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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Oct 10. 2021

쿠바에서는 처음 만난 날을 매 달 기념해?


2017년 11월 10일이었다. 퇴근을 하고 약속이 있어 급하게 전철역을 뛰어내려 가는데 휴대폰 진동이 마구 울려대었다.


"바빠 죽겠는데 누구야?" 하면서 휴대폰을 슬쩍 보니 조단(남편)이었다. 당시 쿠바는 인터넷 공원에서 인터넷 카드로만 국제전화를 할 수 있을 때라 내가 다시 해야지, 하면서 걸려오는 전화를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조단이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을 수가 없기에 일단 그 전화는 받아야 했다. 뛰면서 전화를 받았다. 와츠앱(WhatsApp) 애플리케이션으로 온 전화라 화상통화였다. 쿠바와 한국의 시차는 13시간. 그곳은 아직 새벽이었다. 사람이 많을 때에는 인터넷 연결이 잘 안 되니 조단은 늘 새벽이나 늦은 밤에 인터넷 공원에 가서 전화를 했다.


어둠 속에서 하얀 이가 보였고. 나를 보더니 좋아서 활짝 웃고 있는 그였다. 나도 활짝 웃어주었지만 대화를 많이 나눌 수가 없었다.


"나 지금 전철역이라 통화를 오래 못해. 지금 전철 타야 하거든."

"아, 알겠어. 축하합니다 자기!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

"응?"


내 생일은 확실히 아니었고 자신의 생일에 전화해서 나에게 축하한다고 할 일은 없을 텐데, 오늘이 대체 무슨 날이지? 복잡한 머릿속이라 상상할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물어보았다.


"오늘이 무슨 날인데?"

"오늘 우리가 만난 지 한 달이 되는 날이야. 축하합니다 자기!"

"아... 그래...? 우리가 언제 만났는데?"

"10월 10일에 만났잖아."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나의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을 하는 그였다. 우리가 언제 만났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했다. 출국 34시간 전에 우연히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낸 착한 남자였던 그가 내 운명의 남자라는 걸 당시에는 알지 못했으니. 그래서 그와 만난 날짜조차 기억하지 못했는데 조단이 그걸 알려주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만난 날이 10월 10일이라는 것을. 날짜는 아주 맘에 들었다. 여고 시절 한 반 친구의 생일이 그날이라 선명히 기억했다. 쌍십일!


'그런데 한 달 기념은 뭐지? 쿠바에서는 만남을 매 달 기념하나? 신기하네...'


전철을 타고는 통화가 불가능했기에 전화를 끊었다. 곧장 내 머릿속에서는 다른 생각의 창이 열렸고 조단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한 달이 지났다. 그는 또 전화를 해서 축하한다고 했다. 날짜를 보니 12월 10일이었다. 또 신기했다. 만난 날 기념을 매 달 한다는 게.


내가 물어보았다.


"자기, 쿠바에서는 처음 만난 날을 매 달 기념해?"


그렇지 않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냥 조단이 그러는 거였다. 아마도 그는 내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 매 달 맞이하는 10일이 자신에게는 소중한 날이었고 나에게 그날을 축하해주면서 우리 만남의 의미를 상기시키려는 고도의 작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조단의 성격상 그저 좋아서 하는 거지 작전까지 짜면서 하는 건 아니었겠지만 내가 탐정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한 달 기념일은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도 남들처럼 일 년 단위로 기념한다. 나는 조단에게 근사한 프러포즈를 받아본 적도, 값나가는 선물을 받아본 적도 없다. 자신도 남자인데 남들처럼 근사하게 반짝이는 다이아반지를 주며 프러포즈도 하고 싶었을 테고 기념일에 멋진 명품도 선물하고 싶겠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밖에. 그리고 나는 그가 기념일 아침에 나가서 사 오는 꽃 한 송이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기에 그걸로 충분하다.


지금까지도 내가 남편에게 받은 최고의 선물은 한국에 살 때 혼자 동네 뒷산에 운동하러 갔다가 주워온 솔방울과 강원도 어느 냇가에서 주워온 반짝이는 돌이다. 물론 쿠바에서 받은 계란이랑 감자도 잊을 수 없는 선물이다. 내가 멕시코에서 장 보고 돌아온 날 남편은 한 봉지의 감자와 세 송이의 장미꽃으로 자신의 사랑을 전했다. 그리고 즉석에서 감자튀김을 해 주었다. 어찌나 맛있던지!

멕시코에서 돌아 온 환영 선물인 감자와 조단표 감자튀김

오늘은 10월 10일. 남편이랑 함께 있었으면 오늘도 아침 일찍 어디 좀 다녀온다며 나갔을 텐데. 그리고 나는 모른 척하며 "응 어디가? 잘 다녀와!"라고 했을 테다. 꽃을 사러 가는 걸 다 알고 있지만 이런 건 모른 체해 줘야 하니까. 그리고 꽃 한 송이를 사서 돌아와 "자기, 축하합니다!"라고 말하면 내가 활짝 웃으며 "자기, 꽃이 너무 예뻐!"라고 말해주어야 한다는 것도 안다. 반응이 별로면 남편이 실망하니까. 그런데 오늘은 남편이 없으니까 그저 상상만 해 볼 수밖에. 이따 남편이 전화 오면 말하겠지.


"자기, 축하합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지난 4년 동안 함께하며 많은 추억이 쌓였고 앞으로 더 많은 추억이 쌓일 테다. 그리고 언젠가 남편이 작고 반짝이는 걸 선물하는 날이 오겠지?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온다면 감개무량하여 아마 기절할지도. 내가 속물이라기보다는 남편의 능력이 그만큼 생겼다는 뜻이 될 테니까.


그런 날이 살아생전 올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셀레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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