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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이 된 피터팬 Feb 14. 2021

믿지 않지만, 매년 사주를 봅니다

운(運)은 (+)도 (-)도 아닌 중립적인 것

재미로 보는 신년 운세.

은행 업무를 보려고 앱을 켰는데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토정비결을 누르고 있다. 생년월일과 성별, 이름, 태어난 시를 입력한다. 나의 올해 재물운과 건강운, 애정운과 취업운이 2초 만에 출력된다. 쉽지 않은 일 년을 보냈던 것 같은데 나의 올해가 이처럼 간단했나. '믿지 않는다'는 방패를 들고 올해의 운세들을 한 줄씩 읽어 내려간다.


우리나라만큼 점, 사주에 열광하는 민족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점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많다. 신년마다 TV에서는 사주나 점을 보는 콘텐츠가 나오고 많은 앱들은 신년 운세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주카페나 타로 가게도 어렵지 않게 보인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서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희망 어린 한 마디를 위해 돈을 지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보다는 미래에 답답함이나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좀 더 사주나 운세 서비스를 찾을 것이다.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의지하고 싶은 문장을 찾고 싶은 마음에서 말이다. 나의 경우가 그렇다. 운세 서비스를 통해 나의 확증편향을 확인하게 된다.


지인 중에 명리학을 공부하신 분이 있다. 그분은 명리학이 통계적인 이치를 따르지만 미신적인 측면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 미신적인 측면은 가능성에 대한 것으로,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을 말한다. 그래서 사주를 봐주는 사람들도 끝에 꼭 하는 말이 있다. "다 본인 하기 나름이야." 우리에게 사주팔자를 바꿀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그리고 사주팔자보다는 관상이 중요하고, 관상보다는 심상이, 심상보다는 건강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강조한다.


한때 운명론과 결정론적인 사상에 혹했던 시절이 있었다. 나라는 사람을 신과 운명에 맡기고 나는 그저 따라갈 뿐인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기하학의 아버지 데카르트가 좌표평면에 물체를 X좌표와 Y좌표로 설명한 것처럼, 사람은 태어나면서 본인의 생년월일시를 부여받고 우주의 좌표평면 위 한 점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여받은 그 점의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결정론적인 시각을 더 많이 받아들였던 때가 있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구심을 품으며 신을 찾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공부를 할수록 내 의지와 열정이 생각보다 큰 힘을 가진다는 것을 느낀다. 많은 천문학자들이 학문을 파면 팔수록 설명할 수 없는 현상과 법칙들에 압도되어 초자연적인 무언가를 믿게 된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아직 우주적 관점에서 애송이기 때문에 이 운명론적, 결정론적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을 때,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일단은 절충점에 서 있기로 했다. 그리고 아직도 이러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한 번은 미드를 보다가 새삼 "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한글 자막으로는 "운"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luck이 아니라 chance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궁금증이 발동해 운과 관련된 영단어들을 찾아봤다. 다의어인 chance가 "운"을 의미할 때 쓰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chance가 운뿐만이 아니라 가능성(확률), 기회를 가리킨다는 점을 고려하면, 운은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내는 "기회"의 뉘앙스가 큰 것 같다. 그리고 한자어에서도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한자어로 운(運)은 옮길 운, 움직일 운으로 유동성을 내포한다. 즉, 운이 어떤 결과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행동이 최종 결과를 만든다는 로직인 것이다.  


보통 운이라고 하면 행운을 떠올린다. 하지만 운(運)은 그저 중립적인 것이다. 운 자체가 (+)나 (-)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매년 재미로 사주팔자를 보지만, 전전긍긍하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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