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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May 02. 2020

네? 15개 국어를 한다고요?

언어천재를 만났다


이상하게 요즈음 자꾸 J 가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그를 만난 게 작년 이 맘 때였다.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인 2019년 4월 한 달 동안 나는 아바나 대학교에서 스페인어 고급과정을 수강했다. 사회주의 국가인 탓일까? 아바나 대학교의 수강료 지불 시스템도 은행이나 다른 공공기관처럼 무척이나 비효율적이라 현금을 가지고 몇 번이나 사무실 방문을 했는데도 번번이 수강료 납부에 실패를 하였다.


‘돈 받는 사람이 아쉬우면 찾아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결국 수강료 납부는 접어두고 수업만 열심히 듣던 어느 날이었다. 4월 수업이 거의 마감을 할 무렵이었는데 두 번째 수업 시간에 사무실에서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수강료를 아직 안 냈다며 오늘 내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나는 수강료를 가지고 있었고 수업을 하다가 나와 사무실에 가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그런데 조금 후에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구분이 잘 안 가는 한 청년이 나타나 나에게 말을 걸었다.


)  저기 혹시 한국분이세요?
)  , 그런데요?
)  너무 반갑습니다. 여기서 한국분을 만나다니! 혹시 쿠바에 사세요?
)  ,  쿠바인과 결혼해서 쿠바에 지금 살고 있어요.
)  우왕, 너무 신기해요! 쿠바인과 결혼을 했다고요? 혹시 얘기를  하고 싶은데 시간 있으세요?
)  시간은 있는데 지금은 수업시간이라  되고 우리 수업 마치고 얘기하면 어떨까요?
)  제가 조금 있다가 어디 가야 하는데그리고 오늘이 쿠바에 있는 마지막 날이라
)  , 그럼 저녁에 시간 되시면 저희 집에 와서 저녁식사 같이 할래요? 제가 한국음식  드릴게요.
)  우와~정말요?  한식 너무 그리운데그럼 9시까지 가도 되나요? 너무 늦을까요? 아무래도 시간이 그때   같은데.
)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럼 저녁에 다시 만나요!


일단 예의가 참으로 바른 밝은 표정의 청년이었다.
이 청년은 그 당시 미국 워싱턴 DC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런데 쿠바에 관심이 많아 아바나 대학교에 혹시 교환학생 프로그램 같은 게 있는지 확인을 하고 싶어서 잠시 온 거라고 하였다. 내가 수강료를 납부한 후 그 친구 차례가 되어 사무실 담당이랑 얘기를 하기 시작하는데 글쎄 그는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로 소통을 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내가 너무나도 초라해 질만큼의 고급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를 하며…


 친구 뭐지? 잠시 방문한 거라더니 스페인어를  이리 잘하는 거야?’

일단 교실로 다시 들어가야 했던 나는 그 친구에게 우리 집 주소만 알려주고는 저녁을 기약했다. 그때는 내가 쿠바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을 거의 모를 때라 오랜만에 한국 사람을 만나니 괜히 들떠서 없는 살림에 제육볶음과 밀가루가 없어서 계란만 올린 파전에 지금 보면 엉성했던 겉절이까지 정성껏 준비했다.






밤 9시가 되었고 조금 후에 문 밖에서 “린다 누나” 하는 소리가 들려서 나는 반가이 버선발로 나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의 손에는 비닐봉지 하나와 파인애플이 들려 있었다. 어디 갔다가 바로 온 길이라 자신의 물건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는 빈손으로 오기 민망했는지 기특하게도 파인애플을 선물로 사 가지고 왔다. 군인 같아 보이는(?) 짧은 머리에 여느 배낭여행자들처럼 약간은 낡아 보이는 티셔츠를 입은 아주 순둥순둥 한 옆집 오빠 같은 인상의 J는 알고 보니 6개월간 남미를 여행했는데 그중 칠레에서 3개월을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쿠바에 며칠간 왔다가 다음 날 새벽에 미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그날 밤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다시  만날 뻔했던 것이다.


남미에서 거의 한식을 먹을 기회가 없었다는 J는 저녁을 먹는 내내 “누나, 너무 맛있어요. 식당 하셔도 되겠어요!” 하면서 아주 맛나게 내가 준비한 음식들을 싹 해치웠다. 나는 J와 남편이 쓱싹쓱싹 순식간에 상 위에 차려진 것들을 해치우는 걸 보며 그 기쁨에 그들보다 더 배가 부름을 느꼈었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소박하지만 정성스런 한식저녁


J와 나는 쿠바인인 남편을 위해서 한국어와 스페인어를 섞어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J의 스페인어는 스페인식 스페인어였다. 마드리드에 잠시 거주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참고로 나의 스페인어는 멕시코 식이었는데 현재는 쿠바식으로 변해버렸다.


호구조사를 해 보니 서울에서 태어난 J는 중학교 때부터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고 대학교 때에는 프랑스에서 교환학생을 했다고 했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 보따리 가지고 있는 호기심 천국인 J는 재잘재잘 얘기도 아주 재미나게 잘했다. 늦게 군대를 가서 제대한 지가 오래되지 않았던 J는 통역병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몇몇 연예인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얘기해 주었는데 어쩜 재미없어야 정상인 군대 얘기조차 너무 재미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대화 내용도 점점 깊어져 갔고 별별 얘기를 다 하다 보니 이 친구가 구사를 하는 언어의 숫자가 자꾸만 증가하고 있는 걸 알게 되었다. 일단 영어, 스페인어, 불어에 이태리어, 포르투갈어, 독일어가 추가가 되었다.


‘그래, 독일어를 제외하곤 라틴어 계통이라 언어에 호기심도 많고 소질이 있는 친구니까 7개 국어 구사는 엄청난 일이지만 가능하겠군.’


그런데 그뿐이 아니었다.

러시아어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추가로 폴란드, 체코어, 불가리아어도 하고…

게다가 태국어랑 아랍어까지.


아… 이건 말이 안 된다….!




 도대체 J는 몇 개국 어를 하는 거예요?



)  하하하, 저도  모르겠어요.”
)  보자한국어, 영어, 스페인어, 불어, 이태리어, 포르투갈어, 독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체코어, 불가리아어, 태국어, 아랍어일어도 해요?
)  하하, …”
)  그럼 중국어는?”
)  (빙긋 웃으며)  중국어도 해요
)  뭐야, 그럼 15 국어를 하는 거예요?
)  하하하, 그런가요? 정확히 헤아려보지 않아서  모르겠어요


남편과 나는 그저 눈이 휘둥그레져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내가  개국 어를 하는지 모른다니
진정한 부자는 내가 가진 돈이 얼마인지 모른다고 하던데 그럼 그는 언어 부자???




그랬다. 그는 언어 천재였다.



주위에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지만 내 머리에 털 나고 15개 국어를 하는 사람은 실제로 처음 만나봐서 정말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갑자기 순둥순둥 하게 생긴 아이처럼 밝은 표정의 호기심 천국인 이 청년에게 존경심이 일면서 ‘내가 쿠바를 참 잘 왔구나!’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J는 하물며 겸손까지 했다. 내가 칭찬을 할 때마다 “아휴 아닙니다. 과찬이세요. 감사합니다.”를 연발했으니 말이다. 그것도 고개까지 꾸벅꾸벅 숙여가면서. 한참 대화를 나누던 J 가 남편에게 빙그레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마치 비밀을 속삭이는 것처럼.


“조단, 내가 언어를 잘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줄까?


“Si(응)”라고 대답을 하고는 남편은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들었다.


“일단 호기심이 많아야 해. 그리고 원하는 언어를 정하는 거야. 난 언어 하나를 정하면 삼 개월 동안은 그 언어만 생각하고 그 언어만 사용을 해. 최대한 집중을 하는 거지. 신중히 나에게 맞는 문법책을 한 권 고르고 주위에서 가장 최적의 선생님이 될 만한 사람을 찾고는 매일 15시간 정도 그 언어로 된 TV를 열심히 봐. TV에서 말하는 사람들의 입 모양과 행동을 유심히 보면서 마치 그 나라 사람인 것처럼 그대로 따라 하는 거야. 처음에는 정말 아무것도 이해를 못하지만 계속 그렇게 따라 하면서 선생님으로 정한 사람과 조금씩 대화를 하다 보면 3개월 후에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어.”


평생 공부를 해도 제대로 말하는 게 힘든 일반인들과는 달리 J 에게는 한 언어를 습득하는 데 필요한 소요시간은 단 3개월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언어 학습능력이 월등한 그는 자신만의 언어 습득 방식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 방식을 뛰어난 호기심과 집중력으로 제대로 활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밤 9시에 우리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J가 사 온 파인애플을 디저트로 먹으며 셋이서 눈도 귀도 똘똘하게 세우고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 듯 새벽 3시가 되었다. 그 날 오전 비행기로 J 가 미국을 가야 하는 데 짐 정리를 안 했다며 그제야 아쉬움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어지기 전에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다음에 또 쿠바에 오게 되면 다시 꼭 만나기를 기약하며.


J 가 돌아가고 난 후 남편이 말했다.


“자기, J 정말 대단하지? 저러다가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거 아냐?”
“웅, 아주 똑똑한 친구라 그럴 수도 있겠어.”


J는 경제학과 국제 관계를 공부한다고 했으니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 국가를 위해서 일을 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티브이에서 그를 보게 된다면 우리는 또 그러겠지.


“역시, 저렇게 될 줄 알았어. 정말 대단한 친구야!”


J를 만난 여파는 한동안 이어져 그 이후 (다시 원상 복귀되었지만) 나의 스페인어가 조금 향상이 되었고 남편의 영어공부에 좀 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기도 하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한 J가 지금은 뭘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 사이에 혹시 언어가 하나 더 늘었을까?”


오늘은 J에게 이메일을 한번 보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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