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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Sep 08. 2019

나는 왜 쿠바에 집을 샀을까?-1

사서 고생하는 나란 사람...

회사를 퇴사하고 난 후 지인들로부터 많이 들은 얘기가 있다.


“언니, 얼굴에 독기가 사라졌어요!”

“린다 얼굴이 참 편안해 보이네!”


일을 하면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때문에 회사에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인정을 받은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나는 늘 긴장상태를 유지하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긴장상태는 회사에서만 유지를 하고 퇴근 후에는 벗어나려고 노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절 능력 부족인지 퇴근 후 또는 주말에 친구들을 만나면 이미 내 안에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던, 나만 인정하지 않았던 긴장감이 남들 눈에는 너무나도 잘 보였던 것이다.


여러 번 같은 얘기를 듣게 되자 ‘내가 그동안 그렇게 날카로웠나?’ 하고 스스로 자문을 구해 보았지만 늘 그렇게 살아왔던 내가 그럴 알리가 없을 테지.. 훗.


마치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리고 누가 보면 내가 사장인 양 죽도록 일을 하다가 어느 날 돌연히 퇴사를 했다. 퇴사 전에 나는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 운명처럼 쏘울 메이트인 내 반쪽을 만났고 퇴사 후 나는 그와 여행을 했고 그리고 결혼을 했다. 물론 독기라고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편안한 얼굴로 말이다. 마치 새 사람이 된 듯.






20대 때 내 삶의 모토는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였다. 그래서 난 정말로 사서 고생을 많이 했다.


엄마는 원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비슷한 조건의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엄마랑 가까운 곳에서 살기를. 그런데 그러한 삶은 나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는 걸 일찍 깨닫고 이십 대의 어느 날 엄마에게 이렇게 얘기를 했다.


“엄마, 만약에 엄마가 내가 죽을 때까지 평생 내 옆에 같이 있으면서 나를 도와줄 수 있으면 엄마가 원하는 대로 엄마 옆에서 살게. 근데 내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건 불가능한 것 같으니까 지금부터 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나를 좀 놓아줘.”


그리고 나는  다른 20대의 어느  멕시코로 떠났다. 대구공항 바닥에 앉아 대성통곡을 하는 엄마를 뒤로 하고 입술을 꼬옥 깨물고 있다가 비행기에 타자마자 엄마만큼은 아니지만 소리 죽여 아주 많이 울었더랬다.



그렇게 나의 홀로서기가 시작되었다.



나의 첫 해외 살이었던 멕시코에서 공부를 하고 여행을 하다 보니 금세 일 년이 지났다.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엄마의 부탁을 뿌리치고 나는 짐을 챙겨 또 다른 새로운 나라, 미국으로 날아갔다. 멕시코보다 더 큰 나라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돈 한 푼 없이 아무 계획도 없이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보스턴에서 제일 큰 한식당을 찾아갔고 그다음 날부터 하루에 12시간씩 몇 달 동안 일하다 보니 돈이 제법 모였다. 그 돈으로 공부를 했고 시간이 지나자 합법적으로 일도 하게 되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국땅에서 홀로서기를 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고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일들도 여러 번 겪었지만 ‘난 20대니까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독거려가면서 열정적으로 열심히 내 20대를 한껏 즐겼다.






6년간의 외국생활을 접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계획을 한 건 아니었고 그냥 떠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국에 와서 주위를 돌아보니 친구들 중 몇몇은 엄마가 되어 있었고 다른 친구들은 회사를 다니며 열심히 돈을 벌고 있었다. 더 이상 20대가 아니었던 나는 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30대에는 커리어 경력을 쌓고 돈을 제대로 벌어봐야겠다고 말이다.



돈을 벌려면 서울을 가야지!




그래서 무작정 서울에 올라왔다. 일단 서울에서 살 집부터 구해야 했다. 그런데 그동안 벌었던 돈은 대부분 내가 가장 사랑했던 ‘여행’을 하면서 거의 다 써 버려서 정작 내 주머니에는 만져지는 돈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해방촌 오거리에서 보성여고 저 안쪽으로 택시도 안 들어가는 좁은 골목에 위치한 전세 천오백만 원짜리 세 평짜리 옥탑방에서 서울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시작은 미약하나 심히 창대하리라!’

난 기독교는 아니지만 이 말씀을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살다 보니 옥탑방에서 원룸으로 옮기게 되었고 결국은 오피스텔을 거쳐 아파트까지 차근차근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주 다이나믹하고 치열하게 살았고 치열하고 독하게 노력한 만큼 일에 대한 전문성도 그리고 경제적인 여유도 조금씩 늘어갔다. 그리고 그것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나는 미련 없이 내 발로 회사를 나왔다. 그룹의 이념과 나의 이념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 내 사직서에 적힌 퇴사 이유이다. 그룹 CEO가 바뀌면서 모든 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결혼을 하기 전에 그와 내가 어디에서 살면 좋을지 잠시 고민을 했더랬다. 그리고 결정했다. 한국과 아주 멀리 떨어진 쿠바에서 살기로.


쿠바는 이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 중 한 나라여서 경제적으로 아주 힘들고 1959년 혁명 이후 시간이 멈춰 버려 인프라가 구축이 안 된 많은 게 열악하고 부족한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적 감성 때문인지, 내 사랑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 관심이 간 건지, 아직 한국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내가 무언가를 선구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곳으로 결정했다. 한동안 편하게 살면서 잊고 지냈던 도전의식과 일종의 호기심을 품은 모험심이 스믈 스믈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쿠바인인 남편이 친구들에게 우리가 쿠바에서 살 거라는 얘기를 했을 때 모든 친구들의 반응이, “왜?””도대체 왜 쿠바에서 사냐고? 제정신 맞아?”이랬다고 한다. 그때는 몰랐다. 왜 친구들이 모두 우리 보고 미쳤다고 하는지. 더욱이 나는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는 걸 해야 잘 된다며(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내 의지를 굽히지 않고 그동안 내가 쏟아부었던 애정이 가득한 서울 생활을 입술이 터지고 몸살이 날 정도로 아주 힘들게 모두 다 정리하고는 쿠바에 왔다.


와서 겪어보니 쿠바라는 나라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환경이 열악했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쿠바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되면서 점점 이 곳에 사는 게 겁이 나기 시작했다. 20대 때 내가 가졌던 도전의식과 모험심이 이제는 적용이 안 되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삶을 살았고 나도 많이 변한 모양이었다.


쿠바에 도착한 지 2개월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을 붙잡고 여기 못 살겠다고 대성통곡을 했다. 내가 엉엉 울자 남편은 어쩔 줄을 몰라하며 내가 힘든 건 못 보겠다며 너무 힘들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그 와중에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아닌 거 같고 제3 국으로 가는 걸 고려해보자고 했다.


시간이 약인지라 하루하루 지나다 보니 힘들고 불편한 것들도 조금씩 적응이 되고 무섭다고 생각한 것들도 무뎌지면서 ‘아, 이제 여기에 살아도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집을 사야겠다.’라고 마음을 먹었다.


쿠바에서는 외국인이 집을 살 수가 없고 쿠바인과 영주권이 있는 외국인만 집을 살 수가 있기 때문에 집값이 꽤나 저렴한데 비해 렌트비는 비싼 편이다. 그래서 앞으로 이 곳에서 살려면 집을 사는 게 경제적으로 훨씬 이득이라 우리 둘이 오손도손 살 만한 작은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남편이 심각하게 말했다.


“자기야, 내가 생각해봤는데 우리가 현명하게 집을 봐야 할 거 같아. 자기가 외국인이라 집을 보러 같이 가면 집주인들이 집 값을 올릴 거야. 그러니까 일단 나 혼자 가서 집을 보고 괜찮은 집은 사진을 찍어올게. 그럼 자기가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들면 혼자 가서 보고 와. 그리고 실제로 보고도 마음에 들면 그때 내가 집주인이랑 네고를 할게.”


“엥? 그게 뭐야? 꼭 그렇게 해야 해? 나도 같이 가면 안돼?”


“자기야, 내 말을 좀 들어줘! 여기는 쿠바야. 우리가 돈을 조금이라도 절약하고 계약을 잘하려면 이렇게 해야 해.”


한국에서도 외국인을 상대로 가격을 덤탱이 씌우거나 사기 치는 경우가 있고 다른 많은 나라들에도 그러한 경우가 많지만 이 곳 쿠바에서는 외국인=호구라는 게 거의 공식처럼 적용이 되는 나라여서 실제로 외국인들끼리만 가면 800 쿡 했던 금액이 1,800 쿡으로 뛰어버리기도 한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남편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남편은 그 날부터 매일같이 땡볕에 나가 집을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5개월 동안 250개 이상의 집을 보았다. 올해가 아바나 건국 500주년인 만큼 올드 아바나에는 몇 백 년 된 다 쓰러져가는 건물부터 아무리 새 건물이라고 해도 대부분 1959년 혁명 전에 지어진 낡은 건물들이라 문제없는 제대로 된 집을 찾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집 내부가 마음에 들면 천정이 이상하거나 건물 자체에 문제가 있고, 건물이 좀 튼튼해 보일라치면 집 내부가 아주 낡아서 수리비가 집 값보다 더 나올 것 같은 집들이 아주 많았다. ‘어떻게 이런 집을 이 금액에 판다고 내놓을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드는 마치 홍콩 르느와르 영화에 나오는 뒷골목 세트장 같은 집도 보았고, 방은 2층에 있는데 화장실은 1층에 있고, 2층 천정이 낮아서 키가 큰 남편이 허리를 펴기 힘든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는 집들도 여럿 있었다.


저렴한 금액에 내 마음에 드는 집이라 계약을 하려고 했는데 집주인들이 이사 갈 데가 없어서 기다리다가 포기한 적도 있었고, 또 어떤 집은 계약 직전에 집주인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가격을 올려서 파투가 나기도 했고 모든 게 그나마 좀 괜찮다 싶으면 시장 금액보다 비싸서 뒤돌아 선 집들도 여럿 있었다.


한 집은 계약하기로 결정을 해서 변호사에게 집주인 서류 검토를 의뢰해서 확인해보니 명의 상 문제가 있어서 파투가 났었다. 그 문제란, 부모가 자녀에게 집을 증여한 후 자녀가 집을 팔 경우, 증여받은 시점으로부터 5년이 지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집은 아직 증여받은 지 5년이 넘지 않아서 그걸 모르는 상태로 계약했다가 그의 어머니가 클레임을 걸면 그 계약은 무산이 될 수도 있는 거였다. 먹고살기도 빠듯한 이 나라에서 어찌 이런 법들을 다 알까 싶기도 하면서도 알고도 우리를 속이려고 한 것 같아 괘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제대로 된 아니 그냥 기본적으로 살만한 집을 구하는 게 이렇게 힘든 건가?’


날은 점점 더 더워져 갔고 남편도 나도 조금씩 지쳐가면서 신경이 예민해져 갔다. ‘아 그냥 렌트하면서 살까?’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그 마음은 곧 접었다. 이왕 시작했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은 봐야 하지 않은가?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아주 괜찮은 집을 찾았다고 했다.


아... 드디어 서광이 비추기 시작하는 건가?



이번 시리즈는 현재 진행 중인 일에 대해서 쓰는 건데 ‘쿠바에 살아요’와 알게 모르게 겹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려요!


쿠바에서는 집을 파는 방법들 - Se vende(집 팔아요) 라고 집에 표기를 하던가 인터넷 사이트 Revolico 에 광고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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