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시기

by 위단비

오늘은 네가 가르쳐 준 걸 다시 한번 아로새겼어. 인생에 무거운 일은 없다는 것. 내일의 일은 알 수 없다는 나의 좌우명과 내 모든 활동은 나를 위한 것이라는 너의 좌우명. 내 목에 걸려있는 좌우명들은 결국 인생의 무게를 덜어주는 말들 아니겠니. 무거워진 목걸이의 무게만큼 내 인생의 무게는 덜어졌단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로. 내게는 다시 이상한 시기가 도래했어. 2년 전의 그때처럼. 그때 나는 연인으로서의 너를 잃었고 친구로서의 너를 얻었지. 그리고 많은 걸 잃었어. 또 많은 걸 얻었고. 지금의 나 또한 많은 걸 잃고 또 많은 걸 얻게 되겠지. 그러나 그 어쩔 수 없는 밀물과 썰물에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한동안은 네 생각이 나지 않았어. 아니, 흐릿했어. 지금은 다시 네가 선명하게 다가와. 너의 조언이 절실해. 어차피 나는 남의 말을 들어 처먹지 않는 인간이지만, 그래도 네가 하는 말들이 그리워. 요즘의 나는 많은 실패를 겪고 있고 큰 두려움을 안고 살고 있거든. 그러다 문득 오늘,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거야.


맞아, 네가 떠난 후 깨달은 사실. 인생이 더는 무겁지 않다는 것. 다만 그만큼 내 존재도, 너도 무거워졌다는 것. 그 사실이 얼마나 기뻤던지. 이제 와 그 사실을 다시 아로새기는 것은, 내 존재의 무게를 다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상한 시기가 도래한 거야.




부끄럽다. 내 이야기를 쓰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그만큼 지금의 나는 떳떳하지 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겠다. 이상한 시기란 가령 이런 것이다. 하수구로 빨려 내려가는 지저분한 머리칼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 또는 물살에 떠밀려 내려가는 꽃잎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지저분하면서 동시에 어여쁜 것. 이러나저러나 떠밀려 내려가는 삶은 부끄럽다.


조증이 다시 도진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2년 전이 그랬듯이. 2년 전에서 1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의 내게 조증의 기운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의 내게서 1년이 지나면 지금을 어떻게 기억할까. 조증으로 기억되는 기간이 아니었으면 한다.


나의 조증은 잠을 못 자지도, 기분이 그렇게 좋지도 않다. 활동량이 조금 늘어나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정도다. 아니,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것보다는 좀 심하다. 인파에 휩쓸린 채 파도타기를 하는 기분이랄까. 하수구든, 물살이든, 파도든 간에 하여간 떠밀려버리는 것이다.


너의 조증은 분명했다. 네가 신이라는 망상. 자기도 어이없다는 듯이 내게 고백하던 그때가 떠오른다. 그날은 네 군 시절 마지막 외박이었지. 너는 나보다 먼저 앓았다. 먼저 앓았고 채 다 낫지 않은 채 떠났다. 내게 처음으로 병원을 가 보라던 건 너였지. 여러모로 나의 은인인 너.


너를 떠올리면 떳떳함이 떠오른다. 너 또한 부끄러움이 있었겠지만, 내가 보는 너는 부끄럽지 않게 살다 떠났다. 그래서 아마도, 내가 죽게 되면 널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렇게나 부끄러움이 많고 또 기만적인 사람인데 너는 마지막까지 떳떳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서. 우리가 다른 별로 갈 것 같아서.


그러나 오늘은 또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 무엇보다 살아있는 지금을 더 소중히 여기라고 너는 내게 말하겠지, 하고. 한없이 가벼운 존재의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달아야지, 하고 너는 내게 따뜻하게 말하겠지. 죽고 나서 일을 지금 생각하면 뭐 하냐며, 그때가 돼서 만나질 인연은 만나 지지 않겠냐며.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를 살린 너, 내가 살린 너. 나는 너를 살리지 못했건만 너는 여전히 나를 살리고 있다. 네가 나를 살린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많이도 했지만, 앞으로도 나는 계속 말할 거다. 너는 나를 살리고 있다고, 나를 살리는 유일한 존재라고.




어느 날에는 처음 본 남자와 섹스를 했어요. 나는 그 길로 따뜻한 네 품으로 돌아가야 했으나, 내가 돌아간 곳은 덜 익숙하고 차가운 그에게로 였어요. 이제 와서 미안한 건 처음 본 남자와 잔 것이 아니라 그날 너에게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에요. 너는 그게 참 서운했을 것 같아요. 내가 다른 남자랑 자는 건 네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내가 돌아갈 곳이 네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네게 상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너는 나를 집이라고 했어요. 그 사실에 나는 무척이나 서운했지만, 사실 내 집도 너였다는 것을. 얼마 전에는 집을 잃은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어요. 그리고 내 앞의 사람에게 집을 잃은 기분을 아냐며, 얼마나 사는 게 힘든지 아냐며 애처럼 떼를 썼죠. 떼를 써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건만 나는 이렇게 가끔 떼를 써요. 왜냐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이상한 시기였어요. 나는 여러 사람을 만났고 너는 그런 나를 질책하거나 말리지 않았어요. 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유일한 사람. 이상한 시기였어요. 너는 이상한 사람이었고 나도 이상한 사람이었죠. 우리가 그저 이상한 사람이기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상한 시기는 이상함을 넘어서서 괴팍스럽고 기괴하게 뒤틀려갔어요. 결국 나는 네게 이렇게 말했어요. 너는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그 순간을 후회하진 않아요. 우리는 원래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이겠죠. 그렇지만 꼭 그렇게 말해야만 했을까. 차라리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분명히 그게 더 나았을 것 같은데.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그 이후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도 남겨 두었다는 것이에요. 그래도 다행이지요. 기괴함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어도 우린 이상한 사람들이니까 여전히 서로를 사랑했어요.


이상한 시기가 다시 도래한 것 같아요. 그렇지만 나는 왠지 기괴함으로 더는 가지 않을 거라는 걸 믿게 되어요. 왜냐면 네가 내게 스며들었거든요. 내게 스며든 너는 내 발목으로 내려앉아 모래주머니가 되어 주었어요. 기괴를 향해 붕 뜨지 않게. 그저 조금 이상한 걸음걸이에서 멈출 수 있게. 물론 두려워요. 그렇지만 나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모래주머니가 나를 영영 떠밀리지는 않게 해 줄 거니까요.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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