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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단비 Jan 02. 2023

자의식

발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소복이 쌓인 눈은 여전히 녹지 않았고 아마도 첫 발자국은 작은 소리를 내며 찍혔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발자국 뿐만은 아니겠지. 눈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럽게 눈의 결정들을 밟아 죽였을 것이다.

죽여 버린 것이 어째서 시작일 수 있을까. 결국 선택한 길이 그 길인걸. 나는 세포의 결정들을 바라본다. 피처럼 검게 그을린 눈의 흔적을 바라본다. 귀를 바닥에 대고 들어보면 선명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녹아가는 눈의 비명과 죽어가는 결정의 몸부림 소리를.

건너편의 안경점엔 작은 트리가 있다. 정신없이 반짝이는 전구를 칭칭 감은 트리. 어쩌면 이제 그만 하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을 지도 몰라. 들리지 않는 소리는 지천에 널려 있다.

처음으로 그 애를 밀어버린 날, 그 애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비명도, 항의도 없었다. 오직 들리지 않는 눈빛만 있었을 뿐이다. 아무 잘못이 없는 아이. 나는 결백한 그 애를 밀어버렸다. 엉덩방아를 찧은 그 아이는 얼마 뒤 전학을 갔다.

나의 죄책감의 시작. 나는 그 뒤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죽였던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듣지 못하고 듣지 않았던가. 가식적이게도 따뜻한 음악은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어쩌면 나는 그 죄책감과 비명들 앞에서 무력하게 모든 걸 포기한 채 노래만 중얼거리고 있는 걸지도 몰라.

무력감의 시작은 솜사탕과 같은 것이다. 첫 도전이며 첫 실패이고 처음으로 느끼는 부질없음이다. 솜사탕을 처음으로 혼자 사러 가던 날 나는 다짐했다.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다짐을 발바닥 끝에서부터 끌어올렸다. 걸음은 당연하게도 힘찼고 두려움을 넘어선 설렘이 있었다. 그러나 솜사탕장수는 그날 나오지 않았다.

열병. 열병처럼 앓는 것이 아닌 진짜 열병. 내 인생의 첫 번째 잘못 꿰어진 단추였다. 나는 분노하기보단 침잠하길 선택했다. 그날부터 눈의 비명소리가 음악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죽어버린 것은 솜사탕이 아니었다. 눈에 찍힌 검은 발자국처럼 내 마음에도 검은 것이 찍혔다.

아마도 기억나지 않는 시점에도 검은 것은 찍혔을 것이다. 검은 것들은 자꾸만 나를 죽였다. 남아 있는 것은 미약한 심장소리 뿐이다. 그마저도 가끔은 잊는다. 내가 인간이라는 걸 잊어버리는 거지. 이러다 내가 전부 죽어버리면 내 주변, 내가 사랑하는 것들까지 죽여 버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죄책감, 무력감, 침잠. 수치심과 불안감. 어두운 것들은 전부 자석처럼 내게 붙었고, 나는 까맣게 물들어갔다. 철가루가 무겁게 붙은 나는 한걸음도 뗄 수 없었다. 시작할 수 없었다. 무심하지 못한 나는 첫 발을 떼기가 무서웠다.

이미 어지럽혀진 눈 위의 발자국들을 본다. 처참한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만 죽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발을 꾹 누른다. 펑, 하고 심장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제야 죽어버릴 수 있었다.

죽어버린 이후의 내 삶은, 무척이나 가볍다. 적당히 무심하고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경쾌하다. 사실은 그게 시작이었다. 내가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새하얗게 쌓인 눈의 죽음은 새로운 길의 탄생이다.

자성을 잃은 나는 철가루를 전부 털어냈다. 흔적처럼 미약한 가루들은 남아 있으나, 나는 더 이상 까맣지 않았다. 삶과 죽음은 언제나 함께 있는걸. 시작과 끝은 다른 말이 아닌걸. 죽음이 가벼운 만큼 삶 또한 내겐 가벼운 일이 되었다. 나는 세상의 작은 편린일 뿐인걸. 무거울 필요도, 어두울 필요도, 절망할 필요도 없다.

과장된 자의식은 그날로 멸망했다. 그러나 남아있는 흔적들은 여전히 화면 위에 철가루처럼 붙어 있고 철가루들은 서로 모이고 흩어져서 글자를 이루고 글자들은 이렇게 화면 위에서 무언가를 기록하고 외치며 살아 있음을 온 몸으로 증명해낸다. 여기, 이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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