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은 청소년기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길을 잃을 때 종종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사실 그 질문은 그리 유용하지 않다. 우리는 그냥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간다.
오히려 더 중요하고 실질적인 질문은 ‘나는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이다.”
<정체성의 심리학, 박선웅교수>
한때 철학에 빠져 답 없는 질문들을 던지며 여러 사람에게 답을 구했다. 정답이랄 게 없기에 많은 사람들이 목적으로 여기는 '행복, 가족, 사랑, 성장', 이런 것들이 삶에서 중요한 것이 아닐까란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 누군가가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목적... 글쎄요. 세상에 던져졌으니까 살아갈 밖에요. 이왕 태어났으니까 죽을 때까지 나를 책임지고 살아가는 거죠. 운이 좋아 여유가 있다면 내 주변과 내가 속한 사회에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을 주면서 같이 행복하면 더없이 좋을 것 같네요."
삶의 목적을 묻는 질문에는 뚜렷한 정답이 없을지 모른다. 태어남은 선택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의 시작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회사를 다니는 것은 내가 선택한 결과다. 따라서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정체성이란?]
'나는 이곳에 왜 있는가?'란 질문은 결국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나는 회사에서 어떤 사람인가?'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답은 단순히 직책이나 성과, 직무 기술서로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조직 안에서 반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각자의 목표를 달성하지만 그 과정에는 수많은 내면의 고민과 갈등, 결심과 선택, 성장의 서사가 스며 있다. 그래서 같은 일을 하더라도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다를 수 있으며 이러한 총체적인 서사는 본인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다.
심리학에서는 정체성(identity)을 단순한 자기 개념(self-concept)과는 구별한다. 자기 개념이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는 표면적 인식이라면 정체성은 다양한 삶의 경험 속에서 형성된 가치관과 우선순위에 대한 내적 합의에 가깝다. 예를 들어, '나는 HR 소속으로 급여담당자이며 엑셀을 잘 다룬다' 같은 단순한 인지적 기술은 자기 개념으로, 상황에 따라 쉽게 변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성과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료들과 신뢰를 쌓으며 일하는 게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가치가 반영된 정체성은 스스로가 결정한 삶의 방향성에 가까워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즉, 정체성은 무엇이 나에게 본질적으로 중요한가에 대한 깊은 자기 이해를 담고 있다. 실제로 회사에서 일 잘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해 보면 공통적으로 셀프 동기부여를 하고 있다. 인터뷰를 하면서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소신과 동기를 자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분명 일을 그냥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일의 어떤 부분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고, 본인의 일이 가진 가치 또는 의미를 느끼거나 고객의 반응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에 대한 본인만의 답이 확립되어 있는 사람들 같았다. 이처럼 모든 직장인에게 성과, 승진 같은 외적인 보상은 물론 중요하지만 '나는 이 조직 안에서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는가'를 긍정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 때야말로 우리는 조직생활을 자기 삶의 일부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일하는 자아의 긍정적 서사 구축이 조직 몰입을 넘어 삶 전체의 만족감과 연결되는 이유다.
[정체성은 전 생애를 관통하는 질문]
우리는 청소년기를 흔히 정체성 형성의 시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이상 하나의 직장, 하나의 직업에 평생을 바치는 시대가 아니다. 계속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정체성은 더 이상 청소년기의 과제가 아니라 전 생애를 관통하는 질문이 되었다. 특히 일은 가장 오랜 시간 우리를 붙잡고 있는 공간이며 조직 내 경험은 그 어떤 관계보다 자주 그리고 깊이 개인의 정체성과 충돌한다.
입사 초기에는 이러한 충돌 속에서 자신에 대한 탐색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연차가 쌓이면 우리는 더 이상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한다. 바쁜 업무, 복잡한 관계, 많은 책임 속에서 '일하는 자아'를 점차 잃어가며 몰입의 이유와 의미 없이 기능 중심의 삶으로 밀려나기 쉽다. 그러다가 후배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세상의 변화 속도에 뒤처지는 자신을 발견할 때, 문득 나의 존재가 기능적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이 몰려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나답게 살아가면서도 조직 안에서 심리적 안전감 속의 일하는 자아를 구축할 수 있을까? 정체성에 대한 오해를 깨닫는 것부터 시작하자. 정체성은 멋진 이미지가 아니다. 오히려 실패, 갈등, 혼란을 포함해 서사를 다시 써 나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긍정적인 일하는 자아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업무 경험을 단순히 성과가 아닌 성장으로 재해석하는 것, 자신의 어두운 시기조차 성장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더 이상 타인의 성공 기준으로 삶을 측정하고 싶지 않다면, 나답게 이 삶을 살아가고 싶다면, 나만의 가치에 따라 조직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내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가야 한다. '내가 이 회사에서 일하는 이유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이 말이 진심이 되는 순간 조직생활은 단순한 성과를 넘어 깊은 만족과 자존감을 남기는 여정이 된다.
[일하는 자아와 HR]
그런 측면에서 HR은 구성원이 자신의 업무 경험을 단순한 성과가 아닌 성장으로 재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조직 안에서 일하는 자아를 다시 세우고 몰입의 이유를 회복할 수 있도록 정체성 기반의 리플렉션 기회를 제공하고 실패와 회복을 포용하는 문화적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고용 유연성이 높지 않은 한국의 조직 구조를 고려할 때, 구성원이 조직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더 나은 이야기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HR 파트너의 존재는 조직의 성과와 혁신, 지속가능성을 좌우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도, 다수의 연구들이 정체성 있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자존감도 높고 우울에 강하며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보다 유연하게 대처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일터에서 본인만의 자아 정체성을 가진 구성원들이 함께하는 조직은 자연스럽게 더 나은 팀워크와 신뢰 기반의 협업을 만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정체성이 ‘내가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이야기를 살아가고 싶은가'를 선택하는 것임을 고려할 때, 이런 사람들은 팀의 위기 상황이나 문제 해결 상황에서도 팀의 긍정적 서사를 써 내려가기 위해 함께 힘을 모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하는 자아를 되돌아보고 일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과정은 단지 개인의 만족도 차원을 넘어 좋은 협업과 지속가능한 몰입의 기반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믿음으로 나는 오늘도 동료들에게 소소한 질문을 던진다. 요즘은 어떤 낙이 있는지, 회사에서 어떤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지, 어떻게 결과물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겉보기엔 소소하지만 그 질문이 누군가에게는 일하는 자아를 다시 떠올리는 작은 리플렉션의 시작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 <정체성의 심리학> 책에서 몇 구절
얼마나 좋은 인생을 살지는 사회적 상황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얼마나 좋은 인생 이야기를 가지고 살지는 개인의 몫이 아닐까.
정체성의 특징이 서로 모순되는 측면들을 통합하는 것. 자기 자신을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완성된 전체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누군가 살아있다고 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저절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즉 자신의 정체성은 스스로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
자기수용의 대상은 크게 2가지다. 첫째, 자신의 과거이고, 둘째, 자신의 강점과 약점이다. 자기 수용의 과정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하지만 결국 그 안에서 모종의 긍정성을 끌어내는 것으로 끝난다. 자기 자신 역시 남들만큼 가치 있는 사람임을 깨다는 것.
기존 발달심리 이론에서 정체성은 청소년기에 직면하는 발달 과업이었으나 이제는 시기가 늦춰져 성인모색기의 과업으로 간주한다. 정체성이라는 문제는 삶의 과정 전반에 걸쳐서 끊임없이 대두된다. 평생직장이 사라지고 다들 여러직장 혹은 여러 직업을 갖고 살아간다. 이혼과 재혼이 많아지고 비혼도 하나의 당당한 선택지가 됨.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지에 대한 문제는 평생 제기될 수 밖에.
과거는 바꿀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과거에 대한 해석을 바꾸는 것이다. 즉, 과거의 불행한 사건으로부터 자신에 대해 깨달은 것은 무엇인지, 세상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무엇인지, 그로부터 바뀌게 된 삶의 원칙들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이다.
동기부여 관한 여러 전문가들이 직원들의 의욕을 이끌어내는 방법에 대해 말하지만, 나는 기업의 이야기와 직원의 이야기가 엮이게 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목적지가 없는 사람에게는 어떤 바람도 순풍이 아니다. -몽테뉴-
즉, 정체성을 갖고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정해졌을 때 내 삶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