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의 출처는 나였음을

상처는 나의 특징이 아니라 내가 그 위에 덧붙인 낙인에서 시작된다

by 계란지망생 흙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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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때 영어토론동아리를 했었다. 자존감이 깎여 나가는 무수한 순간들을 차치하고도 동아리를 계속할 수 있었던 동력은 하나였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생각전환의 순간은 온 몸에 짜릿한 희열을 퍼지게 했었다.


대학간 친선 토론이 있었던 어느 날, 'THBT Affirmative Action on Ugliness Should be Established (못생김에 대한 우대정책이 있어야 하는지)'라는 장난스러운 주제가 선정되었다. 평생 못생기게 살아온 사람으로서 아주 마음에 콕 박히는 주제였고, 나는 당연히 찬성 쪽으로 기울었다. 찬성 측에서 주장하는 구조적 불평등을 보정해야할 필요성, 능력의 가시화, 다양성의 사회적 가치, 차별의 관성 차단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 측에서 제기하는 못생겼다는 기준의 주관성, 역차별 문제나, 낙인효과, 능력주의 훼손, 임시방편 처방이라는 논거들은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런데 한 선배가 'Destigmatize 낙인해체' 필요성에 대한 주장을 펼치시며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못생김에 대한 우대는 '못생김이 결함'이라는 낙인을 고착화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못생김으로 인한 차별을 없애려면 못생긴 걸 개성있다는 것으로 재정의해야된다는 주장이었다. 더 이상 흑인이라는 인종적 특성이 열등함으로 번역되지 않듯 못생김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묘했다. 내가 기억하는 그 선배의 논지를 요약하면 이렇다.

흑인에 대한 우대정책은 과거 차별의 누적효과로 발생한 경제적 교육적 기회 격차를 완화하는 것이 취지기 때문에 '얼마나 흑인인지'가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반면 못생김으로 인한 차별의 누적 효과는 직결된 요소들을 증명할 방법이 없기 떄문에 '얼마나 못생겼는지'를 기준으로 삼을 수 밖에 없고, 이는 못생김 자체가 결함이라는 프레임을 씌운없다.

못생김은 유전적 필연도, 절대적 기준도 아닌데 극복 불가능한 장애요인으로 취급하는 것 자체가 차별을 고착화시키는 잘못된 전제이다. 나는 시력이 나빠서 안경으로 교정하지, 내가 얼마나 준-시각장애인지 인정받고 싶지 않다.

그 날 이후, 나는 '못생김이 결함'이라는 전제 자체가 깨져야하는 것일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아시아인이 흔치 않았던 2017년의 엘살바도르에서 나는 한국인인데도 불구하고 종종 'Chinita(중국 여자애)'라고 불렸다. 길거리의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회사동료들이 이름을 알면서도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건 영 거슬렸다. 그라데이션으로 짜증이 누적되다 터진 어느 날, 점심을 설득을 시도했다. 1차 시도 - 길 가다 유럽 사람처럼 같아 보인다고 다짜고짜 아무 유럽언어로 인사하지는 않지 않냐, 그것처럼 모든 아시아인을 싸잡아 중국인이라고 하는 것도 적합하지 않다. 2차 시도 - 나는 여러 면모를 가진 하나의 인격체이고 그 중 가장 대표성이 있는 것을 꼽자면 나의 이름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 그 중 '아시아인'이라는 특성만 부각되는 것도 싫고, 심지어 그 특성을 잘못된 꼬리표를 붙여 말하는 건 틀렸다. 3차 시도 - 나는 아시아인치고 눈이 큰 편인데 나한테 'Ojos achinados (중국인 같은 눈)'이라고 하는 게 싫다. 각각의 시도는, '나 아는 유럽 언어가 스페인어 밖에 없어서 그냥 Hola하는데? 다음엔 Bonjour도 해봐야겠다', '그치만 너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 아시아인스러운 찢어진 눈인 걸', '너 말 듣고 보니까 세로 크기가 되려 우리보다 크네? 근데 너 눈은 그래도 옆으로 더 길어서 찢어졌다고 하는 거야. 쟤 봐봐, 쟤는 엘살바도르인이긴 한데 쟤도 너처럼 중국인 눈이야'라는 반박들로 무력화되었다. 악의가 없이 흥미롭게 이 주제를 고민하고 해맑게 대답하는 이들이 순수악처럼 느껴졌다. 아주 치가 떨리고 속이 벅벅 긁혔다. 대놓고 멕이나 싶은 기분도 들었다.


화가 나서 이 모욕적인 기분을 되갚아 주고 싶었다. 한국어 대화였으면 육두문자를 날리거나, 아니면 '이런 몰상식은 너희 교육제도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는 거고, 유유상종하며 몰지각한 생각이 고착화되는 거다, 일명 국제기구라는 데서 종사하는 사람들이 이 정도 수준인 게 부끄럽지 않냐'고 퍼부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감스럽게 스페인어가 짧았던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지들은 감자같이 생긴게'가 다였다. 그래서 회사에서 모두와 척지고 싶지는 않다는 마지막 한 가닥 이성과 함께 안 좋은 말을 예쁜 말투로 물어봤다. "너희가 동글동글하게 생겼다고해서 내가 너희를 '감자들'이라고 부르면 기분이 별로지 않겠니?"


참 편견 없는 엘살바도르 친구들은 깔깔 웃으며 "감자들 좋은데? 그런 우린 감자들 좋아! 그럼 감자들이랑 Chinita(중국 여자애) 콜?"이라고 했다. 내가 상처를 주려고 작정했던 말들이 그 말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상대방 앞에서 완전 무력화되는 순간이었다.




내 사촌동생 K는 여동생 S랑 투닥투닥하는 친밀한 사이다. 어느날 이모네 놀러갔는데 K가 여동생 S한테 "야 뚱땡아" 이러는 거다. S가 담담하게 "왜?"라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뚱땡이 n년차로써 뚱땡이라는 부름에 자연스럽게 몸이 돌아갔던 나는 K한테 "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너무 분해서 씩씩 거리기까지 했다. 나를 부른 건 아니지만 듣는 뚱땡이 기분이 나빴단 말이다. 근데 S한테 물어보니까 자기는 별로 기분이 안 나빴단다.거...S는 자기는 예쁜 돼지라 꽃돼지라고까지 덧붙이는 데 소리 지른 내가 멋쩍으면서 허탈했다.


나에게 "뚱땡아"라는 부름은 몇 일을 두고 머릿속에 맴돌만 큼 꽤 타격감이 큰 말이었다. 그래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S는 나보다 덜 뚱뚱해서 그 말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을까? 아니면 나는 예전부터 뚱뚱하다고 불린 거에 대해 PTSD가 있어서 작은 자극에도 더 크게 반응하나?'. 몇 일을 고민하다다 S한테 그게 어떻게 괜찮냐고 물어봤더니 '뚱뚱한 게 뭐 어때서. 나는 맛있는 거 많이 먹는 게 좋은데? 날씬하고 싶으면 덜 먹으면 되겠지만 지금은 먹는 게 더 좋아'라는 쏘쿨한 대답이 돌아왔다.




몇 년 뒤 멕시코에서 나는 '덜-뚱뚱이'의 포지션을 경험해 보았다. 야채 없이 고기 100%인 타코가 주식이고 전세계 콜라 소비량이 1위인 멕시코는 사람들의 사이즈도 그만큼 넉넉했다. 그래서 한국형 투엑스라지 인간이 감히 스몰과 미디엄을 입어볼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그래서 나는 Gordo(뚱땡이)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세포에 뚱뚱함이 각인되어있어 여전히 그 말이 들리면 고개를 돌리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알게 된 건, 비단 Gordo(뚱땡이) 뿐 아니라, Chaparito(난쟁이), Negro(까무잡잡이), Viejo(늙은이) 같은 모욕적으로 들릴 법한 단어들이 흔한 애칭이라는 점이다. 상처될 수 있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것이 무신경하다고 생각해 화딱지가 났았는데 어느 순간 이 사람들에게는 그 말들이 주는 사회적 낙인이 없다는 생각에 미쳤다. '너는 안경을 쓰자나, 사투리를 쓰잖아'라는 말이 모욕적이지 않듯 부여된 나쁜 꼬리표가 없다면 '너는 뚱뚱하잖아, 너는 키가 작잖아' 같은 말도 단순한 특징 묘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들이 부르는 '똥강아지'라는 애칭에 개 같은 새끼라는 의미는 1g도 담기지 않은 것처럼?)


물론 사회적으로 기정사실화되는 낙인들은 존재한다. 내가 속한 조직의 기대치와 기준에 부응하는 것도 필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바꿀 수 없는 나의 정체성들이 있다면 받아들일 모색해야하는 게 현실이지 않을까. 시발점은 내가 나를 덜 미워하는 것이다. 사회가 나에게 어떤 낙인을 찍더라도 내가 그것을 결함으로 번역하지 않는다면 괜찮다. 왜냐하면 남들이 주는 모욕은 내가 나의 특징에 덧붙인 낙인이 있을 때만 상처가 되기 떄문이다. 내가 남에게 일부러 모욕을 선사하려다 망해본 경험이 있어서 아는데, 내가 아무리 지뢰를 던져도 받는 상대방이 그걸 작동시킬 트리거가 되는 낙인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지뢰는 터지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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