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세모와 베짱이
사흘째 흐린 LA에서 어쩐지 센치한 마음으로 편지를 써. 비가 오니까 여기서 첫 출근을 하던 날이 생각나더라. 아직 어느 무엇도 익숙하지 않은 아침, 비는 내리고 내가 한국에서 가지고 온 옷들은 터무니없이 얇고. 덜덜 떨면서 조금 일찍 회사에 도착해 길거리를 서성이던 게 생각나. 이 도시의 제일 큰 장점은 날씨가 좋다는 건데, 삼 일째 날이 흐리니 나도 LA도 어쩐지 축 처지는 것만 같아.
오늘은 회사에 사람이 많이 없었어. 비는 내리고 조용하니, 저절로 생각이 무수히 뻗어나가더라고.
내 첫 번째 꿈은 ‘세모’였어. 사실 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네 살쯤, 이모가 물어보는 질문에 저런 대답을 했다고 하더라고. 다섯 살 때는 베짱이가 되고 싶다고 했대. 동그라미나 네모가 아니라 세모, 개미가 아니라 베짱이. 그런 대답을 미루어봤을 때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 다르고 싶었던 것 같아. 나는 아주 오래 ‘남들과 다른 것’에 집착하는 사람이었어. 지금도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다들 듣는 음악, 다들 가는 장소를 가는 건 멋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
하여간 이 남들과 다른 것에 집착하는 사람 중에는 예술가가 많은 것 같아. 그게 나 같은 디자이너든, 화가든, 작가든.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예술이라는 것에 특이한 가치를 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 남들과 다르게 표현해야 하니까. 사실 이제는 남들과 완전히 다르기는 쉽지 않아서, 어느 순간 남들과 다른 게 곧 파격적인 부도덕으로 치환되는 세상이 온 것만 같아. 유명한 전시를 보러 가면 기분이 안 좋아지고, 요즘 유행한다는 드라마를 보면 어쩐지 마음이 찝찝해. 그런 파격과 논란이 주류가 된 세상에서 나는 또 남들과 다르게 좋은 사람이 되어보려고 해.
한국에서 마음이 참 힘들던 날 누군가가 나에게 길을 물어본 적이 있어. 내가 살던 동네는 ‘도를 믿으세요’가 많은 곳이라 보통 길을 물어보면 무시하고 지나치기 일쑤였거든. 그날은 기분이 안 좋았고, 기운이 없었고, 그래서 평소와 달랐던 나는 친절히 길을 알려드렸어. 그분은 길거리에서 길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의례 그렇듯 내 대답을 듣고 쌩하니 사라졌어. 그렇게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데 마음이 가볍더라고. 내가 어느 누구도 모르는 선행을 하나 베풀었다는게 뿌듯하더라고. 나는 이 지구상에 작은 점 같은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작은, 좋은, 점이라는 게 좋았어.
그 이후로 나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세모가, 베짱이가 된 거야. 편의점에 들어가 인사라도 한마디 건네고 대중교통에서 자리를 비켜주고 힘든 친구에게 커피 한잔을 대접하고. 그런 내가 쌓일수록 내 마음도 힘들지가 않았어. 저번 편지에도 말했지만 스스로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참 많은 문제의 해결책이 되어주는 것 같아.
그런데 나는 요즘 부쩍 ‘좋은 사람인 나’에 회의를 느끼는 날이 많아졌어. 남들에게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는 작은 잘못들이 늘어가고 그걸 멈추지도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하는 시간이 길어져서.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알려주고, 가게에 들어가 친절한 안부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짐이 그렇게 쉽게 덜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한편으로는 안심하기도 해. 나는 내 잘못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사람이구나. 우리가 항상 이야기하던 타성에 젖은 어른이 되지 않았구나 하고. 그래도 가끔은 이런 사람이 아니고 싶어. 내가 하고 싶은 말과 하고 싶은 행동들을 다 했다면, 내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토록 마음이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날씨 탓이라고 생각하고 훌훌 털어 내볼게. 벌써 부치지 못하는 편지가 두 통째지만, 나는 오빠에게 보냈던 두번째 편지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수신인 없는 편지 덕분에 마음이 가벼워. 오히려 닿지 못하니 느껴지는 이 씁쓸함과 자유로움이 좋은 것 같기도 해. 짧은 2주간의 내 대나무숲이 되어줘서 고마워. 사람이 난 자리는 항상 티가 나기 마련이라 남은 사람들에겐 그게 더 오롯이 느껴지기 마련이라. 어쩌면 두 배가, 네 배가, 아니 열 배의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 그곳의 날씨는 늘 맑았으면 좋겠다. 이런 고민은 오롯이 내가 가지고 있을게.
여전히 쓸쓸한 나성에서, 소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