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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Oct 08. 2021

남편의 첫눈은 가짜였다


겨울 나라에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남편은 눈을 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그건 남편뿐만 아니라 여름 나라에 사는 모든 이들의 바람이기도 할 테다. 그런 남편이 한국에 왔다.


"자기, 한국은 추워?"

"응, 겨울에는 엄청 추워. 너무 추워서 온 세상이 꽁꽁 얼어버려. 자기도 경험하면 깜짝 놀랄 거야."

"우와..., 그럼 겨울에 눈도 와?"

"그럼, 눈도 오지. 도시마다 좀 다르긴 한데 내 고향은 남쪽이라 많이 오진 않고 서울이나 북쪽에는 많이 와."


내 말에 남편은 얼굴이 환해지며 그 장면을 상상하는 듯했다. 남편의 비자는 6개월이었고 여름이 시작하는 6월 초에 한국에 도착한 남편은 11월 말에 나와 함께 쿠바로 돌아가기로 했다. 남편이 또 물어보았다.


"자기, 11월에 눈이 와?"

"11월? 아... 보통 눈은 12월이나 1월, 2월에 오는데..."


나의 대답에 남편은 실망한 듯했다. 한국에 면 눈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눈을 못 본채로 쿠바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몹시나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쿠바로 가기 전에 눈을 한 번 만이라고 봤으면 하는 남편이 자꾸만 밟혀서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눈을 어디서 볼 수 있을까? 아 맞다, 스키장이 있지!'


스키장 개장을 확인해 보았다. 한국에서의 출국이 11월 30일로 정해졌고 제발 그전에 개장하는 곳이 있기를 하는 바람이었는데 다행히도 있었다. 오래전에 스키를 한 번 타 보았지만 너무 무서웠던지라 스키장은 나에게 그저 휴식의 공간이었다. 눈은 언제나 보아도 예쁘니까 친구들이 스키를 타고 스노보드를 탈 때 나는 카페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시며 하얀 세상을 구경하였다. 잘 타는 사람들을 보면 멋지고 부럽기도 하지만 나는 커다란 도구를 가지고 하는 운동은 무서워서 일단 피하고 보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저 눈썰매가 딱 좋았다.


그리하여 출국 삼일 전에 우리는 용평 리조트에 갔다. 나는 용평이 그렇게 크고 다양한 숙박시설이 있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적당한 숙소에 예약을 하였고 깔끔하니 괜찮았다. 숙소 창 밖 멀리에 하얀색의 슬로프가 보였다.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평일이었기에 사람들이 별로 없어 한적하니 좋았다.


"우와!!" 남편이 흥분했다. 처음으로 보는 하얀 세상이었다. 진짜든 가짜든 중요하지 않았다. 짐을 놓아두고 눈을 직접 보러 가기로 했다. 남편은 자신의 하나뿐인 아주 두꺼운 검은색 패딩을 입고 있었다. 남편이 가져가지 않겠다고 하는 패딩을 시어머니가 혹시 모르니 꼭 챙겨가야 한다며 넣어주신 거였다. 역시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하는 걸까! 그 패딩은 남편의 옛 애인인 스위스에 사는 그녀가 선물해 준 거라고 했다. 아마도 함께 스위스에 가려고 했던 마음에 사 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 고마우면서도 짠한 마음이 들었다.


눈을 밟았다. 어릴 때부터 진짜 눈을 보며 자란 나에게 스키를 타기 위해서 만들어진 가짜 눈은 별 감동이 없었지만 남편에게는 이 하얀 세상이 그저 신기하고 꿈같았을 테다. 몇몇은 스키를 타고 있었다. 남편이 그들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나도 한번 타봤으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용평 리조트에서 남편의 첫 눈

리조트 시설을 구경하던 중 그곳에 케이블카가 있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케이블카는 발왕산 정상까지 가는 거였고 그곳에는 카페가 있다고 적혀 있었다. 가서 따뜻한 커피나 한잔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케이블카를 탔다. 꽤 길었다. 알고 보니 발왕산 케이블카는 왕복 7.4km로 우리나라에서 최대 길이였다. 어쩐지 길더라니! 케이블카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바람이 세어졌고 앞이 보이지 않았다. 케이블카가 흔들거려서 무섭기까지 했다. 우리 둘은 아이들처럼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꼭 붙잡았고 조마조마해하며 정상에 도착했다. 카페는 왼쪽이었고 오른쪽은 발왕산 정상 스카이워크였다. 엄청난 바람 소리와 추위에 덜덜 떨려서 나는 카페로 갈 거라고 했더니 남편은 자신은 산의 정상을 느껴보고 싶다며 오른쪽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러라고 하고는 혼자 카페로 가서 카푸치노를 시켰다.


잠시 후 남편이 돌아왔다.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자기, 이것 좀 봐!"


안개로 둘러싸여 잘 보이지도 않고 바람소리만 쌩쌩하는 정상에서 자신이 뉴스의 리포터 인양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영상이었다. 자기는 추운 게 너무 좋다며 평생 이런 추위를 느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남편이 아이처럼 이 나서 한번 더 다녀오겠다고 했다.  좋아서 흥분하는 모습을 보니 추워서 웅크리고 있던 나도 즐거워졌다. 한참 후에 돌아와서는 시원한 맥주를 마시겠다고 했다. 이얼치얼이었다. 

그 추운날 발왕산 정상에 다녀와서 한잔하는 시원한 맥주

그날의 발왕산 정상이 남편에게는 한국에서 맛보았던 제대로 된 겨울이었다. 눈물이 쏙 나올 만큼 추운 겨울이 되기도 전에 한국을 떠나 버렸으니 말이다. 그런데 쿠바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기대치 않았던 진짜 눈을 보게 되었다. 제대로 된 추위와 함께. 바로 러시아에서!


남편의 비자 문제로 쿠바에 갈 수 있는 항공이 아에로플로트 러시아 항공밖에 없어서 러시아 항공을 타고 쿠바로 갔는데 모스크바에서 일박을 하는 일정이었다. 모스크바도 11월 30일이었지만 이미 그곳은 한겨울이었다. 공항 근처에 숙소를 예약해 두었는데 남편이 붉은 광장을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 택시를 타고 모스크바 시내로 갔다. 그곳에는 눈이 온 흔적이 가득했다. 하얀 진짜 눈이 구석에 쌓여있었고 영하 12도의 추운 날씨였다. 남편은 그곳에서 예상치 못했던 제대로 된 추위에 또다시 흥분했고 그 흥분을 보드카 한잔으로 가라앉혔다.

11월30일의 모스크바는 몹시 추웠다

12월을 맞이하는 모스크바 시내는 황홀할 정도로 화려했다. 10년 전에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이번에 쿠바로 돌아갈 때에도 러시아 항공을 이용할 듯한데 그럴 경우 또다시 모스크바에서 일박을 하는 여정이 될 테다. 하지만 이번에는 겨울을 좋아하는 남편이 없어서 택시를 타고 붉은 광장까지 나가는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남편을 사랑하지만 추위까지 사랑하는 건 나에게 무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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