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쿠바댁 린다 Oct 06. 2021

우리는 하나 아니야?


남편이 한국에 있을 때였다.

주말 저녁이었고 내 친구들과 밥을 먹고 2차로 바에 갔다. 밥 먹을 때도 기분이 좋았고 바에서도 잘 놀던 남편의 낯빛이 갑자기 변했다. 몹시 불편한 기색이었다. 나는 친구들이랑 얘기도 하고 한잔도 하면서 재미있게 놀고 있었는데 남편이 불편해하는 걸 보니 나도 불편해질 것만 같았다. 왜 그런지 물어보았다.


"자기, 저 친구가 나한테 욕했어."

"뭐? 욕 했다고? 설마, 걔 그런 애 아니야."


10년을 넘게 알고 지내던 외국인 친구였다. 그 친구와 둘이서만 만날 정도로 가깝지는 않았어도 그가 누군가에게 욕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기에 남편이 하는 말이 바로 수긍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은 계속 주장했다.


"저 친구가 아까 뭐라고 한 줄 알아?"

"뭐라고 했는데?"

"스페인어로 xxxx라고 했단 말이야."

"아..."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외국어를 배우면 이상한 말부터 배워서 써먹는 경우가 있는데 그 친구가 그랬던 것이었다. 스페인어권이 아닌 그 친구가 스페인어를 어딘가에서 배웠는데 하필이면 그게 이상한 말이었던 것이다. 어린 남자애처럼 그 친구가 그걸 스페인어가 모국어인 남편에게 말을 했고, 남편은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이었다. 나는 별로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냥 웃으며 "자기, M이 농담한 거야. 신경 쓰지 마."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데 남편은 아니었다. 자신을 무시했다며 몹시 기분이 나쁘다고 했다. 남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고 그런 남편을 본 나의 친구들이 걱정하기 시작했다.


"린다, 조단에게 무슨 일 있어?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거 같은데?"


나는 M이 남편에게 이상한 말을 한 걸 이야기했고 친구들도 대수롭지 않게 "아, 농담한 걸 텐데..."라고 나와 같은 생각을 말했다. 오직 남편 한 명만 기분이 나빴다. 모두가 즐거운 자리에서 남편이 계속해서 기분 나쁜 표정으로 앉아있자 나도 기분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바에서 먼저 나왔고 집으로 가는 택시 안은 무언가가 곧 터질 것만 같은 서늘한 분위기였다. 속으로 나는 '이런 농담 하나에도 저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지?'라고 걱정이 되면서도 짜증이 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우리는 서로 기분이 좋지 않았고 나는 친구가 농담을 한 건데 그런 것도 이해 못하냐,며 남편을 나무랐다. 내가 자꾸 친구 편만 들자, 아주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남편이 말했다.


"자기 나 사랑해?"

"응, 사랑하지."

"그러면 우리는 하나 아니야?"


순간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다가 말했다.


"응.... 우리는 하나 맞지..."

"자기는 내가 이렇게 기분이 나쁜데 왜 자꾸 그 친구 편만 들어? 우리는 하난데 내가 기분이 나쁘면 자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아?."


그제야 '맞다, 우리는 하난데 내가 남편의 기분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계속 친구 편만 들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곧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아, 그렇지 자기야. 내가 잘못했네. 미안해. 기분 많이 나빴지?"라고 말하며 왜 그렇게 기분이 나쁜지에 대해서 차분히 물어보니 남편이 설명해주었다.


원래 M이라는 친구는 인기가 많아서 어디를 가든 주목을 받았는데 남편이 나타나자 그동안 그가 받았던 주목이 조단에게로 옮겨가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M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바에서 친구가 우리를 위해서 살사 음악을 틀었고 신이 난 나와 남편이 춤을 추었다. 그랬더니 M의 여자 친구가 M에게 우리도 춤추자고 다가왔는데 춤추는 걸 싫어하는 M은 결사코 추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도 여자 친구가 계속 추자고 하니 짜증이 난 M이 그 화풀이를 남편에게 한 것이었다. 자신이 아는 스페인어 중에 욕이라고 생각된 문장을 남편에게 말했고 그 말을 듣고 남편은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몹시 기분이 나빴던 것이었다.


남편의 설명을 들어보니 충분히 공감이 갔다. 만약에 내가 쿠바에서 남편의 친구들과 바에 놀러 갔는데 한 여자애가 와서 한국말로 기분 나쁜 이야기나 욕을 한다면 그걸 그냥 농담이라고 넘기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아는 한국말이 있는데"라고 말을 하고는 귀엽게 "바보, 멍청이"라고 말을 하는 게 아니고 뜬금없이 나에게 한국말로 욕을 한다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을 테다.


자신의 여자 친구가 자꾸 춤은 추자고 하는데 자기는 춤은 못 추겠고,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춤을 잘 추는 남편에게 가 있으니 M이 질투가 난 것이었다. M이 질투를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질투가 맞았다. 나에게는 귀여운 질투이지만 남편에게는 상당히 기분 나쁜 행위였던 것이다. 남편의 설명을 듣고 내가 진심으로 사과를 하자 그제야 기분이 풀어졌고 우리는 잠자리에 들 수가 있었다.






김연경 선수 때문에 유명해진 '식빵'이라는 단어를 일부 젊은 남자(여자도 포함해야 하나?)들이 자연스레 말하듯이 쿠바에서도 젊은 남자들이 그런 단어를 자연스레 사용한다. 하지만 나는 쿠바에서 사용하는 상스러운 말, 일명 '욕'을 잘 모른다. 남편이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은 나뿐만 아니라 자신의 남자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에도 그런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아서 내가 들을 일이 거의 없었다. 내가 그런 단어를 알게 된 건 오히려 몇몇의 한국인들을 통해서였다.


이 사건을 통해서 나를 한번 돌아보았다. 만약에 쿠바에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으면 남편은 곧바로 내 편을 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나를 꼭 안고는 "기분 많이 나빴어? 하며 토닥토닥했을 테다. 비록 자신의 친구가 질투가 아닌 실수로 나에게 그런 말을 했더라도 나를 먼저 이해하려고 했을 텐데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친구 편을 들었으니 남편이 얼마나 속상했을까? 많이 반성했다.


영혼이 맑은 남편은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예민하기는 하지만 이유 없이 그러지는 않는다. 그러니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때는 먼저 남편의 편을 들어주고 나서 천천히 이유를 물어봐야겠다.


우리는 하나이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