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일기
퇴근길 지하철. 자꾸 발등 부분이 아팠다.
“왜지?”
작은 신발을 신은 것도 아니고 가장 편한 운동화를 신고 퇴근하던 길이라 이상했다. 지하철 안에서 신발을 벗어 고쳐 신을 수도 없기에, 머릿속으로 이유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설마 나 무지외반증인가?’
온갖 생각을 하며 집에 도착해서 신발을 벗었는데, 어이가 없었다. 높은 내 발등에 맞지 않은 양말이 발등을 꽉 조이고 있었다. 맞지 않는 양말을 신어서 그렇게 아픈 거였다.
‘의식적으로 양말을 사본 적이 언제였더라.’
양말을 벗으며 생각해봤다.
이 양말도 발뒤꿈치가 까지길래 지하철 편의점에서 아무것이나 급하게 산 것이다. 지하철에서 파는 양말이 보드 라울리 없다.
남편한테 양말 자국을 보여주었더니, 바로 방에 들어가서 컴퓨터로 몇 번 클릭을 하고 온다.
“양말 몇 켤레 샀어, 내가 항상 사는 거기 있잖아. 여자 사이즈도 팔거든.”
잊을 뻔했다. 남편은 정기적으로 양말을 산다는 걸.
양말을 사러 자기가 좋아하는 매장이 있는 백화점까지 갈 정도다. 워낙 발 사이즈가 커 일반 양말을 못 신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는 마음에 드는 패턴과 계절감, 상황에 맞는 양말을 갖추어 두고, 너무 낡은 양말은 늦지 않게 버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작은 것들을 챙긴다.
연애 때, 나의 자취방에 처음 방문한 그는 이곳이 진짜 내 집이 맞는지 의심했다고 한다.
집은 꽤 넓었지만(당시 친오빠가 가끔 방문하였기에 방이 2개인 집을 얻었었다) 싱글 매트리스 하나 덜렁 놓인 내 방을 보고, 남의 빈 집을 빌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생수를 이고 지고 언덕을 오르는 내 모습을 보고 그는 브리타 정수기를 사자고 했고, 나는 페트병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며칠 전 재택근무를 하면서 컴퓨터가 느리다고 투덜거렸더니, 중고 램을 사서 붙여주었다. 갑자기 빨라진 컴퓨터에 박수를 보냈더니 그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를 만나기 전엔 이런 것들이 불편한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게 썩 불편하지 않다. 아니, 불편하긴 하지만 그냥 참으면서 사는 게 너무 익숙하다.
나를 압도하는 문제들, 예를 들면 몇 년째 날 괴롭히는 우울함, 맡은 일을 감당할 만큼 똑똑하지 못하다는 움츠러들음, 무언가 더 배우고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에 비하면 생활의 불편함은 참고 넘어가도 될만한 것들이었다. 작은 것들을 바꾼다고 큰 일이 해결되지도 않을 터인데, 하며 무시하고 살아왔다.
막상 작은 것들을 개선하기 시작하니 좋은 점이 많다. AI 스피커 같은 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졸릴 때 즈음 손 닿지 않아도 전등을 끌 수 있으니 꿀잠을 잘 수 있다.평발은 원래 발이 아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평발용 깔창과 슬리퍼가 있으면 발바닥이 아프지 않게 살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볶음밥을 만들 때, 예전 같았으면 서툰 내 칼질을 타박했을 나였지만 이제는 야채 다지기를 꺼내어 버튼을 쿡, 하고 누르면 끝이다.
꿈과 기대, 미래. 명예. 욕망. 이런 것들은 멀고 희미하다.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목표 삼아 무겁게 걸어가야만 잘 살아가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갈수록 자신감은 떨어지고, 삶은 불편하고 갑갑해졌다. 커다란 생각에 집착할 수록 내 다리에 찬 모래주머니는 더욱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남편과 살면서 배우고 있다. 마음에 드는 섬유유연제 향기가 나는 베갯잇으로 부지런히 바꿔주고, 어두운 화장대에 조명을 달아서 밝은 빛 아래에서 화장할 수 있게 하는 것, 신발을 신을 때는 구두 주걱을 써서 편히 신발을 신고 나갈 수 있게 하는 그런 작은 것들이 살아감을 더 생기 있고 활기차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커다란 생각을 이루기 위해 온몸으로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작은 것들을 챙기는 것이 삶을 가볍고 유연하게 만든다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