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보다는 0.1이 낫다
다시 한 번 설날이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1월 1일에 했던 거창한 다짐들은 벌써 까마득하고, 두 달여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나 싶다. 실은 그 어떤 새해보다 가장 초라하기도 했다. 이미 생활 습관이 무너져버린 후라서 당연해야 하는 제 때 일어나고 제 때 밥 먹는 간단한 일조차 세기의 과제처럼 느껴졌다.
설날을 앞두고 나는 다시 한 번 또 비장해졌다. 명절 음식을 먹고 살이 찔까 직전에 다이어트를 결심했다. 3일 만에 5kg가 빠지며 뭐라도 된 것처럼 우쭐했지만 작심삼일이 지나 오히려 폭식을 하고 탈이 나서 아픈 상태로 한 해를 시작했다. 열이 오르니 아무 것도 안 하는 거에 대한 죄책감이 들 겨를이 없었다. 순간은 달콤한 면죄부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나에겐 할 일을 안 했다고 탓할 이도, 내 부담을 대신 짊어져 줄 이도 없었다. 결국 모든 나태의 폐단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어영부영 설이 지나고, 술과 쾌락으로 도피하다가 주말에 이르렀다. 다급해졌다. 이번 주가 무슨 의미라도 부여해서 나를 다시 억지로 일으킬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져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미 두 번이나 늦잠 자서 못 참여한 새벽 글쓰기 모임을 다시 시도해봤다. 일찍 자리에 누웠지만 자야겠다고 생각하니 더 잠이 오지 않아 밤을 거의 샜다. 새벽 네 시가 되고서야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잠깐 붙였다 뜨니 다섯 시 오십 분이었다. 하루 이 시간에 일어났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만 그래도 오늘은 내가 덜 미웠다. 아끼는 원두로 커피를 내려 홀짝이며 글을 쓰는 이 시간이 귀하다.
20대의 인생은 ‘그래서’의 연속이었다. 수많은 가능성 중에 원하는 것을 골라, 그래서 뭘 할 건지 선택하면 됐다. 너무 하고 싶은 게 많은데 몸은 하나라 혼란스럽다고 생각했었다. 30대로 넘어오고 나서는 점점 하고 싶은 게 없어졌다.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 그렇게 계속 고여있는 시간을 보냈다. 계륵 같은 선택지들을 버려두고 방치하다보니 그나마 가졌던 계륵들마저 점점 작아졌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20대의 내가 배부른 고민을 한 게 아니라 그냥 그만큼 세상이 덜 보여서 안일할 수 있던 게 아닐까라는. 인생을 돌아보고 또 되돌아보며 느낀 게 있다면 ‘대학만 가면, 직장만 가면 행복할 거야’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것이다. 인생엔 끊임없이 그 다음 관문들이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여기까지만 오라며 감언이설로 달래는 사람들도 없어졌다. 그 뿐인가, 생존 난이도는 점차 높아졌다. 예전엔 대부분 같은 관문을 통과해 적당히만 하고도 꼴찌는 면했다면, 뿔뿔이 제각기의 갈림길로 흩어지고 난 지금은 아차하는 순간 혼자가 되어버린다. 따라갈 내 앞의 누군가도, 속도를 늦추면 같이 걸을 수 있을지 모르는 내 뒤의 누군가도 없다.
26년 새해 첫 날부터 구정이 오기까지 머릿속으로 수많은 걸 구상하다가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그만뒀다. 내 공상 속에서 나는 컨설팅 회사도 다녔다가, 창업도 했다가, 워라밸 좋은 직장에 재취업도 했다가, 전혀 다른 이공계 분야의 석사도 했다가, MBA도 했다가, 코딩도 배웠다가, 외국어학습 커리큘럼도 세우고, 매일 외국어 스피치하는 챌린지를 시작해서 나중엔 팟캐스트로 키우고, 여행 인플루언서도 하고, 영상편집과 디자인도 배우고, 철학 공부도 하고, 오랜만에 큰 유화작품도 그리고, 충동구매했던 제품들에 대해 내돈내산 리뷰도 올리고, 모루 공예를 해서 주변에 선물도 하고, 매일 책을 읽으며 감상문도 쓰고, 그림 치료 자격증도 따고, 까먹었던 한국사도 다시 공부하고, 외국인들을 위한 한식 레시피를 공유하고, 운동을 해서 자세를 교정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나에게 맞는 화장과 옷 스타일도 찾고, 다시 도자기 공방도 다니고, 한복도 만들고, 연애도 하고, 다이빙 최고기록을 갱신하고, 악기도 다시 다루고 ai활용해서 작곡도 좀 해보고, 슬로우라이프에 대한 블로그도 운영하고, 카메라를 그만 썩히고 출사도 다니고, 재능기부 봉사활동도 했다. 어떻게 해야 각각을 가장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지 중단기부터 장기 계획을 수립하고, 어떤 자원을 얼마나 투입해야할 지 몇 일이고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막상 시작했을 땐 그 중 무엇도 삼 일 이상 연속으로 해내진 못했다.
못한 핑계를 찾다가 ‘해봤자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야’라고 둘러대기 시작했다. 그럴 수록 아무 것도 안하고 싶어졌다. 한껏 늘어지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갑갑했다. 이미 늦어버린 나이라고 느껴지는 30대는 여생의 기간을 생각했을 때는 새파랗게 어린 나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 하는 시점이다.
아직도 머릿속에서는 딴지 거는 생각들이 팽배하다. ‘어차피 엄청나게 능력있지도, 예쁘지도, 부유하지도, 착하지도 않을 건데 굳이 그 정도를 위해 그런 귀찮은 노력을 해야 돼?’라는 생각. 작년 마지막 날 내가 다음 해의 나에게 남긴 말은 그래도 0보다는 0.1이 낫다는 거다. 100을 바라보면 0이나 0.1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냐싶지만 그래도 그 0.1이 오랜 시간 모이다 보면 언젠가는 달라질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달래본다. 새해 첫 날 다짐했던 걸 두 달 동안 지켜왔다면 나는 조금이나마 달라졌을 테니까. 두 달 늦은 지금일지라도 나에게는 가장 빠른 날이니까 부디 오늘부터, 지금부터는 나를 다잡을 수 있기를.
그리고 다음 주에 글을 쓰게 될 때는 미래형이 아니라 과거형으로, 할 것들이 아니라 해낸 것들을 쓸 것이다. GPT한테 Roast me hard를 시키면 항상 계획만 잔뜩하고 결국 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지적받는데 알면서도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는 내 자신이 좀 싫다. 바꿔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