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주간의 신입사원 인턴십을 담당하게 되었다. 설레었냐고? 걱정과 부담만 가득했다. 3-4일 교육 과정을 혼자 기획하고 운영한 적은 있지만 혼자 4주 교육과정을 책임진다는 것은 막막한 일이었다. 매일 8시까지 교육장에 와서 교육생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고 교육이 끝나고 나면 교육장 정리와 다음 과정들을 준비하느라 야근을 해야 한다. 그것을 4주간 이어서 해야 한다니.
12월은 야근의 연속이었다. 4주 과정을 기획하고, 유관부서에 도움을 요청하고 강의안 가이드를 작성해 강의를 요청드리고, 필요한 비품과 차량, 업체 및 콘텐츠를 다 준비해야 한다. 갑작스럽게 웰컴키트와 명함을 주문제작하고 엑스배너와 현수막도 주문했다. 끝이 없는 준비과정에 12월부터 벌써 지치는 기분이었다.
새해 둘 째날부터 교육이 시작된다. 그 말은 교육담당자는 연말에 교육준비를 해야 한다는 의미다. 나의 연말은 일로 가득했다. 누군가는 뭐 그리 챙길 게 많냐고 할지 모르지만 끝이 없이 나왔다. 11월부터 기획을 시작했지만 12월 초에 세부적인 운영안이 나왔다. 사번이 없는 신입사원들에게 활동비를 지급하기 위해 재무와 급여, 인사, 시스템 쪽과도 계속 이야기를 하며 운영적인 업무들을 풀어갔다.
교육 운영 준비에 몰두하느라 놓치고 있었던 교육생들. 뒤늦게 신입사원들의 지원서와 자기소개, 면접과정에 제출했던 프로젝트들을 하나씩 읽어갔다. 스무 개 정도의 자기소개서를 꼼꼼히 읽는 것만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출퇴근 길에도 이름이며 전공이며 어떤 경험들이 있는지 신입사원 정보를 숙지하는 데 힘썼다. 그제서야 기대감 같은 것이 조금 생겼다. 이런 멋진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회사에 들어온다니. 내가 배우고 싶은 역량과 태도가 묻어나는 글을 보면서는 감히 내가 이들 앞에서 멋진 교육담당자의 모습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준비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혼자 남겨진 사무실에서 눈물을 몇 번 흘렸지만 대충 준비할 수가 없었다. 자기소개서를 읽은 후 소중한 인재들이 우리 회사에 들어와 나가지 않고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을 잘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12월은 휴가를 낸 채 계속 일을 했고, 크리스마스와 1/1 새해 첫날마저도 오리엔테이션 자료를 만들고 첫날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한 3시간 게임을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나의 2023년은 일로 끝이 났고 2024년의 시작도 일과 함께했다. (연말을 제대로 보내지 못한 기분에 23년도에 머문 느낌이다)
일단 첫 주, 일단 첫날만 잘 시작해 보자! 그럼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매일 자기 최면을 걸었다. 그러나 혼자 처음 보는 신입사원들을 이끌고 과정을 진행해야 한다는 부담이 사라지진 않았다. 더구나 전문 MC도 아니고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 내가 3시간이란 시간을 레크리에이션 강사처럼 진행해야 한다는 게 두려웠다.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보다는 3시간을 채울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팀 빌딩 게임을 담당하는 업체에 외주를 하고 싶었지만 교육생과 나와의 아이스브레이킹도 중요하니까... 그렇게 연말 몇 날 며칠을 잠을 설치고 늦게까지 작업을 했다.
교육을 준비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회사가 몰라주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노동들(집에서, 주말에도 휴일에도 일하는), 내가 친구와 가족과 보낼 시간을 포기하고 갈아 넣는 나의 시간과 노력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일 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이런 삶이 계속 이어진다면 과연 나는 버틸 수 있을까? 이 교육이 끝나고 회사가 쉼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이직하리라!라는 결심을 하고 버텼다. 일단 이 교육을 잘 마무리하고 진지하게 생각해야지!
그리고 드디어 시작한 인턴십 교육. 12월 말에 미리 세팅해 둔 교육장에 8시까지 도착해 음악을 틀고 배너를 세우고 교육생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이제 정말 시작이다. 장사 시작이다! 처음인 사람들의 첫 만남. 그들도 회사와 교육담당자와의 대면이 처음, 나도 신입사원 교육과 혼자 하루 종일 진행을 담당하는 것이 처음이다(대개는 강사를 모시고 오프닝과 브릿지 멘트만 진행했던 터라). 처음인 사람들의 만남이라니. 무탈히 마치기를 바랐던 첫날.
큰 사건 없이 생각보다 잘 흘러갔다. 먼저 합격 축하 인사를 전하고 인사담당자를 소개하고 과정에 대해 안내했다. 자기소개 시간을 위해 사전에 5분 분량의 자기소개를 준비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소개 시간 급 공개한 미션은 "자기 소개 중간에 '최고'라는 단어를 한 번은 꼭 써야한다!"는 것. 이렇게 미션을 준 이유는 자기소개가 재밌었으면 하는 마음과 "최고"라는 수식어를 통해 긍정적인 경험과 인상을 서로 공유하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최고의 회사", "최고로 기억남는 여행지", "최고로 매력적인 고양이", "인생 최고의 음식" 등 각자 다른 방점으로 최고를 넣었다. 나름 재미요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직 서로가 어색한 그들을 위해 중간중간 분위기를 유하게 하는 멘트들을 해주어야 했다. 아까~라고 소개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00은 무엇인가요? 같은. 적당히 개입하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이스브레이킹 3시간. 교육담당자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서로 어색함을 깨는 시간이지만 모든 게임의 구성이 각각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이제 막 이 조직의 구성원이 될 사람들에게 어떤 게임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친해지는 시간을 만들 수 있을까 고심하다가 총 다섯 개의 게임을 3시간 분량으로 준비했다(밸런스카드/ 무물타임/ 트렌드고사/ 캐치마인드/ 자음게임).
첫 째는 밸런스 게임.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할지 본인이 해당하는 색의 카드를 들어서 동기들을 파악하는 게임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이 나온다(내가 만들어낸).
이 중 하나를 꼭 먹어야 한다면? 1. 토마토맛 토 2. 토 맛 토마토 3. 똥맛 카레.
누군가는 어이없을 것이다. 과연 이것이 교육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물론 아이스브레이킹이기 때문에 그냥 웃고 친해지기만 해도 성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의미부여의 달인!
"여러분,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정답이란 게 없을 때가 많아요. 여러 개의 답이 존재할 때가 많죠. 그래서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본인만의 근기를 갖고 주장을 해야 해요. 근거가 있고 그게 타당하고 합리적이라면 여러분의 주장이 정답이 될 수 있는 거죠. 토맛 토마토를 고르신 00님은 왜 이걸 고르셨나요?"
이렇게 회사 생활을 할 때는 본인의 생각과 근거를 장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다시 생각해도 괜찮은 듯) 그리고 교육생과 상호작용하면서 또 다른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회식 상황에서 남들과 다른 메뉴를 시킬 것인지를 고르는 상황카드였다. 이것도 내가 만든 상황카드였는데 우리 회사는 메뉴 통일해야 하는 그런 문화가 아님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대부분은 빨강, 노랑 카드를 택했고 두 세명만 연두 색 카드를 들었다.
"다른 메뉴 주세요라고 답변한 A님은 왜 그걸 선택하셨어요?"
회식 때 먹고 싶은 걸 시키는 게 문제가 아닌데 이상하게 MZ의 비사회성을 풍자하는 코미디에서 간혹 자기주장 강한 MZ가 혼자만 다른 메뉴를 시키는 모습을 눈치없다는 뉘앙스로 연출하곤 한다. 우리 교육실 분위기도 "다른 걸 먹고 싶으니까요"라는 답변이 나올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해당 교육생은 이런 답변을 내놓았다. "아 저는 다른 분들이 다 똑같은 거 시키니까 저라도 다른 거 시켜서 조금씩 나눠드리려고요"
그래서 의미부여의 달인인 나는 이런 메시지로 마무리했다. "여러분 A님 의견을 들으니까 다들 오~이런 반응을 보인 건 뜻밖의 답변이라서 그러신 거죠?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의 생각을 물어봐야 해요. A님이 남들을 배려하기 위해 다른 메뉴를 시킨 것처럼, 어떤 현상을 보고 내 의도대로 해석한다면 오해할 가능성이 커요. 현업에 배치되어 일을 하다 보면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텐데요, 그래서 자주 질문을 해야 합니다."
캐치마인드라는 게임을 생각한 것도 참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자화자찬). 별 다른 게임 준비물이 필요하지 않다. 내가 준비한 제시어와 그림 그리는 칠판만 있으면 된다. 각 팀에서 한 명씩 나와 내가 보여 준 제시어를 칠판에 그림으로 묘사한다. 그러면 그 외 교육생들이 그림에서 추측, 연상을 통해 제시어를 맞추는 게임이다.
이 게임을 시작하기 전 왜 이 게임을 하는지 설명했다. 회사에 들어가면 내 생각을, 내 아이디어를 남에게 설득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이다. 그때 내 관점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알아듣기 쉽게 포인트를 잡아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제안도 이해하기 쉽지 않거나 설득할 수 없으면 무의미해지기 때문에 상대방 입장이 되어 쉽게 설명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역시나 제시어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그리는 사람도, 맞추는 사람도 답답했던 상황들이 연출되었다(근데 또 잘 맞추는 고수가 있어서 게임은 원활하게 흘러감). 그리고 나중에는 그림을 못 그린다고 답답해했던 사람이 직접 나와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었을 때 표현하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되는 것도 의도하지 않았던 게임의 부수효과였다. 또, 레전드 예시로 인터넷에 다른 사람이 잘 표현한 그림을 정답이 공개된 순간 보여줌으로써, 잘 설명하는 사람은 이렇게도 표현한다는 것을 레퍼런스로 보여줘 웃으면서 커뮤니케이션 센스를 익혔다.
모든 게임에 이런 의미부여를 더해, 여러분이 참여하는 이 게임 시간이 단순 친목 도모가아니라 조직 속 구성원이 되는 과정임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한 달간 걱정 한 가득이었는데 막상 시작하니 잘 해내고 있다. 나 역시도 성장하는 교육. 하루 종일 긴장 속에서 혼자 게임을 진행하면서 의미부여까지 놓치지 않는 교육 담당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다른 스킬도 필요하다. 신입사원은 모든 것에 적극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들도 처음에는 서로 어색하니 낯을 가린다. 그래서 교육담당자는 적은 반응에도 실망하면 안 되고 의연하게 진행하는 노련미와 그럼에도 흥미와 참여를 유발하는 스킬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스킬은 강의를 통해 배울 수 있다기보다는 직접 교육을 진행해 보는 경험을 통해서 체득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첫날의 성공적인 아이스브레이킹 3시간 진행은 내게 큰 성취와 자극이 되었다.
첫날, 과정 소개부터 자기소개, 게임까지 혼자 모든 것을 진행하고 신입사원 분들께서 상기된 얼굴로 집에 돌아가자 그제야 나의 연말이 끝이 났다. 몇 날 며칠 붙잡고 있던 근심과 걱정이 다 해소가 되는 기분, 어떠한 문제도 없이 잘 진행했다는 안도감과 성취감. 큰 한숨을 내쉬었다. 단단하게 뭉쳤던 어깨가 이제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 하루를 위해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그리고 다행히 잘 마무리했다. 잘했다 나 자신, 수고했다 나 자신.
그렇게 첫날을 잘 만들어내니 앞으로의 4주도 큰 일 없이 잘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좋은 기운이 느껴졌다. 집으로 가는 길, 이번 주까지만! 금요일까지만 더 힘을 내보자!! 다음 주는 다음 주에 생각해야지! 어둑해진 하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뜨겁게 상기된 얼굴로 스스로를 격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