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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Nov 03. 2020

친척들과 함께 한 두 번째 결혼식

모든 게 엄마 때문이야


나의 엄마는 이남 육 녀 중에서 넘버 투이다. 그래서 나는 이모들이 다섯 명에 외삼촌이 한 분 계신다.(안타깝게도 큰 외삼촌은 일찍 돌아가셨다.)


나의 아빠는 삼남 이녀 중에서 넘버 투이다. 하지만 위에 누나가 계셔서 아빠는 장남이시다. 이렇게만 보면 엄마네 가족이 아빠네 가족보다 수적으로 우세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어릴 적에 시골에 가면 할아버지 댁과 할아버지의 형님댁인 큰집이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어서 큰 집과 우리 집은 모든 행사며 제사를 함께 지냈기 때문에 큰 집 친척들까지 하면 수가 확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두 분의 고모와 두 분의 삼촌 이외에 큰 집에 계신 삼촌과 고모들 그리고 사촌들이 있어서 아주 풍성하고 즐거운 유년시절을 보내었다.


하지만 이십 대가 되어 외국에 가서 살게 되면서 친척들과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고 서울에 살 때에도 명절 때에 나는 주로 휴가를 내고 여행을 다니느라 친척들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더랬다. 그러다 보니 친척들의 소식은 엄마를 통해서 듣거나 가끔 결혼식이나 다른 집안 행사에서 뵙는 게 다였다. 그러다가 이년 전 나의 결혼식을 통해서 우리 가족들(친척들)을 재발견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결혼식장이 서울 도봉구 도봉산 아래에 위치한 야외 가든으로 결정이 되었고 그곳에 친척들을 모두 초대하려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대형 버스를 준비해서 친가와 외가 친척들을 모시면 되지만 결혼식 시작이 오후 5시여서 식이 끝나고 대구로 돌아가시면 도착 시간이 너무 늦어질 것 같았다. 게다가 그곳으로 오는 길은 토요일 오후에 교통 체증이 아주 심해서 친척들이 결혼식장에 도착하시기도 전에 기진맥진하실 것 같았다.


엄마는 그런 걱정을 하는 내 마음을 족집게처럼 읽으셨는지 어느 날 전화를 하셔서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린다야,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아무래도 대구 친척들이 서울 결혼식에 가는 거는 좀 힘들 거 같제? 니 혼자 결혼식 준비하는데 이것저것 신경 쓸라면 부담스럽게도 하고. 그자?”


“응, 좀 그렇긴 하네 엄마. 예식장이 산 아래에 있는데 거기 가는 길이 하나뿐이고 토요일 오후에는 그 길에 차가 엄청 막혀서 사실 그게 젤 걱정이다. 그리고 나는 식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파티 형식으로 할 거라 결혼식 마치고 대구 올라가시면 너무 늦으실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말인데, 서울에서 결혼식 하고 그다음 주에 너거가 대구에 내려와서 친척들이랑 같이 밥 먹으면서 인사하면 어떻겠노? 그라면 친척들이 굳이 힘들게 서울까지 안 가도 되고 니도 신경 덜 쓰일 거고.”


“우와 엄마, 진짜 좋은 생각이네. 나도 그라면 좋지.”


“오야, 그라면 니는 신경 쓰지 말고 서울 결혼식 잘 준비해라. 대구에서 친척들이랑 하는 건 내가 일아서 할 테니까.”


“알겠다 엄마, 너무 고맙데이!”


그렇게 엄마의 제안대로 서울 결혼식은 내가, 대구 결혼식은 엄마가 준비하시는 걸로 역할분담을 하였다.






서울에서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으며 성황리에 결혼식을 잘 마쳤고 그다음 주 토요일에 남편과 함께 대구행 KTX에 몸을 실었다. 한복이랑 소품들은 엄마가 미리 다 챙겨가셔서 우리는 우리 소지품만 챙겨가면 되었다.


대구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가 차려주시는 진수성찬에 배가 금세 든든해졌다. 엄마는 내가 대구에 도착하면 항상 갈치구이와 된장찌개를 준비해 놓으셨는데 사위가 와서인지 원래도 푸짐한 식탁이 더 푸짐해졌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엄마가 차려주신 밥을 아주 맛있게 잘 먹는 남편을 보며 엄마도 몹시 기뻐하셨다.


“어머니, 너무 맛있어요!” 한 마디에 엄마는 자지러지듯 웃으셨고 밥을 또 한 그릇 가득 담아서 이제 갓 일주일 된 사위에게 대령하셨다. 쿠바에서는 고기반찬이 하나만 올라와도 감지덕지인데 엄마의 밥상에는 육해공군이(공군은 아닌 듯, 아무튼) 골고루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 쿠바 사위 눈이 휘둥그레 지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결국 한국에 있는 동안 남편은 10킬로가 넘게 살이 쪘는데 아마 대구에서 가장 많이 찐 듯하다.)


그렇게 배를 불리고 편히 쉬면서 토요일을 보낸 후 친척들을 만나기로 한 일요일이 되었다. 엄마는 아빠 옷부터 봐주시고는 나와 남편이 한복을 입는 걸 도와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엄마 한복을 입으셨다. 엄마라는 존재는 늘 가족들부터 챙기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자신을 돌보는 것 같아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우리는 오빠들의 차에 나눠 타고 엄마가 예약해두신 한정식집으로 출동을 했다. 위치 좋은 곳에 있는 널찍한 한정식집이었다. 엄마는 가장 큰 방으로 해서 45인분의 코스요리를 예약해 두셨다고 하셨다.


잠시 후가 되자 이모들, 고모들, 숙모들, 삼촌들, 이종사촌 동생들과 사촌오빠, 육촌 언니 등 다양한 친척들이 도착을 하였다. 다 들 오랜만에 보는 자리였다. 친가와 외가 식구들을 함께 초대한 자리여서 혼란이 없도록 다들 엄마가 안내해주신 자리에 앉으셔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시기 시작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어 내가 먼저 결혼식 식사자리에 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남편도 간단하게 한국말과 스페인어를 섞어서 인사를 하였다. 물론 스페인어는 내가 통역을 하였고. 친척들 모두 활짝 웃으시며 우리의 결혼과 앞으로의 미래를 위한 축하를 많은 박수로 보내주셨다.


나는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적부터 대구에 살았더랬다. 게다가 할머니 댁도 대구였고 대부분 친척들도 대구에 살고 계셨다. 대구는 대한민국에서 보수로 유명한 곳이라 나의 친척들도 어느 정도 보수적일 거라고 생각을 했고 까만 조단에 대해서 약간의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겠다며 살짝 걱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웬걸, 나의 친척들은 그런 보수적인 분들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어린 친구들보다 훨씬 더 열린 사고를 가지고 계시다는 걸 알게 되어 깜짝 놀라 버렸다.


친척들에게도 생소한 쿠바라는 나라에서 온 이 까맣고 커다란 남자가 나보다 열네 살 연하라는 것에 대해서 다들 알고 계시는지 모르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거에 아랑곳하지 않고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모두들 조단이가 우리 가족이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해 주셨다. 내가 혼자 외국에 살기도 하고 여행도 많이 다녀서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놀라지 않으셨겠지만 흑인 혹은 유색인종에 대해서 관대하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반겨주시는 것에 대해서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애교가 많으신 이모부 한분은 조단이를 안고 뽀뽀를 하시기도 했고 다 들 신랑 인상이 참 좋다며 손을 한 번씩 잡으시고는 잘 살라고 많은 축복을 해 주셨다. 여든이 다 되신 큰고모는 이제라도 늙은 조카가 결혼을 하게 된 게 너무 감격스러우셨는지 눈물을 보이시기도 하셨다. 우리는 그렇게 몇 시간을 친척들과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주 흥겨웠던지라 예약했던 시간이 넘어서야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있었다.


그날 나는 우리 가족들(친척들)에게 아주 큰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가족들은 글로벌 시대에 맞게 열린 사고를 가지고 계셨고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세계는 하나라는 걸 전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계셨다. 모두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작은 섬나라인(남한과 면적 비슷) 쿠바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고 나중에 린다 덕분에 쿠바를 가보는 거 아니냐며  빈말이라도 아주 기분 좋게 해 주셨다.






이 모든 게 엄마 때문이었다. 만약에 친척들이 서울에서 한 결혼식에 오셨더라면 나의 지인들을 챙기느라 친척들과 일일이 이야기를 하기도 힘들었을 테고 이렇게 열린 사고를 가진 줄도, 조단이를 이렇게 환영해주실 줄도 몰랐을 테다. 하지만 엄마의 제안으로 서울과 대구에서 두 번의 결혼식을 따로 하면서 가족들과 더 가까워지고 행복한 추억을 공유할 수가 있게 되어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역시 엄마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더니 그 말이 정답이었다. 어릴 때에는 엄마 말이라면 일단 안 듣고 봤는데 나도 이제 나이가 꽤나 들었고 결혼까지 하고 나니 철도 조금씩 들어가나보다.


아, 그런데 그날 한 가지 아쉬움이 남았버렸다. 바로 너무 서로에게 집중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친척들과 사진을 못 찍은 것이었다. 어른들이 대부분이었던 그 자리에서 그나마 어렸던 꽃다운 이종사촌 동생들이 언니랑 형부랑 꼬옥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몇 장 찍은 게 유일한 사진이었다.


아빠 넥타이 매어 주시는 엄마, 그 옆에서 구경하는 햇사위 / 넘나 이쁘고 똑똑하고 사랑스런 똑순이 이종사촌 동생


오늘처럼 파도가 높고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날에는 이 사진을 보며 그 날을 추억해 봐야지. 그리고 따뜻한 차 한잔 마시며 나의 열린 가족들의 따스한 온기도 느껴보아야겠다.


(언젠가 쿠바에서의 결혼식 1과 2도 써 보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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