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 종사자의 이야기
오늘도 눈치를 봅니다/ 감정노동자 / 지불되지 않은 친절
by
어른이 된 피터팬
Jan 27. 2021
1. 오늘도 눈치를 봅니다.
소비재를 판매하는 유통업의 특성상 시류를 빨리 캐치하고 이에 따라야 한다.
근 1년간 변화하는 시류를 따라가며 내가 유통업 종사자라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제일 먼저
유통업의 눈치보기 숙명
을 느낀 것은
일본 불매운동.
정치적 이유를 속내로 한 일본의 경제 제재와
그에 대한 반작용인 한국 소비자의 일본 불매운동.
우리가 소비하는 제품들 중 일본 브랜드가 많은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특히나 골프와 완구 쪽은 일본 브랜드의 점유율이 엄청나다.
그만큼 일본 불매운동으로 인한 유통업의 타격도 컸다.
폐기비용, 재고비용, OP비용 등이 일제히 상승했다.
그래도
결국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야 생존
이 가능하기에
유통업은 소비자의 눈치를 봐야 한다.
다행히 우리 회사는 멍청하지 않았다.
워낙 일본 브랜드가 많아서 모든 상품들을 다 철수할 순 없지만,
미리 일본 브랜드와 일제 상품들의 행사들은 다 내리고,
문제의 소지가 있는 브랜드들은 눈에 최대한 보이지 않는 매대로 위치를 옮겼다.
당장 회사에는 손실이지만,
시류를 읽고
소비자 행동에 동참
하는 회사의 이러한 조치에 공감했다.
개개인의 소비자/국민은 큰 힘을 갖지 못하지만
개인이라는 분자들이 뭉쳐서 원자가 되고 큰 에너지가 된다
.
소비자의 움직임과 소신에 관심을 갖고 같은 방향으로 회사가 움직일 때
고객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 직원들의 마음도 얻을 수 있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둔감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도 재밌게 일할 테니까.
+잔 생각)
우리가 소위 큰 개념으로 소비자라고 통칭하지만, 소비자는 하나의 개체가 아니다.
알다시피 여러 특성을 공유하는 다양한 점조직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어떠한 점조직을 선택하고 방향성을 맞출 것인지
그에 대한 판단력이 그 회사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본다.
2. 감정노동자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당신이 고맙습니다.
유통 현장에 점점 인력이 줄고 있다.
셀프 계산대가 들어오고, 손님이 줄어드니 종업원의 수도 줄어든다.
전체적으로 객수가 줄고, 매출도 줄어들지만
피크 타임이라는 것이 있다.
대개는 더운 여름밤과 금요일, 토요일의 저녁 이후.
이때는 계산대 앞에 고객들이 긴 줄을 만든다.
줄어든 매출만큼 줄어든 캐셔 인력을 보충하지 못해
영업팀과 지원팀에서 계산대 지원을 나간다.
그러면 전문 인력이 아니기에 모든 상품들의 할인 조건을 아는 것이 아니라서
고객의 질문에 바로 답을 할 수가 없거나 바코드가 잘 안 찍혀 버벅대거나
아주 적은 확률로 계산이 잘못되기도 한다.
나중에는 나름 능숙하게 포스기를 다루고
계산 시 생기는 돌발상황들에 임기응변으로 잘 대처했지만,
첫 한 달간 계산대에 서서 당황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바코드가 안 찍히는 건 내 잘못이 아니었고,
계산대에 손님 줄이 길어서 오래 기다린 것도 내 잘못이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들에서 당황스러운 말들을 듣는 것은 나였다.
(고객 입장에선 마주하는 직원에게 말을 하는 것이니 이해는 한다.)
심지어 욕설까지.
하루는 두 시간 넘게 계산대 지원을 나가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서 힘겨운 미소를 장착하고 친절한 말투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잘 모르고 버벅대자 삿대질과 고성을 쏟아붓는 고객님.
어떤 짜증에도 계산대에선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나였는데
너무 지친 상황에서 삿대질과 고성은 감당하기에 버거웠다.
순간 눈물이 나왔고 사람들이 볼까 봐 빨리 닦아냈다.
땀을 닦는 것마냥.
그러나 한번 열린 눈물샘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또 한 줄기 흘러내리고,
나는 누가 볼까 봐 한 손으로 닦고 한 손으로는 뒷 손님 계산을 이어 나갔다.
'나한테 그러시는 게 아니야. 그냥 이 상황이 짜증 나서 그러시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진정하려 노력을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를 감출 수 없었다.
"포인트 적.. 립.. 도와......(손으로 기계를 가리키며 번호를 눌러달라고 요청한다)"
한 고객의 계산을 마치자 다행히 호흡과 목소리에 평정이 돌아왔다.
다른 직원분들께 운 것이 들키지도 않은 것 같다.
정신줄 부여잡고 무너지는 고비를 넘겼다.
감정노동자.
사실, 모든 직장인, 자영업자들이 감정노동자다.
고립되어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는 모두 감정을 소모하고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다시 일하는,
감정노동자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상황일 텐데
무엇이 우리를 각박하게 만드는 것일까.
계산대에 서 있으면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들
이 더 반갑게 느껴진다.
"카드가 안 읽혀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앞에 분 결제 끝나면 바로 도와드리겠습니다"
"바코드가 안 찍혀서 잠시만 확인하고 도와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괜찮아요" "네~""천천히 하셔도 돼요" "감사합니다"
이런 한 마디의 말이 사소한 것 같지만 크게 다가온다.
한 마디의 선물.
나 역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의 선물을 건넬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자 오늘도 노력한다.
3. 지불되지 않은 친절함
네덜란드와 독일에서 6개월씩 살아본 경험과
미국으로 여행을 가 본 경험에 비추어,
우리나라의 서비스직은 상대적으로 많은 감정노동을 필요로 한다.
내가 경험한 캐셔 업무를 일례로 들면,
독일에서 캐셔들은 정확하게 계산만 한다. 그 외의 친절함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캐셔들은 상대적으로 친절함을 강요받는다고 느꼈다.
좀 더 친절한 말투와 좀 더 환한 미소로 계산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존재한다고나 할까?
(물론 개인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나 역시 소비자로서 좀 더 친절한 직원에게 서비스를 받는 것이 더 기분이 좋겠지만
이것이 꼭 당연한 것은 아니다.(물론 돈을 더 내고 고급 서비스를 받는 경우는 다르겠지만)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
특히 서비스 직군에는 친절함에 대한 요구가 당연하게 여겨질 때가 많다.
소비자의 만족을 높여 선택을 받아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해달라고 직원들을 교육할 수 있지만,
근로계약 대상은 친절한 서비스가 아닌 서비스 제공 자체다.
이 세상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일 때가 많다.
이게 정말 당연한 것일까?라고 의식적으로 의심하는 노력을 하는 중인데,
나 역시 지불되지 않은 친절함을 당연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또, 한국을 경험한 외국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이게 왜 당연한 것이 아닌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나의 독일, 네덜란드, 멕시코, 영국, 중국, 스페인 친구들이
한국/한국 사람에게서 느낀 가장 큰 인상은 "(본인 나라에 비해 과한) 친절함"이었다.)
친절. 어떻게 보면 한국의 좋은 문화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친절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일방향의 친절은 갑질이라는 한국의 특이하고 비권장적인 문화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쌍방향의 친절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좋은 문화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상, 유통업 종사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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