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은 결코 개인의 나약함 때문이 아니다
두 달간 이어진 고강도 단독 프로젝트가 끝난 날, 이유 없이 눈물이 나고 어디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를 번아웃이라고 진단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요즘 우리는 ‘번아웃’이라는 단어를 쉽게 쓴다. 퇴근 후 피곤한 날, 회사 가기 싫은 아침에도 이 단어로 우리 상태를 정리하곤 한다. 하지만 진짜 번아웃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깊은 정서적 침식이자 조직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는 감정의 감염이다.
“번아웃은 깊은 내면을 갉아먹는 정서적·행동적 침식이다.”
— Cordes & Dougherty (1993)
WHO 기준, 번아웃은 세 가지 차원으로 나타난다.
1) 정서적 탈진 →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
2) 냉소 및 비인격화 → 사람·일에 무관심하거나 시니컬한 태도
3) 낮은 효능감 → 일해도 성과가 없다고 느끼며 무가치함 경험
사람에 따라 이 세 가지 중 하나만 두드러지기도 한다. 가령 탈진만 강한 유형은 Overextended(자기 착취형), 냉소만 심하면 Disengaged(무관심형), 세 가지가 모두 높은 경우는 전형적인 Typical Burnout이다.
나를 갈아 넣는다는 느낌을 받으며 두 달간 고강도 업무를 했을 때 내가 겪었던 건 자기착취형 번아웃으로, 내 몸이 충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호소했던 것이다. 이처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 또는 시니컬해진 말투, 주의가 산만해지고 실수가 늘어나는 것과 같은 모든 반응들은 일터에서 살기 위해 우리가 선택한 대처 방식일 수 있다. 냉소는 기대를 낮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이고, 효능감 저하는 자기를 덜 다치게 하려는 심리적 거리 두기일 수도 있다는 것. 이러한 변화들이 포착된다면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스스로를 돌봐야 빨리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특히 열심히, 성실히, 고군분투하는 자기착취의 모습을 바람직하게 보는 경향이 있는 한국의 노동 문화에서는 번아웃의 기미가 보여도 재빠르게 조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방치할 경우 번아웃 증상이 점진적, 지속적으로 촉진되어 결국, 직무에 불만족하고, 조직몰입이 낮아지고, 결근이 잦아지거나 이직 의도 및 이직 행동을 보이게 만든다. 이러한 모습은 낮은 직무성과뿐 아니라 가정생활에 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spillover) 개인적, 조직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 사회경제적 손실비용 증가에 이르기도 한다.
우리는 스트레스에 맞서기 위해 두 가지 유형으로 대처(coping)한다.
문제 중심 대처: 문제 해결을 위한 행동(퇴사, 이직, 기술습득, 업무조정 등)
정서 중심 대처: 감정을 다루기 위한 조절(의미 재해석, 감정 인식 등)
문제 자체를 해결하는 대처가 바람직해 보이지만 모든 상황이 개인차원에서 해결 가능한 문제인 것은 아니다. 외상이나 조직 구조처럼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는 감정 중심 대처가 오히려 유효하다. 예컨대, 코로나 시기의 스트레스는 재택근무 가능 여부, 고용 안정성, 돌봄 리소스 보유 여부에 따라 극단적으로 달라졌다.
이처럼 대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가능한 것의 문제다. 자원이 있는 사람은 문제 중심으로 갈 수 있지만 자원이 없는 사람은 감정 중심 대처로 버티는 수밖에 없다.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은 정신건강 측면에서도 작동한다. 즉, 소진은 결코 개인의 나약함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리소스 분배가 핵심이다.
직무 자원: 조직 내 지지, 자율성, 교육 기회, 제도, 리더십
개인 자원: 회복탄력성, 자기효능감, 의미부여, 정서 조절력 등
연구에 따르면 직무 요구(demands)가 높아도 자원이 풍부하면 열정이 유지될 수 있지만, 직무 요구가 높은 상황에서 자원이 부족하면 쉽게 탈진으로 이어진다. 더 중요한 건 리소스의 총량이 아니라 공평한 분배라는 점이다. 특정 구성원이 차별받거나 소외된다고 느낄 경우 전체 리소스가 높아도 집단 내 불공정함의 인식으로 인해 번아웃이 가속화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절대적 자원 자체가 적더라도 인지되는(perceived) 자원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배분하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번아웃은 단순히 일이 많아서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일의 맥락과 가치의 불일치가 소진을 촉진한다. 예를 들어, 경쟁보다 협업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성과주의가 강한 조직에 속해 있다면 지속적인 내적 긴장을 느끼며 결국 소진에 이를 수 있다. 또한 업무의 불확실성, 통제력의 결여, 부당한 보상, 불공정한 결정 구조, 애매한 팀 목표 등도 모두 번아웃을 촉진하는 요인이 된다.
결국 번아웃을 예방하고 회복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조직 모두의 개입이 필요하다. 조직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점검해야 한다.
Control: 구성원에게 실제 결정 권한이 있는가
Support: 심리적/제도적 지지 체계가 갖춰져 있는가
Fairness: 보상과 의사결정은 공정하게 이루어지는가
Meaning & Reward: 일이 내면적/사회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Community: 팀 내 유대감과 공동 목표 인식은 충분한가
개인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민감도와 자기 돌봄 역량을 키워야 하며, 조직은 구성원이 그저 버티는 게 아니라 회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심리적 안전망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
번아웃은 한 사람의 감정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이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잃어버렸다는 신호다. 우리는 지친 사람에게 “쉬어”라고 말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진짜 필요한 건 어떻게 다시 의미 있게 살아낼 수 있을지 함께 묻는 일이 아닐까.
<박수정 외 6인 (2019). 한국형 번아웃 증후군 자가진단 척도개발 및 타당도 검증. 여가학연구,No.2, 3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