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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직업에는 저마다의 장점이 있다

<어떤 동사의 멸종> 노동에세이를 읽고

by 리나

01

세상물정 몰랐던 대학생 시절의 나는 눈이 아주 높았다. 나는 아주 멋있고 돈 많이 버는 직업을 가지고 싶었다.


변호사, 교수, 대기업 등 소위 남들이 좋다고 말하는 직업들을 준비하는 데 한 번씩 발을 담가봤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수도권 로스쿨 1곳에 서류합격을 해서 면접을 보게 되었지만 인서울 대형 로스쿨이 아니라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삼성전자 등 주요 대기업 5군데를 지원해 모두 서류합격했지만 왠지 회사원은 전문직보다 별로인 것 같았다.


이런 나의 마음이 티 났는지 결론적으로 나는 로스쿨에도 떨어지고 대기업도 떨어졌다. 그다음 해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어느 것 하나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진로 방황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02

훗날 시간이 흘러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과거의 내가 '별로'라고 생각했던 회사원이 되었다. 전문직도 아니고 대기업도 아니지만 매우 만족하며 일을 하고 있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야망과 욕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과거의 나에게 지금의 나라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네가 생각하는 직업들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야.'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매우 다양해.'

'모든 일에는 저마다의 장점이 있어.'


지금 회사의 장점은 바로 워라밸이다. 나는 평소 칼퇴하고 나머지 시간에 취미생활을 즐긴다. 내가 딱 원했던 라이프스타일이라 매일이 행복하다.



03

이런 경험이 있기에 <어떤 동사의 멸종> 노동에세이 책을 읽으며 가장 공감 갔던 내용은 왜 물류센터에서 택배 상하차를 하는 사람들이 몸은 힘들어하면서 정작 우울해하는 사람은 없는지를 설명해 놓은 대목이었다.


성과를 눈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어서.


단순한 만큼 내가 한 것이 확실해서.


내가 쓸모 있는 무언가를 한다는 느낌을 한순간도 잃지 않아서.


이 일을 하는 동안 인생은 모호하기로 악명 높은 시간 개념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무언가, 두손으로 꼭 붙들고서 집고 휘두를 수 있는 단단하고 구체적인 무언가가 돼서.


마치 하루하루 레벨 업하는 느낌이라서.


비록 '사라지는 직업들의 미망록'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직업이지만, 누구도 '나는 나중에 커서 택배 상하차 일을 할 거야! 내 장래희망은 택배 상하차를 하는 거야!'라고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에도 장점은 있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생계의 수단이고, 라이프스타일에 꼭 맞는 직업일 수 있다.



04

이는 '4장 청소하다' 파트에서도 이어지는데, 작가는 청소일의 장점을 아래와 같이 말한다.


성취의 감각, 뿌듯함

비포와 에프터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인상 깊게 읽었던 밀란 쿤데타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책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대략 요약하자면 인정받는 외과의사였던 주인공은 정치적 상황 때문에 유리닦이 청소부 일을 하게 되는데, 처음으로 일이 끝나고 나면 어떤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는 '행복한 무관심'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어떤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는 일을 했고 그것이 아름답다 생각했다. 그는 내면적 '그래야만 한다(소명)'에 의해 인도되지 않은 직업에 종사하며 일단 일을 끝내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사람들의 행복을 이해했다. 그는 한 번도 이런 '행복한 무관심'을 체험하지 못했다."


솔직히 나는 현재 내가 하는 일을 '소명'이라고 느낀 적은 없다. 아마 대부분의 회사원은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때로는 정말 자신의 일에 열정을 가지고 소명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그저 나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해내고, 잘 끝냈다는 것에 성취감을 느끼고, 퇴근하면 모든 것을 잊고 마음 편히 내 삶을 즐기는 생활에 만족할 뿐이다.



05

<어떤 동사의 멸종> '1장 전화받다' 파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나는 콜센터를 떠올리며 이런 일자리는 그냥 사라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상이 현실이 된 광경을 보니 그것이 얼마나 철없는 생각인지 깨달았다. 없어져도 상관없는 것에, 없어지는 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는 무언가 때문에, 사람들이 영하의 길거리에서 그것을 돌려달라고 소리치고 있을 리 없었다. (중략) 그래도 일하고 싶다.


나도 이 말에 매우 공감한다. '노동'은 인간의 삶에 물질적 보상 이상의 것을 준다. 그 일이 어떤 형태이든 모든 직업에는 저마다의 장점이 있다.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청소 이모님을 자주 마주친다. 우리 회사에도 콜센터가 있어서 콜센터 직원들도 종종 볼일이 있다. 솔직히 예전에 철없을 때는 나도 직업의 귀천을 따지며 무시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각자 자리에서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고 그렇기에 이 사회가 돌아간다.


모든 노동에는 저마다의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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