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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이 된 피터팬 Jan 30. 2022

유통이란 무엇인가

365일 이벤트로 가득한 이곳!

유통이란 무엇인가.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나는 이벤트를 파는 곳이라고 말할 거다. 유통은 참 즐거운 곳이다. 365일 매일매일이 이벤트로 가득한 곳! 놀이공원 못지않게 시끄럽고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이전에는 빨간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유통인으로 살아가는 요즘은 매달 크고 작은 행사들을 손꼽아 준비한다. 행사가 시작하면 또 다음 행사를 준비하고, 큰 행사들은 세 달 전부터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주간행사가 끝남과 동시에 다음 주간행사가 시작하니 단 하루도 평범한 날이 없는 것. 그야말로 당신의 모든 날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이벤트사가 유통사다.


우리의 노력은 보통의 날을 특별한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예를 들면 블랙 프라이데이 같은 할인 대첩이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날 행사 품목을 확인하고 쿠폰을 준비하고 득템력을 장착한다. 행사 전단을 보며 한우 50% 할인 이벤트를 하는 날을 체크해 두고, 사고 싶은 플레이스테이션이 할인한다는 소식에 설레며 지출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무미건조한 일상에 무언가를 기대하고 기다리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벤트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소비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은 잠시 차치하는 걸로...)


그렇다면 각 바이어는 이벤트 플래너와도 같다. 어떤 흥미로운 상품으로 고객에게 즐거움을 줄지, 어떤 방식으로 고객에게 서프라이즈와 재미를 선사할지 이벤트를 짜고 연출까지 관여한다. 그래서 바이어는 1년 내내 어떤 상품과 이벤트로 고객을 즐겁게 할지 궁리하는 사람이다. 마치 코미디언이 맨날 다른 사람을 어떻게 웃길지 고민하는 것처럼, 우리는 어떻게 고객을 신나게 할지를 고민한다. 그것이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일의 기쁨과 슬픔(고통)은 모두에게 있다. 상품 속성이 다르다 보니 각 카테고리 바이어들은 각자의 바쁜 시즌이 있다. 그리고 그걸 모아 보면 일 년의 바쁨과 힘듦의 사이클이 보인다. 과자, 초콜릿 바이어는 어린이날과 크리스마스, 밸런타인데이, 수능 행사가 큰 행사이고 조미료, 통조림 바이어는 명절세트가 나가는 설, 추석이 제일 중요한 행사다. 이런 데이 행사 이외에, 계절적 요인을 타는 시즌 상품들도 있다. 여름에는 음료, 빙과류, 맥주 상품들이, 겨울에는 호빵, 국탕류 상품들이 매출이 크기 때문에 해당 바이어의 바쁜 시즌이 된다. 신선식품처럼 상품 자체에 수확 철(시즌)이 있지 않지만 가공식품과 비식품에도 각자의 철이 있다.


기억하자, 모든 행사는 비용이다. 그래서 적절한 재고관리와 발주가 필수적이다. 사실 남들을 기쁘게 하는 일은 하는 당사자도 기분이 좋다. 가족, 친구, 연인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준비하면서 느끼는 설렘과 행복한 감정은 다수가 공감할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를 즐겁고 신나게 하는 일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직업인가. 어쩌면 돈을 주면서 해야 할 직업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모든 행사는 비용이다. 상품 발굴과 포장, 물류비와 세금, 인건비와 전시하는 공간 비용까지. 돈이 없으면 행사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그래서 적절한 재고관리와 발주가 필수적이고, 매입 조직 이외에 재무, 세무, 물류 등 보이지 않는 역할이 중요하다.


상생 추구가 모두에게 좋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흔히들 유통업체가 협력업체를 대상으로 갑질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요즘 공정거래법 상 그런 일은 엄격히 규제되고, 어떤 카테고리의 흥행은 사실 협력업체의 능력에 달려 있다. 과자의 경우 오리온, 롯데, 해태, 크라운 등 협력회사인 제조사들이 성공적인 신제품을 만들어 낼 때마다 매출이 올라간다(꼬북칩, 허니버터칩 대란). 마찬가지로 삼성과 LG에서 혁신적인 신상품을 만들어 대박을 치면 가전 매출이 함께 올라간다. 결국  제조사와 유통사는 같은 경제적 유인을 공유하는 사이다. 나아가, 독점적 지위의 제조업체가 있으면 매입은 협상력을 잃는다. 그래서 바이어는 1위가 아닌 업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업체의 성장과 함께 그 카테고리의 매출도 신장하기 때문에 신생 또는 잠재력 있는 업체를 돕고 키우는 것은 바이어의 이타심 때문만은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협상력은 언제나 이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완벽한 기브 앤 테이크는 아니지만 장기간의 협상 게임을 고려해 한 발 물러설 때를 알아야 한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편의를 봐주는 것이다. 내가 불편함을 감수하고 업체의 요청을 몇 번 들어주었다면 이후 나의 요청이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 한 번에 모든 패를 까지 말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파악해 적정 수준 수락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능력이 얼마나 좋으냐는 어쩌면 업체와의 신뢰를 얼마나 잘 관리했는가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혼자만 이긴다면 신뢰가 형성될 수 없기에, 소탐대실을 경계해야 한다.


매입에서 바이어로 살며 일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경험했다. 좋아하는 상품들을 담당MD로 운영할 수 있어 행복했다. 다이소가 보이면 자동적으로 들어가 운영 상품들을 살펴보고, 취미처럼 백화점들을 돌아다니며 업체들의 행사 가격을 알아봤다. 매월 초에는 편의점별 행사 품목을 암기해 업체와 협상할 때 유리한 지식으로 활용했다. 새로운 상품을 남들보다 빨리 만나볼 수 있어 즐거웠고 친구들에게 내 자식 자랑하듯 상품을 공유할 때는 뿌듯했다. 일의 슬픔도 있었지만 기쁨이 컸기에 버틸 수 있었다. 아쉬움이 있지만 이제는 또 다른 분야에서 기쁨을 채집하러 간다. 무엇이 더 적성에 맞는지 알아볼 기회다. 도전이자 실험. 나도 나를 알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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