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완수하기 위해서
처음 미술학원에 간 날이었다. 선생님은 작은 종이 한 장과 연필, 수채화 도구를 주시며 그리고 싶은 것을 마음껏 그려보라고 하셨다. 나는 그리고 싶은 것이 많아 더 큰 종이가 없냐고 물었다. 아직 내 실력을 모르니 작은 종이부터 시작해 점차 큰 종이로 바꿔가자는 말에 짜증이 났다. 그래서 내가 그리고 싶은 것들을 모두 담기 위해 종이에 빼곡하게 밑그림을 그렸다.
선생님은 이번에는 그렇게 작게 그리면 색칠하기 어렵지 않겠냐며 크게 크게 그리라고 하셨다. 나는 시간 제한만 없으면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선생님은 시간은 마음대로 써도 되지만 그림은 반드시 완성해야 한다며, 수채화는 칠해지지 않은 면이 있으면 미완성이기 때문에 하얀 부분 없이 색을 채우라고 하셨다.
내가 밑그림을 그리는 동안, 함께 갔던 친구들은 이미 그림을 완성했지만 나는 불안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그들의 그림이 허접했고, 그럴 바엔 나는 더 나은 그림을 그리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색을 시작하면서 밑그림을 벗어나 색이 튀어나오는 부분이 생겼고, 다른 색으로 덮으려 할수록 거무튀튀하고 이상한 색이 되어버렸다. 3분의 1 정도 색을 입혔을 때, 이미 내 마음속에서 이 그림은 돌이킬 수 없는 실패였다. 이미 망한 것이 확실한 그림에 더 시간을 쏟고 싶지 않았다.
새 종이를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하자 나는 그림을 구겨 쓰레기통에 쳐넣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쓰레기통에서 내 그림을 꺼내 다시 펴시고는, 그림을 완성하기로 한 것은 약속이니 지켜야 한다고 하셨다. 그림을 못 그리는 것은 상관없지만 완성하지 않는 것은 안 된다며, 채색을 다 할 때까지 집에 못 가게 하셨다. 쓰레기통에 이미 들어간 더러운 종이를 다시 펴서 만지는 것도 너무 불쾌했고, 이미 실패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 복구하려 애쓰는 과정은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선생님이 너무 단호하셔서 나는 끅끅 울면서 끝내 그림을 완성했다.
그림을 다 완성하자 선생님은 다음부터는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만 밑그림을 그리라고 하셨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처음부터 큰 종이에 그렸으면 이런 문제는 없었을 것이라 꿍시렁거렸다. 그리고 인생 최악의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끝까지 완수했던, 가장 소중한 경험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