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벌거숭이의 고백

완벽한 직장은 없더라고요, 나에게 맞는 직장이 있을 뿐

by 계란지망생 흙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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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근사한 옷을 입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제 옷만 봐도 “와 저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라고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옷이요.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은 제 로망이었습니다. 일단 좀 세 보이잖아요.


세계 평화를 지키거나, 국가를 위해 기여하는, 그런 ‘근사한’ 일을 꿈꾸는 저에게 사람들은 “넌 할 수 있어, 잘 어울려”라고 말해줬고, 저도 그 말을 꽤 진지하게 믿었죠. 대단해 보이는 직장들을 저울질했어요. 국제기구를 갈까, 외교관이 될까, 아니지 대통령 정도는 돼야 하나? 꿈의 나래를 한껏 펼쳤지만, 솔직히 그런 거창한 꿈에 걸맞는 노력을 할 자신은 없었어요. 그러다 공기업이라는 데를 발견했어요. 오호라, 국가 경제를 진흥하는 곳이래요. 얼추 근사하잖아요? 썩 괜찮은 껍데기라고 느껴졌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장점은…조금 많이 뽑더라고요.


막상 취업하려니까 쉬워 보여서 선택한 길인데도 제법 치열했어요. 취업 과정은 마치 군인이 되기 위해 빡센 사관학교에 진학한 것만 같았죠. 새벽부터 일어나 구령을 외치며 운동장을 도는 사관생도처럼 아침 댓바람부터 뉴스를 들으며 섀도잉을 하고, 인강 커리큘럼을 몇 바퀴씩 돌렸습니다. 사명감에 불타는 사관생도에 빙의해 공기업의 핵심가치와 설립목표를 툭 치면 나올 정도로 달달 외우고 체화했어요. 또 체력을 단련하고, 총알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경제시사 상식을 채워넣고, 자격증을 취득하고, 면접 연습도 했죠. 언젠가 갑옷을 입고 명사수처럼 활약할 미래를 상상하면서요.


드디어 갑옷을 입을 자격이 있는지 검증할 날이 왔어요. 갑옷이 아무리 무거워도 거뜬히 짊어질 수 있는 체력과, 갑옷을 입었을 때 돋보일 저의 태평양 같은 어깨를 적극 어필했어요. 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일주일 정도 참 행복했던 것 같네요.


감사하게 저에게 갑옷이 주어졌지만 그 옷은 제가 생각한 거랑 달랐어요. 밖이 단단한 만큼 안에도 너무 딱딱하고 불편했어요. 불편해서 몸을 움찔거릴 때마다 여기저기 멍이 들었어요. 저는 춤 추는 걸 좋아하는 데 갑옷을 입고는 춤을 출 수 없었어요. 최대한 옴짝달싹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는 게 미덕이었죠. 그 뻣뻣한 옷을 입고 늘상 같은 자세로 있자니 돌이 되어 굳어버릴 것만 같았어요. 발에는 물집도 잡혔다구요.


멋있어보였던 갑옷은 날이 갈 수록 칙칙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덜 칙칙하게 꾸미고 싶었죠. 갑옷 위에 리본을 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혼이 났어요. 제 생각엔 리본을 단 갑옷이 훨씬 예뻤지만 참아야 했어요. 신발도 다 똑같은 걸 신어야 했어요. 저는 평발이라 아치가 있는 신발이 필요했는데, 그런 걸 보급해주지는 않았어요. 너무 아파서 제 신발을 신고 싶다고 했더니 그건 안 된대요. 대신 아주 선심 쓰듯이 보급 받은 신발 안에 티 안 나게 지압볼을 넣으래요. 그래서 임시 방편인 지압볼보다는 신발을 바꾸는 게 훨씬 경제적이라고 했다고 또 혼났어요.


어깨도 뭉쳤어요. 곧은 자세가 장점이었던 저는 갑옷의 무게에 짓눌려 라운드숄더가 생겼어요. 갑옷 안에서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건 점점 더 힘들어졌어요. 부대에 증상을 호소했더니, 라운드숄더여도 어차피 갑옷을 입으면 직각어깨로 보여서 상관 없대요. 잠깐만 누워있으면 나아질 것 같다고, 금방 스트레칭만 하고 일어나겠다고 했지만 이 정도는 당연한 거니까 버티라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어깨가 너무 아파서 임무를 수행할 때 지장이 있을 것 같다고 했더니 어차피 출동하려면 멀었으니까 지금 당장은 꼿꼿하게 서 있는 게 더 중요하대요. 그리고 서있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저한테 작전 나갈 기회를 줄 생각도 없대요.


갑옷이 싫어져서 죽상을 하고 있으니 상사가 벗고 싶으면 벗으래요. 대신 잠깐 벗었다 다시 입을 수는 없고 영원히 나가야 한대요. 저 말고도 갑옷을 입고 싶은 사람은 많다고요. “갑옷을 입고 싶다며 기꺼이 무게를 견디겠다는 말은 거짓이었나”라는 말도 들었어요. 그 말을 듣고는 제 자신이 기본도 못하는 형편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조금씩 적응을 했어요. 쓰라렸던 물집들이 굳은 살로 변해가며 통증은 무뎌졌습니다.


어느 날 드디어 임무를 받았어요. 갑옷을 입은 저는 당장이라도 작전을 진두지휘할 싶은 포부에 부풀어있는데 제가 받은 임무는 전혀 근사하지 않았습니다. 보도블럭을 깔며, 이게 어떻게 나라를 지키는 건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벽돌을 옮기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총 쏘는 연습을 한 걸까 싶었어요. 그래서 기다렸어요. ‘언젠가는 군인 답게 총을 쓰겠지, 내가 준비한 총알은 헛되지 않을거야’라고 되뇌었어요.


총을 처음 쏜 날, 생각보다 기쁘지 않았습니다. ‘나쁘다’고 지칭된 사람에게 총구를 겨눴는데요, 쏴죽여야하는 ‘나쁜 사람’의 기준은 상사의 입맛대로 바뀌기 일쑤였어요. 안 나빠 보이는 사람을 쏘아 죽이고도 희대의 간첩을 잡았다며 거들먹거리는 동료도 있었어요. 그런 동료와 같은 집단에 있다는 게 수치스러워서 막 울었어요.


존경할 만한 상사 한 분이 저를 다독여주셨어요. 지금 그런 과정도 있지만 조금만 멀리 보면 분명 나라를 지키고 있는 건 맞다고요. 그 분은 저보다도 훨씬 사명감 넘치고, 군인으로서의 역량이 뛰어나신 분이었거든요. 하지만 저보다 십 몇 년 더 이 조직에 계셨던 그 분이 하는 일도 저와 크게 달라보이진 않았어요. ‘이럴거면 그냥 다른 옷을 입었어야했던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다시 다른 옷을 찾을 자신은 없었어요. 이 갑옷을 얻기까지도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렇게 불평을 하면서도 용기를 못내고 오 년이 흘러갔습니다.


어느 날 문득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어요. 나는 갑옷을 지탱하는 게 힘든데, 무엇을 위해 견디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사실 이미 굳은 살이 된 상처들은 더 이상 물집이 생길 때 만큼 아프진 않았어요. 하지만 더 짜증이 났어요. 물집은 아프긴 해도 언젠가 없어지는 건데, 굳은 살은 저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요.


갑옷을 벗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변을 둘러봤어요. 저의 동료들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자기 갑옷에 만족하고 있었어요. 갑옷의 무게를 별로 힘들어하지 않고 튼튼한 갑옷 덕에 안 다치는 게 좋다는 동료도 있었고요, 갑옷을 입기 전에 얼마나 추웠는지 얘기해주는 동료도 있었어요. 저보다 더 갑옷의 무게를 힘들어하면서도 좁은 어깨를 가릴 수 있어 행복해하는 동료, 이 갑옷 덕분에 내 가족을 지킬 수 있다는 동료, 갑옷이 세보여서 자기한테 관심을 가지는 공주님이 생겼다며 자랑하는 동료도 있었어요. 그리고 어찌됐든 우리는 국가를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동료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찾지 못했어요, ‘제가’ 갑옷을 더 입고 있을 이유를요.


결국 갑옷을 벗었습니다. 퇴사를 했어요. 주변에서 물었어요, “더 잘 맞는 옷을 찾은 거야?” 아니었습니다. 이직을 정해 놓고 나온 게 아니었거든요. 갑옷이 아닌 리본 달린 옷을 입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긴 했지만, 막상 여태 군인으로 산 저에게 발레리나 옷이 어울릴지는 모르겠더라고요.


“어떤 옷을 입고 싶은 지는 못 정했는데 갑옷이 너무 무거워서 일단 벗으려고요. 좀 쉬다 새 옷 쇼핑하러 갈게요”라고 답한 저에게 사람들은 대책이 없다고했어요. 이직할 데를 정해놓고 퇴사를 해야한대요. 쇼핑을 하려면 그래도 입고 있는 옷이 있어야한대요. 제 귀에는 그 말들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하루 빨리 이 무게를 벗는 것만이 중요했거든요.


반십년 간 피부처럼 입었던 갑옷을 벗고 보니, 갑옷 속에서 부딪히며 곳곳에 멍이 들었더군요. 멍 하나에 역류성 식도염, 멍 하나에 스트레스성 위염, 멍 하나에 높은 간 수치, 거북목, 염세주의.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렀다던 윤동주 시인의 후손 답지 못하게 저는 멍 하나마다 욕지거리를 찌끄렸습니다.


그동안 입었던 옷이 너무 무거워서 당장은 그 어떤 옷도 걸치고 싶지 않았어요. 아무리 부드럽고 예쁜 리본 옷이라 해도요. 옷을 훌훌 벗어 던졌어요. 자유로운 백수가 되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아르헨티나, 말레이시아, 베트남, 중국, 일본, 카자흐스탄, 체코, 헝가리, 슬로베니아, 그리스, 터키, 이집트를 여행했습니다. 생각보다 모든 장소에서 옷을 입어야 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여행 중인 저에게 직업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나체로 온천에서 자유를 만끽했어요. 뭉쳤던 어깨가 사르르 풀리는 게 얼마나 행복했던 지요. 여행만 하면 직업이 없어도 영원히 행복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모든 온천이 옷을 안 입어도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수영복을 입으라는 곳도 있었고, 머리카락이 안 빠지게 모자를 써야된다는 곳도 있었어요. 프로-온천러들은 가운도 가지고 다녔어요. 갑옷을 판 돈으로 수영복과 모자, 가운 따위를 사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어서 냉큼 구매했죠. 한참 온천놀이에 푹 빠져 지내다보니 돈을 거의 다 써버렸더라고요. 어쩌면 다음 직장을 준비하는데 써야 했던 시간과 에너지, 체력은 그렇게 고갈되었습니다.


이제 잔액을 더 탕진하면 다른 옷을 못 살 것 같아서 안 떨어지는 발걸음을 떼서 온천 밖으로 나왔어요. 여행을 접고 한국에 와서 자소서를 쓰려니 참 암울하더군요. 자꾸 미련이 남았어요. 영원히 온천에 머무는 삶은 없는걸까 기웃거렸지요. 여행 인플루언서들이 보였어요. 매일 온천에 있으면서, 돈을 쓰긴 커녕 온천에 있는걸로 돈을 받는 부러운 사람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은 온천에서 저처럼 쉬고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제가 뜨끈한 온천물을 편안하게 즐기면서 구운 계란과 라면을 포식하고 있을 때, 그들은 풀메이크업을 하고 불편한 자세를 잡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온천을 하고서 노곤노곤한 제가 낮잠을 잘 때 그들은 치열하게 편집을 하고 다음 컨텐츠를 기획했고요, 심지어는 완벽한 비키니 핏 유지를 위해 온천하고 나서 마시는 기막히는 맥주를 참더라니까요. 저는 컨텐츠를 뽑겠답시고 여행을 떠나서는 그들만큼의 노력은 없이 그냥 또 잔뜩 즐기고, 그나마 남았던 잔액을 좀 더 탕진했습니다. 그렇게 아주 잠깐 여행 크리에이터의 백일몽을 꾸다가 정신을 차리고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뿔사, 겨울이 왔어요. 갑옷을 입고 다섯 번의 겨울을 보낼 때는 몰랐는데 옷이 없는 사람에게 겨울은 많이 추웠어요. 쇼핑에 나섰어요. 당장 가진 옷이 수영복 밖에 없어서 일단 그걸 입고 나왔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조금 부끄러웠지만 그 때까진 괜찮았어요, 저는 금방 옷을 살 거였으니까.


갑옷을 입을 적에 항상 니트가 입고 싶었거든요. 몸을 조이지도 않고 참 편안해보였어요. 색도 얼마나 고운지요. 포근포근한 게 무겁지도 않을 것 같고, 어깨선을 타고 내려오는 핏도 여리여리 예뻐보였어요. 아, 갑옷이랑 다르게 리본 달린 니트도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죠.


점원에게 말했어요, “아주 아주 튼튼하지만 가볍고 따뜻한 니트를 사고 싶어요.” 제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어요. 저는 명품 욕심이 없는 소박한 사람이니까 브랜드는 중요하지 않고 소재만 좋은 옷이면 만족할 수 있었거든요. 갑옷을 판 돈이면 충분히 원하는 옷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점원이 권해주는 옷들은 죄다 단단하지가 않았어요. 금방 헤질 것 같고 외부 충격에서 저를 지켜줄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더 비싸도 괜찮으니 ‘갑옷만큼 단단한 니트’를 찾아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점원이 그런 옷은 이 세상에 없대요. 실망스러워서 집으로 돌아갔어요.


줄곧 쇼핑을 다녔지만 어디에서도 제가 원하는 ‘완벽한 니트’, 그러니까 워라밸은 좋지만 급여는 많이 주고 보람도 있는 업무를 하는 일자리,를 찾을 수는 없었어요. 성에는 안 차지만 조금 덜 튼튼한 건 감수하고 편안한 니트를 사기로 했어요. 어쨌든 외출할 때 수영복보다는 어울리고 따뜻할 테니까요. 보들보들한 소재의 옷을 골라서 계산대에 올렸는데 찍히는 가격에 생각보다 너무 많은 0들이 있어서 당황했어요.


저번에는 완벽한 옷을 살 생각이었으니까 조금은 비싸겠지 싶었지만 이번엔 많은 걸 양보했으니까 갑옷보다 훨씬 싸야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게 캐시미어, 뭐 그런거라고 당연히 비싸다는 거에요. 제 통장 잔고를 훨씬 뛰어넘는 금액이었어요. “이게 그렇게 비싸요?”라고 물었더니 직원은 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더니 “수영복보다는 당연히 비싸죠”라고 매몰차게 말하고는 밍크 코트를 걸치고 들어오는 다른 손님 쪽으로 쪼르르 가버렸어요.


주변을 둘러보니 수영복을 입고 쇼핑하고 있는 사람은 저뿐이었어요. 손님들 중에는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직원이 그 사람에게는 아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었어요. 니트가 갑옷만큼 튼튼하지는 않더라도 얼마나 좋은 옷인지에 대해서요. 제가 보고 있는 옷을 다른 손님이 맘에 들어하자 직원이 “안 사실거죠?”라는 말과 함께 야멸차게 옷을 뺐어갔어요. 갑옷을 입었을 때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대우라 ‘저도 원래는 갑옷 입어요’라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와 흠칫했어요. 갑옷을 입었을 때도 한 번도 자랑스러웠던 적 없었던 제가, 지금 갑옷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나 왕년에는 갑옷 좀 입었다’고 어필하고 싶어하는 게 소스라치게 싫었어요. 제가 가장 혐오하던 부류였거든요.


그래서 거울을 보며 되뇌었어요. “그래, 나는 수영복을 입었지. 수영복보다는 니트가 따뜻하잖아. 그러니까 조금 맘에 들지 않더라도 나는 지금 니트가 필요해”. 저를 반기지 않는 직원을 다시 찾아가 제품을 찾아달라고 했어요. 예산이 부족하다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할인 코너를 보겠다고 말했어요. 엄청 용기 낸 말이었는데, 직원은 무심하게 할인 코너를 가리켰어요.


튼튼함에 이어 디자인과 유행까지 포기할 생각을 했는데 할인 코너의 세상은 더 냉랭했어요. 캐시미어로 된 보들보들하고 따뜻한 니트는 없고, 세탁도 하기 전에 보풀이 난 것처럼 보이는 싸구려 아크릴 실들로 만들어진 것들만 잔뜩 있었어요. 얇은 것들은 눈만 흘겨도 찢어질 거 같아서 안 따뜻할 게 뻔했고, 그나마 따뜻해보이는 니트들은 너무 두껍고 무거워서 거의 갑옷처럼 어깨를 짓눌렀어요. 저는 이미 사회적 위치도, 고용안정성도, 커리어 성장가능성도, 급여 수준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워라밸 하나를 바랬는데, 그것조차 쉽지 않았어요. 이런 퀄리티 주제에 갑옷이랑 가격이 비슷하다는 게 어처구니 없었어요. 분명 급여가 1/3토막인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재택근무도 없이 째깍째깍 출근을 해야 했고, 휴가도 맘대로 쓸 수 없는 데다, 야근에 주말근무도 있고, 상사의 비위도 맞춰야 했어요. 오히려 사무실은 더 닭장 같고, 복지혜택도 하나도 없는 데다, 상사보다 먼저 퇴근하면 안 된다는 구닥다리 직장 문화가 있질 않나, 시스템이 갖춰져있지 않아서 이것저것 잡무가 더 많은 경우도 있던 걸요.


이럴 거면 갑옷만도 못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싸구려 니트들은 갑옷보다 예쁘지도 편안하지도 않으면서 튼튼하지도 않았거든요. 적어도 갑옷은 튼튼한 건 아주 확실했으니까요. 마음을 비우고 다시 매장을 한 바퀴 돌았지만 도저히 맘에 드는 게 없었어요. 몇 바퀴를 더 뱅뱅 돌다가 결국 빈손으로 매장을 나왔어요. 뭘 더 얼만큼 포기해야 되는 걸까 싶었어요.


매장을 나서는데 옆 매장에서 너무 좋은 향기가 났어요. 인테리어도 제 맘에 쏙 들어서 아이쇼핑이나 해보자하고 들어갔는데 글쎄 제 맘에 딱 맞는 옷을 만나버렸지 뭐에요. 하늘하늘한 쉬폰 소재에 오묘한 파스텔 핑크 톤, 여리여리해보이는 시스루 재질. 은사가 살짝 섞여 빛에 따라 은근하게 반짝거렸고, 목에는 왕리본이 달려있었어요. 퍼프 소매에 진주 버튼, 다리가 길어 보이는 크롭한 기장까지 딱 맘에 들었어요. 가격을 물어보니 남은 돈을 거의 다 쓰면 살 수 있는 정도였어요. 같이 쇼핑 간 친구가 말렸어요. “그걸 입고 어딜 갈 건데, 일상복을 먼저 사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이미 저는 이미 마음을 뺏긴 뒤였어요. 추구미 찰떡인 옷, 어떻게 참아. 그렇게 충동구매를 했어요. 다이빙, 사진모델, 전시회보기, 뮤지컬관람, 맛집탐방 같은 꼭 필요한 건 아닌데 값비싼 취미들을요.


옷장에 그 옷을 걸어 놓고 흡족해서는 자꾸 꺼내 입어보고 거울 앞을 뱅글뱅글 돌았어요. 갑옷을 벗으니까 이런 예쁜 옷도 입을 수 있는 게 너무 좋았어요. 돈이 얼마 안 남았지만, 겨울이 오기 전까지 얼른 돈을 모아서 어울리는 바지와 코트를 장만해야지 싶었어요.


그런데 겨울이 생각보다 빨리 왔어요. 정말, 너무 춥더라고요. 블라우스만 입고 나갈 수는 없어서 어울리는 하의를 찾아봤는데 제 맘에 드는 것들은 다 예산 밖이었어요. 당근 어플을 켜서 뒤지다가 썩 예쁜 바지 하나를 봤어요. 무늬가 독특한 벨벳 소재의 로우라이즈 바지였어요. 크롭 기장인 제 쉬폰 블라우스와 조합해서 입고 나갈 순 없었지만 바지 자체만 보면 너무 예뻤어요. 절대 그 가격이 아닌데 파격 할인을 하고 있는 바지를, 안 살 수가 없잖아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 지갑은 또 열렸습니다. 그렇게 저는 직업훈련교육들 대신 요리수업을, 비싼 소모임 회비를, 보컬트레이닝을, 유화 과외를 덜컥 결제했어요.


주변 사람들은 말했어요. “차라리 저렴한 롱패딩이라도 사지. 긴 패딩 사면 안에 뭘 입어도 티 안 나잖아.” 저는 발끈했어요. 겨우 바바리맨이 되려고 갑옷을 벗은 게 아니었거든요. 아무리 밖을 패딩으로 감춰도 안의 옷이 허접하면 더 별 볼일 없지 않냐는 마음은 진심이었어요. 그래서 예쁜 블라우스를 산 제 선택을 후회하진 않아요.


하지만 그 블라우스는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옷이었어요. 하늘하늘한 느낌이 좋아서 산 거였지만 쉬폰 소재는 툭하면 잘 구겨지고 먼지도 잔뜩 붙었어요. 지옥철에 낑겨서 나갔다 온 날에는 올이 잔뜩 나가 있었고요. 시스루 소재라 안의 속옷도 신경 써서 입어야했고, 속이 비치다보니까 추워도 안에 목폴라를 껴입을 수도 없었어요. 퍼프 소매는 아무 겉옷에나 들어가지도 않았고, 왕리본과 은사는 눈에 확 띄는 대신 몇 번 안 입어도 맨날 같은 옷을 입는 사람처럼 같아보여서 점점 손이 가지 않았어요. 옷이 화려하니까 맨손톱이나 생얼과는 어울리지도 않았고, 기계세탁도 안 돼서 드라이클리닝 비용도 자꾸 들었어요. 결국 옷장 속에 쳐박아 두게 되었습니다.


날씨는 야속하게 점점 추워졌어요. 구인공고가 씨가 마르더라고요. 이제는 싸구려 아우터라도 사야겠다 싶어 다시 매장을 찾았는데, 허접한 패딩조차 제 예산을 넘는 거에요. 그래서 한 번 입으면 보풀 날 것 같은 싸구려 니트 코너로 발걸음을 돌렸어요. 오래 입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번 겨울만 버티고 다음 계절에는 좀 더 근사한 옷을 사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 사이에 가격이 올랐더라고요. 저는 결국 싸구려 니트도 사지 못했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너무 추워서 시장 좌판에서 싸구려 목도리 하나를 집어 들었어요. 이전의 저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단가의 알바를요.


그 즈음 모임에 초대받았어요. 제가 늘 동경했던 화려한 파티는 아니었고, 그냥 뭐 친구들 모임이었어요. 드레스 코드는 딱히 없었고요. 그런데도 입고 나갈 옷이 없었어요. 크롭 쉬폰 블라우스에 로우라이즈 벨벳 바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한겨울에 허리를 휑하게 내놓고 나갔어요. 신발도 온천에서 샀던 쪼리 밖에 없더군요. 추워서 맨 싸구려 목도리가 그나마 TPO에 맞는 유일한 옷가지였어요.


지하철에서 흘깃거리는 눈초리가 느껴졌어요. 싸구려 코트를 입은 사람이 저에게 “옷 살 돈이 없는거냐”고 물어봤어요. 제가 입은 쉬폰 블라우스가 그 사람의 니트와 청바지, 패딩, 부츠를 모두 합친 것보다 비싼데도요. 옷장에 옷이 쌓여있는 연예인이 요상한 조합으로 옷을 입으면 ‘패션’이라고 부르는 세상은, 옷이 없는 제가 이렇게 밖에 입을 수 없는 건 ‘거지 같다’고 매도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벌거숭입니다. 햇빛이 쨍쨍한 날에는 피부가 따갑고, 찬 바람이 부는 날에도 살이 터져서 밖에 나가기 겁이 나요. 옷장에는 고급 수영복과 수영 모자, 가운, 욕망의 크롭 블라우스와 로우라이즈 바지, 그리고 싸구려 목도리만 있네요. 당근마켓에 내놓으려니 제 값의 반도 못 받아서 속이 쓰려요.


지금도 온천에 가면 저는 기죽지 않고 풀착장을 할 수 있어서 너무 도망치고 싶어요. 거기는 겉옷이 있든 없든 티가 잘 안나니까요. 하지만 온천 입장료로 돈을 더 써버리면 저는 다음 겨울에도 옷 살 돈이 없을 거 같아요. 그래서 참는 중입니다.


남은 돈을 털어서 실을 샀어요. 캐시미어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싸구려는 아닌 실이에요. 더디더라도 저한테 어울리는 털실 옷을 직접 떠보려고요. 처음이라 서투르지만 그래도 한 코 한 코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아 옷을 입고 다시 돈을 벌러 나갈 거에요, 제가 더 원하는 옷을 살 수 있도록요. 이번에는 머릿 속 이상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옷 중에 저에게 가장 어울리는 옷을 찾아보려고요.


아직도 자꾸 ‘메인 옷’ 대신 악세사리에 눈이 돌아가서 스스로를 꾸짖습니다. 이를테면, 이 직장에 가면 대학원을 병행할 수 있을 것 같고, 저 직장에 가면 부업으로 책을 써볼 수 있을 것 같고, 그 직장에 가면 결혼하기 좋은 직장이 아닐까 하는. 하지만 이젠 알아요. 그건 또 수영복 밖에 안 입은 채로 귀마개 쇼핑을 하는 거라는 걸.


옷을 안 입기엔 겨울이 많이 춥네요. 취업 시장은 언제나 쌀쌀했겠지만 이번 겨울은 유독 살을 에는 것 같아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취준생 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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