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미국을 가자! 이왕 나온 거 큰 나라에 가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번 부딪쳐 보자!
그 당시만 해도 아메리칸드림이 남아 있을 때였다. 그리고 어떤 학생이 뉴욕에 있는 24시간 감자탕 집에서 삼 개월을 빡세게 일을 해서 천만 원을 넘게 벌어서 그 돈으로 세계 여행을 했다는 기사를 본 게 생각이 났다.
까짓것 나도 해 보자!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엄마의 간곡한 부탁에도 만류하고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생각에 나는 트렁크 4개를 가지고 과감하게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도착한 곳은 하버드와 MIT로 유명한 미국 동부에 있는 학문의 도시, 보스턴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날 나는 보스턴에서 가장 크다는 한식당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 이모님(사장님 언니셨나?)께 내일부터 일 좀 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이모님은 그런 내가 가여웠는지 흔쾌히 OK를 하셨고 나는 그다음 날부터 한식당에서 서빙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12시간씩, 일주일에 6일 동안 일을 했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올 때 돈이 거의 없었던 나는 보스턴에 도착을 해서는 아는 친구가 소개해 준 보스턴 외곽의 한 아파트에서 어느 중국 언니와 살게 되었다. 그 언니는 당시 매사추세츠 대학교에서 MBA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남편은 의사라고 했다. 나는 지금도 그 언니 부부가 왜 따로 살았는지 이해는 안 가지만 아무튼 그 언니와 방이 두 개인 아파트에서 화장실, 거실, 주방을 공유하며 살게 되었다.
처음 그 집에 도착을 했을 때에는 내가 들어갈 방에 살 던 그 전 세입자의 계약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얼굴 한 번 못 본 그 전 세입자는 그 집에 살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의 계약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중국 언니와 그녀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탓이었다.
딱히 갈 곳이 없었던 나는 중국 언니에게 아파트 거실에서 잠을 자고 매일 샤워를 하는 것만 허락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까칠했던 언니는 내가 안 돼 보였는지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 날부터 나는 침낭을 펴고 거실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씻고 자는 것 이외에 삼시 세끼는 모두 한식당에서 해결했다.
지금도 보스턴에 있는 그 한식당은 크기도 했고 메뉴도 아주 많았다. 좌석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가 되었다. 일반석과 바비큐석. 신입이었던 나는 물론 일반석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모님이 4 테이블을 먼저 핸들 해 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테이블에서 나오는 팁은 모두 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0년 전이었지만 그 당시에도 미국 식당에서의 팁은 식사한 금액의 15% 정도였다. 하지만 유태인들과 한국인들은 팁에 인색하여 10%만 준다고 하여 나는 제발 내 테이블에 유태인과 한국인은 앉지 않기를 바랐다.
팁이 없는 문화에서 자란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은 밥을 먹고 추가로 내는 팁이 아까운 건 당연하니 충분히 이해를 했지만 나는 그 팁을 벌고자 일을 하는 사람이니 팁을 많이 주는 손님이 장땡이었다. 가끔은 바비큐석에서 일을 하는 언니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바비큐는 비싸서 음식값 자체가 많이 나오니 팁도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초보인 나는 바비큐에 대한 마음은 빨리 접고(가위질도 어려웠다) 나의 4 테이블에 초집중을 했다.
그 한식당은 하버드 대학교와 MIT 중간 즈음에 위치를 하여 손님들 대부분이 교수님들과 학생들 아니면 이웃 주민들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한국음식이 인기가 많았을 때가 아니어서 한국 식당에 오시는 분들은 꽤나 오픈마인드를 가지신 일명, 트이신 분들이었다.
단골들 이외에 대부분 손님들의 첫 질문은 이랬다.
“나는 한국 음식이 처음이라 메뉴를 봐도 뭐를 시켜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아가씨가 추천 좀 해 줄 수 있어요?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핫 스톤 비빔밥’을 추천했다. 돌솥 비빔밥이다.
주문을 하고 나면 끝이 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인들은 조건이 아주 많았다. 나는 알레르기가 있으니 이거를 빼 달라, 이거는 성분이 무엇이냐 등등.
그래서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돌솥 비빔밥에는 어떤 재료들이 들어가는지에 대해서 하나씩 상세히 설명을 해 드리고 혹시 그중에 못 드시는 게 있으면 미리 알려 달라고 하게 되었다. 그러면 손님들은 자신의 상황에 맞게 알려주셨다. 나는 고맙다고 하며‘기대하세요!’라는 말과 함께 뿅 하고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지글지글 소리가 나는 시커먼 돌솥을 들고 다시 손님들 앞에 나타났다. 돌솥 비빔밥을 처음 본 손님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와우 와우~~” 하며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계속해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고 있는 무거운 돌솥을 테이블 위에 조심히 놓고 ‘이걸 어떻게 먹지?’ 하며 돌솥 비빔밥을 빤히 쳐다보며 고민하는 손님에게 내가 말했다.
”이게 핫 스톤 비빔밥이에요. 제가 어떻게 먹는지 알려 드릴 테니 잘 보세요.”
손님들의 반짝이는 눈빛이 나에게로 향하고 나는 또 질문을 했다.
”맵기는 어느 정도가 좋을까요?”
손님의 기호에 맞춰 고추장을 덜어서 돌솥 비빔밥 위에 살짝 얹고는 숟가락으로 살살 비비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소리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지만 그들은 각종 재료들이 섞이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는 비빔밥을 신기한 듯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비비고 나서 생글생글 웃으며 내가 말했다.
“자, 아~해 보세요!”
그들은 갑자기 ‘아~해 보라’는 내 말에 깜짝 놀라 멈칫하면서도 웃으며 ‘아~’하며 입을 벌렸다. 그러자 내가 돌솥 비빔밥 한 숟가락을 떠서 설레며 기다리고 있는 그 입속으로 쏘옥 넣어드렸다.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오물오물 돌솥 비빔밥을 씹어 먹는 손님을 보며 ‘무슨 말이 나올까?’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와우, 어메이징!”
“하하, 너무 다행이에요. 맛있다고 하니 저도 아주 기뻐요. 그럼 맛있게 드세요. 반찬은 무료로 제공을 해 드리는 거니까 마음껏 드시고 필요한 게 있으면 저를 불러 주세요. 제 이름은 초이입니다.” (그 당시 나는 내 성씨인 최를 ‘초이’로 발음을 해서 이름으로 사용을 하고 있었다. ‘린다’라는 이름은 2007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손님들은 활짝 웃으며 고맙다고 하고 천천히 대화를 나누며 아주 맛있게 반찬까지 말끔하게 다 비우셨다. 중간중간 가서 물을 다시 채워 드리고 더 필요하신 게 없는지 물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디저트까지 다 드시고 나면 나는 계산서를 가져다 드렸다. 그러면 손님이 낮은 목소리로 살짝 물어보시곤 했다.
“초이, 이 팁은 다른 웨이트리스들이랑 나누는 거야, 아님 혼자 다 가지는 거야?”
“혼자 다 가지는 거예요.”
“아 그래? 잘 됐다.”
그러면서 나에게 식사한 비용의 50%를 팁으로 주셨다. 나는 함박웃음으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떠나시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또 오세요!’를 외쳤다.
모든 손님들이 이런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분들이 팁을 후하게 주셨다.
내가 생각해도 메뉴 선정을 잘한 것 같았다.
돌솥 비빔밥에는 일단 야채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그것을웰빙푸드로 인식을 했다. 색색깔 다양한 건강해 보이는 야채들이 계란 노른자를 중심으로 꽃처럼 어여쁘게 둘러싸여 있으니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일단 시각적으로 성공!
그러고 나서 아~하고 입을 벌리고 밥을 한 입 씹어보면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따뜻한 찰진 밥알들이 각종 야채들과 고추장 그리고 계란 프라이와 조화를 잘 이루어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미묘한 맛을 느꼈을 테다. 게다가 남이 떠먹여 주는 음식은 뭔가 더 특별한 느낌이어서 처음 경험하는 이 요상한 한국음식인 ‘돌솥 비빔밥’은 그들에게 천국의 맛이었던 것이다.
손님들이 내가 추천해 드리는 음식에 감탄을 하며 남김없이 잘 드시는 모습에 나는 또 얼마나 행복한가? 그 행복감에 나도 그들에게 더 친절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나의 친절함에 대한 보상을 철저히 했다.
그곳에서 일한 지 1개월이 지나자 이모님께서 영주권을 만들어 줄 테니 같이 일하자고 하셨다. 나는 고맙지만 사양하겠다고 했다. 내가 미국에 온 이유가 식당에서 일을 하러 온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를 이쁘게 봐주시고 그런 제안을 해 주신 이모님이 몹시 고마웠다.
그곳에서 2개월 동안 열심히 일을 했고 나는 팁으로만 500만 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
벌써 20년 전 일이다.
[부록-그곳에서 생긴 일]
내 손님 중에 매일 와서 밥을 먹는 젊은 남자가 한 명 있었다. 이웃 주민이었던 그는 올 때마다 새로운 여자를 데리고 와서는 ‘하이, 초이!’ 하면서 나에게 인사를 했다.(알고 보니 모두 여자 사람 친구였다)
내가 식당을 그만두는 마지막 날에도 그가 와서 ‘하이, 초이!’ 하며 손을 흔들었다. 매일 보다 보니 우리 둘은 조금은 친해진 상태였고 그에게 오늘이 내가 식당에서 일하는 마지막 날이라고 얘기를 하니 그가 데이트 신청을 하였다.
2개월 동안 식당에서 일만 하느라 친구가 없었던 나는 영화를 보러 가자는 그의 제안에 알겠다고 대답을 하였고 그와 영화를 보고 밥을 먹었다. 덩치는 큰 데 순진하고 착했던 그 남자는 알고 보니 하버드 대학교 물리학과를 나와서 컴퓨터 회사에서 일을 하는 똑똑한 친구였다.(전혀 그렇게 안 보였는데) 그러면서 취미로 트랜스 음악 DJ를 해서 집에 음악 스튜디오도 있었다. 그는 MIT와 하버드 대학교 학부생들 파티에서 여러 번 DJ를 했고 그 덕에 나도 몇 번 따라가서 파티 구경을 하곤 했다.
두 번째로 데이트를 하는 날 그는 보스턴 외곽으로 차를 몰로 가더니 어느 그림 같은 집에 차를 세웠다. 엄마 집이라고 했다. 그 당시 그의 엄마는 보스턴에 있는 한 은행의 부행장으로 아주 멋진 커리어우먼이셨다. 그녀는 나를 아주 반갑게 맞이해 주셨고 그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도 나에게 계속 연락을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아주 큰 제안을 한 가지 하셨다.
본인이 졸업한 학교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물론 비용은 그녀가 부담을 하겠다고 하면서. 그녀의 제안에 깜짝 놀란 나는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 분이 나한테 왜 이러시지?
혹시 자기 아들이랑 나랑 결혼하기를 바라고 이러시는 걸까?
내가 부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지도 아닌데 정말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으면 부모님과 상의해서 내가 하면 되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며칠 후에 공손하게 호의를 거절하였다. 나의 20대 좌우명이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였는 데다 무슨 일을 하든지 무조건 내 힘으로 이루어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제안을 하셨다.
초이, 내 친구가 이민국에서 일하니까 비자 문제는 걱정 마. 그리고 내가 출장을 자주 다녀서 집에 잘 없잖아. 그러니 네가 살림을 조금 도와주면 용돈도 주고 한대 남는 차 네가 타고 학교 다니면 돼. 3층은 출입문도 따로 있으니까 편하게 독채로 쓸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잘 생각해봐.
하... 어떡하지?
잠시 흔들렸지만 나는 나의 좌우명을 지키기로 했다. 그래서 결국 내 인생에 두 번다시 없을 엄청난 제안을 공손하게 거절하였고 그녀는 몹시 아쉬워하면서도 나의 결정을 존중해 주셨다. 그리고는 그녀의 간곡한 부탁에 그 집 3층에서 한 달을 거주하였다.
어쩌면 내 인생을 바꿨을 수도 있는 제안을 뒤고 하고 나는 얼마 후 미국을 떠났지만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런 제안을 해 준 그녀에게 무척이나 고마웠고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어린 친구들에게 많이 베풀 수 있는 멋진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해 주었으니. 그리고 가끔 이 일이 생각나면 혼자 또 상상을 해 본다.
만약 그때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친구들에게 이 일을 얘기하면 하나같이 나보고 바보라며 왜 그랬냐고 흥분을 했다. 그땐 그랬다. 내 20대의 자부심이랄까 패기랄까 훗.
지금은 내 짝꿍이 너무 귀여우니 안 받아들이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인생은 카르페 디엠!’이라고 되뇌어본다. 그리고 지금 나는 후회 없는 내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잘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