뜻 같다.


‘설’이란 말의 유래를 뒤적여 보면 크게 세 가지 설이 나온다. 첫 번째는 ‘나이를 세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설’이 ‘세다(算)’ 또는 나이를 헤아리는 날에서 나왔다는 주장인데 음운적으로나 문헌적으로 근거가 별로 없어 보인다. 두 번째는 ‘삼가다, 조심하다’에서 왔다는 설이다. 민속 기록에는 설 무렵에는 언행을 삼가고 금기를 지켜야 한다는 관념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독립적인 어원으로 확정하기엔 이 역시 근거가 부족하다.


가장 유력한 주장은 ‘낯설다·설다’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낯설다’, ‘설다’의 어근 ‘설’에서 설이 왔다고 주장하는 국어학자들이 많다. 새해는 처음 맞이하는 시간이라서 익숙하지 않고 새롭다는 의미와 들어맞고, 고어에서 ‘설다’는 ‘덜 익다’, ‘익숙하지 않다’와 연결된다. 즉 설날은 새해라는 낯선 시간으로 들어가는 첫날을 의미한다.


설이 ‘설익다’에서 유래했다는 국어학자들의 주장에 나는 매우 동의한다. 설 무렵이 되면, 나는 다른 의미로 내가 얼마나 설익은 인간인지를 절실하게 깨닫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새해 1월 1일에 맞춰 소위 ‘올해 목표’라는 걸 세운다. 그 계획은 창대하고 용감무쌍하다. 10킬로그램 감량 다이어트에 돌입하고, 유창해질 어학원에 등록하고, 식스팩 헬스클럽 회원권을 끊는다. 자산 증대 목표를 세우고 빡센 근검절약에 진입한다. 한 달여가 지나 설 무렵이 되면 벌써 감이 온다. 내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인간인지를. 무리하고 과도한 계획을 겁 없이 세웠음이 만천하에 드러난다. 나라는 사람의 덜됨, 그 설익음을 자인하게 되는 무렵이 바로 설이다. 그래서 설은 우리에게 그 원대한 목표를 실행 가능한 현실적인 수준으로 재수정할 기회를 준다. 신정과 구정, 설이 두 번 있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너의 의지박약함과 탐욕스러움을 직시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 가능하게 시작해보라는 뜻이 ‘설’에 있다.


필름을 거꾸로 돌려보면, 내 기억 속의 설 풍경은 거의 백색이다. 푹푹 발이 빠지는 눈을 밟으며 아버지를 따라 성묘를 다녔다. 그 풍경 속에는 동리 사람들이 왁자지껄 모여 멍석을 펴고 놀던 윷놀이와 제기차기와 줄다리기와 연날리기도 있다. 그리고 설날에 빼놓을 수 없는 의식, 세배(歲拜)가 있다. 세배는 우리나라 전통 풍속 중에서 정말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예절이다. 이 풍속이 사라지면 ‘세뱃돈’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에 인사성이 밝은 아이였는데, 설날에는 그 인사성의 정점을 찍었다. 표현이 뭣 하지만, 설날은 그동안의 인사 값을 수금하러 다니는 날이라고 해도 무방할 테다. 일가친척은 물론 동리 어르신들을 찾아뵈옵고 문안을 여쭈면 십시일반 헌금해주셨다. 나는 똘똘한 데가 있어서 먼 관계의 세배는 주로 오후 느지막한 시간에 다녔다. 남자 어른들이 불콰하게 술이 올랐을 때가 서슴없이 지폐를 뽑기 좋은 미몽의 시간인 때문이다.


내게는 두 아버지가 있었다. 조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장손 아버지와 그 유산을 깡그리 탕진한 빈털터리 아버지. 내가 태어났을 때는 후자의 아버지가 나를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심청이처럼 효심이 깊지 못해 쌀 삼백 석을 바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의 가난을 신경 써 본 적이 없다. 낡은 옷을 물려 입었고, 운동화를 사지 못했지만, 가난을 몸으로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 가난은 비교와 조롱에서 오는데, 그때는 대부분 올망졸망 비슷한 수준으로 살아서 가난을 체감할 틈이 없었다. 혹 먼저 부자가 돼 전화기나 텔레비전을 들인 집은 그 신기하고 값비싼 물건들을 동리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사용했다. 그때는 사람이 사람을 보듬고 껴안으며 살았다. 겨울바람이 엷은 벽과 문틈으로 쳐들어왔지만, 사람의 가슴은 훈훈하고 따뜻했다.


나는 그 막대한 세뱃돈을 어디다 썼을까? 아무리 필름을 돌려봐도 용처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나는 틀림없이 원대한 목적이 있어서 돈을 모았을 텐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돈으로 산 물건들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느 해는 아버지 몰래 어머니에게 드린 적도 있고, 내가 갖고 싶었던 헤비메탈 그룹 스틸하트의 노래 테이프나 아디다스를 샀던 것도 같다. 또렷한 기억 하나는 있다. 친구 부모님이 운영하는 ‘동춘원’에 아이들을 몽땅 데리고 가서 짜장면을 주문해 다 함께 히히거리며 행복하게 먹었던 기억. 그 당시는 특별한 날이 아니면 중국집에 가기 어려웠고, 늘상 배고프던 시절이라 큰맘을 먹어야 갈 수 있었다. 그런 걸 두고‘기마이 쓰다’, ‘기마에 좋다’라는 일본어 표현을 썼다. ‘돈이나 물건을 선뜻 내놓는 기질’이나 ‘인심이 좋고 통 큰 사람’이라는 뜻의 은어다. 내가 먹어본 가장 맛 나는 짜장면은 그날 내가 호기롭게 기마이 쓴 짜장면이었다.


설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나를 뒤돌아보는 날이라고. 설에 차례를 지내는 이유는 조상을 추모하고 기린다는 뜻도 있지만, 가족이 함께 모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을 한자리에 불러 살핀다는 의미도 있다. 그동안의 무탈함을 안도하고 모두가 잘 되기를 바라는 덕담을 나눈다. 누군가를 기리고 기억하는 일은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하게 만든다. 내가 연결된 관계들을 둘러보면서, 나는 이 세상에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혈연으로 이어진 포유동물임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떡국을 먹는 풍습 속에는 단순히 나이를 더한다는 의미만 들어 있는 게 아니다. 한 인간의 육성과 성장을 음식 문화 속에 담아냈다는 점에서 따뜻하고 지혜롭다. 한 그릇의 떡국은 생물학적인 몸의 나이가 아니라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성장을 의미한다. 그렇게 우리는 매년 떡국을 먹으며 조금씩 품을 넓히고 밖으로 향하는 시선의 깊이를 더하며 미더운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수금이 목적이었던, 나의 철 없던 세배는 어떤가? 세배는 단순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올리는 예절에 그치지 않는다. 세배에는 반드시 덕담이 따라온다. 덕담은 남이 잘되기를 바라는 염원이다. 덕담은 미래에 관한 예언도 피상적인 주문도 아니다. 덕담은 함께 축복받고 함께 잘 살아보자는 공동체적인 합의를 내포하고 있는 가장 푸근한 말씀의 환대다.


이 모든 의미를 합쳐, 설이란 무엇인가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면 이렇다. 설은 새롭게 사랑을 시작하자는 다짐의 날이다. 과거를 기억하되 과거에 머물지 않고, 죽은 이를 기리되 살아 있는 현재의 삶을 희망차게 밀고 나가자는 다짐이다. 병오년 설이다. 첫 마음으로 첫눈에 반한 듯이 다시 사랑을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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