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오빈이가 10개월 무렵이었던 때, 제주여행은 그날 이후 도보여행으로 채워졌다. 조사해 온 나름의 맛집 리스트와, '아기와 함께 가기 좋은' 장소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숙소 근처 올레길과 사려니 숲길을 매일 7km씩 걸었다. 아이와 바닷가의 작은 상점에 들어가기도 했고, 해변 전체가 살아 숨 쉬는 듯 한 곳에서 바위 사이 게들의 움직임을 들었다. 바닷가에서 노을을 보며 분유를 먹였던 그날의 기억은, 그 여행은 우리에게 꽤나 큰 자욱을 남겼다. 순례길 신혼여행이 그랬듯이.
우리가 할 수 있구나. 아이를 데리고도 둘레길을 걸을 수 있구나. 그것도 아이도 우리도 정말 즐겁게 걸을 수 있구나.
그 이후, 우리는 둘째를 임신했고, 남편은 내게 자유시간을 주기 위해 오빈이만 데리고 산을 몇 번 올랐다. 둘째가 태어나면 아이들을 함께 태우고 자전거를 타려고 2인용 자전거 트레일러를 사기도 했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에 사둔 트레일러는 자리만 차지하다 중고나라에 팔렸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길에 대한 소망은 이어졌다. 그리고 둘째 오윤이가 태어나고 우리 가족은 서울 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시작 목표는 오윤이의 첫 봄. 오윤이가 6개월, 오빈이가 두 돌을 갓 넘겼을 때로 잡았다. 남편 이삭은 그전부터 분주했다. 이삭은 내가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등산 캐리어를 알아보러 다녔고, 오빈이를 태우던 것과 같은 브랜드이자, 우리의 신혼여행 때와 같은 브랜드인 등산캐리어를 친정부모님께 백일 선물로 받았다. 서울 둘레길 안내센터에 들려 스탬프북을 받아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이들 몫까지 챙긴 네 개의 스탬프북과 영어와 한국어로 된 둘레길 지도를 아이들이 잠든 밤 펴서 시작점을 어디로 할 지고 민했다. 어린 첫째와 신생아 둘째를 보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육아 말고는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던 신생아 육아기간을, 나와 남편은 그렇게 서울 둘레길을 꿈꾸며 보냈다.
아이를 데리고 도는 둘레길은 짐 싸는 것부터 다르다. 우리가 준비한 유아 등산 캐리어에는 각각 20L들이였다. 몇 시간짜리 둘레길을 생각하면 공간이 많이 남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짐을 쌀 때마다 가방은 터질 듯이 잠겼다. 일단 첫째 오빈이의 기저귀 5개, 신생아인 둘째는 더 넉넉하게 8개, 둘째 몫의 분유와 뜨거운 물을 담은 보온병, 이유식, 물티슈, 여벌 옷, 그리고 아이들 용 간식을 넣어야 했다. 그리고 공간이 남으면 우리 짐을 넣을 수 있었다. 하필 우리는 미세 플라스틱 이슈가 있던 즈음에 아이들을 낳아서 유리젖병을 쓰고 있어서 가방 무게가 상당해졌다. 돌아오는 길에는 아이들이 사용한 기저귀를 다시 챙겨 와야 했으니 오히려 더 무거워질 것이었다. 이 모든 짐에 아이들 무게까지 합쳐야 하니 각자가 10kg은 족히 들어야 했다.
걱정은 가방뿐이 아니었다. 오윤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배앓이가 있어서 꽤나 자주 칭얼대는 편이었다. 처음 타보는 등산 캐리어에 오윤이가 몇 시간 동안 잘 있어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캐리어에 일단 타면 손이 오윤이가 시선 근처까지 쉽게 닿지 않기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우리는 짐을 더 챙겼다. 유모차에 매다는 뜨개질로 만든 꿀벌 모양 모빌을 배낭 차양막에 달기로 했다. 공갈젖꼭지와 치발기도 여럿 챙겼다. 가방이 무거운 편이 필요한 게 없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우리 맥시멀 리스트들의 지론이다.
2021년 3월. 대망의 첫 순례길 전날 밤, 우리는 짐을 싸고 숨을 한번 후 뱉고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