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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Aug 06. 2022

잘 자라줘서 고마워

나의 결혼식 한쪽에서 작은 동창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와 꾸준히 연락하고 지내던 친구들을 통해 소식을 듣고는 대학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까지 내 결혼식에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21년 만이었다 그렇게 우리들이 다시 모인 게. 45살에 결혼한 내 덕분이라며 친구들이 고맙다고 했다. 그 후 나는 쿠바로 보금자리를 옮겼지만 내 결혼을 통해 다시 만난 우리는 온라인상에서 간간히 연락을 하고 지냈다. 그리고 이번에 대구에서 친구가 올라오면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원래는 10명이었는데, 건강상의 이유(본인 및 가족들)로 갑자기 여럿이 못 오게 되어 최종 모임 인원은 5명이었다. 그렇게 우린 금요일 저녁에 다시 만났고, 시작은 해방촌닭이었다. 친구들이 놀러 와 오랜만에 방문한 해방촌닭은 살짝 더웠다. 하지만 마늘한방통닭은 늘처럼 맛났다. 몇 년 만에 만난 탓에 먹는 것보다는 서로의 소식에 열중하느라 다섯 명이 메뉴 2개를 완벽히 끝내지는 못했다. 아마도 서비스로 주신 닭죽으로 미리 배를 채워서 일수도.

마늘소스가 지글지글-마늘한방통닭

이른 저녁을 먹고는 동네 구경을 시켜줄 겸 산책을 하기로 했다. 석양을 보기에 완벽한 장소로 데려가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참석 못한 친구들이 사진을 보내달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었다. 저 멀리 구름 사이로 살짝 걸려 멋들어지게 보이는 시뻘건 태양이 석양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켜주었다. 소녀 같은 친구들이 멋지다며 감탄을 했다.


서울시내에 이토록 정겨우면서 힙한 동네가 있었다니,라고 친구들은 나의 동네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자 나는 주말만 되면 20대들이 카메라 들고 와서 얼마나 사진을 찍어대는데,라고 설명하며 내가 이 동네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려주었다.


서울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남산 옆 산책길을 따라 걷다가 새로 생긴 4층 건물의 모던한 복합 전시공간 및 카페도 구경시켜주었는데,  이곳은 오픈하자마자 지디와 블랙핑크의 제니가 다녀가서 금세 유명해진 핫플레이스였다. 뷰 맛집들을 거쳐 집으로 가는 길에 여기가 내가 식물을 사는 곳이야, 라며 꽃 집을 알려주었더니 친구들이 화분을 사주겠다며 들어가 숫기 없는 사장님 혼을 쏙 빼놓고는 센스 있게 포장된 홍콩야자를 안고 나왔다. 말수가 별로 없으신 사장님은 우리가 재미있었는지 계속 싱글벙글 웃으셨다.

친구들이 선물한 홍콩야자

화분을 들고 집으로 가는 길에 친구 하나가, 저기 어때? 하길래 보았더니 내가 종종 가던 와인바였다. 너무 일찍 집에 가기는 그러니 저기서 얘기하다가 가자고 하여 다들 좋다며 들어가 와인 한 병에 세트 메뉴를 시켜 배불리 먹으며 3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할 말들은 얼마나 많은지! 별로 재미있는 얘기도 아닌데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웃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자정이 다 되어가 우리 집으로 향했다. 예전에 살던 집의 반 밖에 안 되는 공간이라 친구들에게 얘기는 미리 해 둔 터였다. 친구들은 아담하지만 감각적인 내 보금자리를 마음에 들어 하였다. 쿠바로 가기 전에 살던 집에 와봤던 친구들이 내 방을 관찰하더니 예전에 비해서 옷도 많이 없고 아주 소박해졌다며 약간 놀라는 듯했다.


쿠바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


친구들에게 말했다. 쿠바에서의 시간이 나를 검소하고 심플하게 만들어주었다고. 미니멀 라이프는 아니지만 꼭 필요한 게 아니면 사지 않고, 옷걸이에 걸린 옷들은 대부분 지인들이 준 것들이었다. 공간이 줄어든 탓도 있지만 물건 하나하나가 소중해 최대한 가진 것을 활용 잘하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린 이유도 한몫한 듯했다. 언제나 고마운 나의 쿠바!


토요일에 근무해야 하는 친구는 먼저 잠자리로 갔고, 잠시 후 나도 자꾸만 내려오는 눈꺼풀의 무게를 도저히 감당하지 못해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러자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아직 어린(중고등학생) 자녀가 있는 친구 하나가 그 새벽에 집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둘은 내가 자고 있는 침대 아래에 걸터앉아 먼저 잠든 친구가 일어나서 출근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대구에서 온 친구가 내 종아리가 왜 이리 부었냐며 종아리 마사지를 해주는 바람에 나는 금세 곯아떨어져 버렸다.


밝은 빛에 놀래 눈을 뜨니 8시 반이었다. 다른 방문을 열어보니 모두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없었고 마사지를 해 준 친구만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 친구는 대구에 갈 때마다 만나는 친구 중 하나여서 그녀에 대해서 대충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속내는 동침을 하면 한층 깊어지는 건지 오랜만에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서로의 생각이나 힘들었던 상황에 대해서 이해도 공감도 더 잘하게 되었다.


말재간이 있어서 아픔도 재미나게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실력도 뛰어난 친구인데 본인의 능력만큼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물론 본인의 일을 잘하고 있지만 옆에서 잘한다 잘한다 하고 응원해주면 날개를 크게 펼치고 훨훨 날아갈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옆에 없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둘이 도란도란 얘기를 주고받다가 친구가 진지하게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린다야, 고마워. 참 잘 자라줘서."


"그래? 내가 잘 자랐어?" 하면서 웃었고 친구는 그렇다고 하고는 덧붙였다.


"모든 걸 누리고 살다가 아무것도 없는 데서 산다는 게 쉽지 않은데 내가 보니까 니 참 잘 살았다. 그라고 지금 이래 사는 거 보니까 금방 다시 올라가겠다."


생각해 보니 내 인생은 꾸준한 우상향이 아니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는 굴곡 있는 그래프의 삶이었다. 주식으로 보면 우량주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내 인생은 주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겠지.


고생해서 올라가 누리며 살 때 나는 좋았다. 그러다 바닥으로 추락하듯 떨어졌지만 그 또한 좋았다. 가진 게 좀 더 있을 때에는 더 많이 나눌 수 있어서 좋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며 즐기려고 노력했다.


지나고 나니 그런 것 같았다.


상황에 맞는 그때의 행복이 있는 거라고.


이제 나는 다시 바닥에서부터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다. 과거와 다른 건, 이미 한번 경험해 봤으니 이런 결과를 가지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걸 아는 거? 그리고 또 하나. 예전처럼 앞만 보고 속도전으로 가는 게 아니라 이제는 좀 더 현명하고 여유롭게 나를 돌보며 천천히 올라가는 게 좋겠다는 거.


삼십 년을 함께 한 내 친구에게서 잘 자라줘서 고맙다는 칭찬을 들으니 내가 정말 잘 살아온 것 같아 뿌듯했다. 앞으로도 계속 잘 살아야지. 나를 위해서 그리고 소중한 나의 사람들을 위해서.


친구의 말을 생각하며 오늘은 미소 띤 채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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