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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이 된 피터팬 Dec 02. 2023

다양성 담론(3)_외면한다고 없는 게 아니다

우리가 성다양성을 논의해야 하는 이유

"당신은 왜 이성애자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다. 누구도 나에게 이성애자인 이유나 그렇게 된 계기를 물어보지 않았기에 내가 왜 이성애자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성애가 당연하고 '남자친구 있어요?', '여자친구 있어요?'라는 질문이 통상적으로 쓰이는 것은 한국사회가 철저히 이성애 중심 사회임을 보여준다.


당연해 보이는 많은 것들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이 사회의 권력구조를 이해하기 쉽다(역도 성립). 사회의 많은 것들은 인위적으로 조작되고 정의된 것이다. 현재의 기준이 편안하고 당연하게 느껴진다면 기득권에 속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권력의 속성이 그렇다. 나란 존재를 증명하거나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것 자체가 권력이며, 따라서 내가 왜 이성애자인지 설명하지 않는 것은 한국에서 이성애자의 위치를 알려준다.


물론 성다양성 논의는 이성애와 같은 성적지향을 포괄하는 더 넓은 범주의 다양성 담론이다. 생물학적 성과 내가 인지하는 성이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으며, 또는 내가 정의하는 나의 성정체성이 사회의 기준에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논의를 포함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성다양성 담론을 성적지향/취향에 국한해 특정 행동에 대한 혐오의 태도로 접근하며, 이러한 좁은 관점이 건설적인 성다양성 논의를 저해한다.

 

<시대예보:핵개인의 시대>라는 책에는 이런 예시가 나온다. "양성평등 문제라고 하면 안 돼요. 양성은 편협한 범주예요. 남성, 여성 외에 퀴어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데요. 그냥 '성평등'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어를 살펴보면, 한국에서는 남성과 여성, 양성만을 정상 범주로 간주하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이외의 성정체성은 성 소수자가 되고 두 가지 성만 인정받는 사회에서는 다양한 성정체성 및 성적지향 개인들이 존중받기 어렵다.


특히 미디어나 일상에서 성 소수자의 노출이 거의 없던 한국 사회에서는 성다양성 개념이 생소하다. 성다양성에 대한 이해도가 낮기 때문에 편견과 선입견이 부풀려지고, 두려움과 혐오까지 표출되는 등 성 소수자들이 심리적 안전감을 느끼거나 본인을 드러내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유와 원인을 소명하라는 사회의 요청을 받는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타인과 사회에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사실, 성정체성은 겉으로 드러나는 인종과 달리 당사자가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이상 위장이 가능하고, 차별의 위험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바뀌어야 할 것은 개인의 정체성이 아니라 차별하는 사회다. 누구나 "나답게" 살 권리가 있다. 우리 사회에 다양성이 지켜져야 할 이유는 모두가 "다양성"의 한 부분이며 따라서 내가 존중받으며 살기 위해 나와 다른 이를 존중해야 한다.


성다양성을 포함해 사회의 다양성을 늘려나가자라는 운동은 나와 다른 이를 온전히 이해하라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나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일 수도 있음을 기억하면 어떤 태도로 사회를 살아가는 것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안전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나에게 안전한 사회는 특정 대상만 존중받는 게 아니라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이고 경험한 만큼 공감할 수 있다. 성다양성도 그러하다. 물론 부정적 경험은 선입견을 공고히 할 수 있지만, 긍정적인 경험들을 통해 왜곡된 선입견들을 교정할 수 있다. 성 소수자인 친구들을 만나보면, 비성소수자인과 다를 것 없이 책임감 있게 일상을 살아가고 타인을 배려하며 사회생활을 하는 걸 알 수 있다. 단지 성의 영역에 있어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일 뿐이다.


한편, 한국 사회에서의 성다양성 담론을 보면 권위주의적이라고 느낀다. 주류의 성이 성소수자들을 인정할 것인지 말지를 논의하는 방향으로 흐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성소수자 친구들을 곁에 둔 사람으로서(나를 믿고 말해 준 친구들에게 감사하다), 이러한 논의는 오만한 것이고 실용적이지 않다고 느낀다. 왜냐면 성소수자는 이미 존재하고 지금도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논의할 것은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과, 모두가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가 아닐까.


일례로 프랑스는 사회 구성원 중 동성 파트너십이 늘어나자 사실혼 관계를 법적으로 보호하기로 법과 제도를 바꿨다. 1999년 제정된 ‘PACS(동거계약법)’로 인해 계약동거 커플은 공동 납세 혜택과 자녀 양육수당을 받게 되고, 동거 기간 3년이 지나면 유산 상속도 받을 수 있게 됐다. 물론 채무에 대한 연대 책임과 상호 부양 의무도 주어지지만 이전까지 보장받지 못했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들을 보장받게 된 것이다. 이처럼 기본적인 권리 보장에 있어 사람이 법과 제도에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과 제도는 사회 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다양성 논의는 실제로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기본적인 법적 보장을 받고 있는지, 사회적 보호를 받고 있는지를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인정하지 않는다고, 외면한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나 나답게 살아가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의무를 다할 수 있게 돕고 그에 대한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실질적인 대화를 나눠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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