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쿠바댁 린다 Jun 10. 2020

마흔의 프로젝트

그리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에 대한 나의 고찰


브런치에서 마흔에 관한 글을 몇 편 읽자 내가 마흔을 맞이했을 때 일들이 생각났다.






온 세상이 내 것만 같았고 내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패기 넘치는 이십 대가 되면서 나는 엄마가 원하는 대로 살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엄마 탓을 하고 싶지 않아서!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학교 졸업하고 적당한 직장에 취직해서 일하다가 적당한 사람 만나 결혼하고 애 놓고 적당히 살면서 종종 엄마 만나서 같이 밥 먹는 그런 삶은 나와 맞지 않다는 걸 나는 일찍이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적당히 살다가 나중에 내 인생을 돌아봤을 때 후회라도 된다면 백 프로 엄마 탓을 할 게 분명했다. 내 인생인데, 너무나도 소중한 한 번뿐인 내 인생인데 엄마 탓이나 하면서 허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 엄마 가슴에 비수를 꽂고 비행기를 탔고 공항에서 대성통곡하는 엄마를 뒤로 하고 내 삶을 찾아 날기 시작했다.


세상에 쉬운 게 없지. 낯선 땅에 도착하고 일주일 후 내 생일날 나는 예상치도 못했던 일을 겪게 되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말도 안 되는 일에 하늘이 노래졌고 이대로 무너지나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눈물을 닦고 이를 악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위에 도움을 청했다. 힘들게 얻은 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그렇게 나의 홀로서기는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고등학교 때 거짓말을 한 번 하고 아빠한테 아주 크게 혼 난 기억이 있어서 나에게 거짓말은 아주 나쁜  거였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처럼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집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혼자 살아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거짓말쟁이들 투성이었다. 달콤함 뒤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바보같이 순진했던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는 동안 내 날개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났지만 나는 날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좋은 일들도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20대의 반을 외국에 살면서 사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 고생조차 20대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받아들이며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살았다. 나는 20대가 영원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지. 30이란 숫자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되었는데 덜컥 그 날이 와 버린 것이었다. 미국 마이애미에서 흑인 언니 한 명이랑 백인 언니 한 명과 살 때였다. 만 30세가 되던 날 나는 언니들을 붙잡고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펑펑 울었다. 내가 서른이 된다는 게 너무 서러웠다. 






십 년이 지났다.

어느새 나는 마흔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할 정도로 서른을 맞이할 때와는 아주 다른 기분이었다. 마흔이라는 새로운 세계는 어떨지 궁금했다. 그리고 설레었다. 잘 맞이하고 싶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두 가지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첫 번째, 만 40이 되기 전에 내 생애 첫 바디 프로필을 찍는다. 기록 남기기다.


두 번째, 만 40이 되는 날 그동안 나를 도와준 분들을 초대해서 고마움을 표현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일명, ‘불혹 생파’이다. 



첫 번째 프로젝트를 위해서 동네 헬스장에 가서 PT(personal training) 30회를 신청했다. 일주일에 2~3번 아침 6시에 개인 트레이닝을 받고 회사에 출근했다. 간혹 못 갈 때를 대비해서 ‘100일 계획’으로 진행을 했다. 그리고 프로필을 찍을 사진기사도 친구를 통해 소개를 받아 준비를 해 두었다. 몸이라는 건 나이가 들면 탄력도 떨어지고 주름도 생기고 늙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젊을 때, 마흔이 되기 전에 내 젊음에 대한(39살이 그리 젊은 나이는 아니지만 아무튼) 기록을 남겨두고 싶었다. 


100일 계획은 무사히 잘 마쳤고 드디어 바디 프로필을 찍는 날이 되었다. 반얀트리 클럽의 회원이신 친한 대표님께서 주신 반얀트리 호텔 일박 숙박권을 그 프로젝트를 위해 사용했다. 친한 동생 2명과 같이 숙박을 했고 다음 날 오전에 한 시간 반 동안 내 호텔방에서 프로필을 찍었다. 한 동생이 어찌나 웃기던지 우리는 배가 아플 정도로 깔깔깔 웃으며 아주 화기 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프로필을 찍었다.


무엇보다 내가 직접 모델이 되어 사진을 제대로 찍어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이런, 너무 재미있었다. 갑자기 모델들이 몹시나 부러워졌다. 오히려 사진 기사님이 쑥스러워하시고 나는 온갖 포즈를 다 취하며 마치 전문 모델인 것처럼 아주 당당하게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나는 다음 생에 태어나면 패션모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디 프로필을 찍기 위해서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하니 건강은 덤으로 따라왔다. 게다가 바디 프로필은 자기 관리를 하기에 아주 좋아서 기회가 되면 매 년 하고 싶었으나 그때 이후로는 아직까지 다시 해 보지는 못했다. ‘만 50세가 되기 전에 또 한 번 해 볼까 아니면 요즈음 꾸준히 운동하고 있으니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 자가격리 기간 끝나고 한번 해볼까?’라고 생각을 해 보았는데 아직 두고 볼 일이다.


그때 찍은 (그나마 낮은 수위의) 사진 한 컷(문제가 될 시 삭제하겠음)


두 번째 프로젝트를 위해서 여기저기 장소를 물색해 보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잘 아는 데가 나을 것 같아 친한 동생네 바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티브이에도 한동안 나왔던 미카일 셰프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이태원에 있는 바였다.(친한 동생이 미카일 셰프의 형수다) 그 바는 일층과 이층이 분리가 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 날 이층을 렌털 했었다. 동생 남편인 필립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음식과 술 모든 걸 다 맡겼다. 의리파인 필립이 동생이랑 미카엘이랑 불가리아 요리와 와인, 맥주 등을 완벽하게 준비하여 다 들 아주 배불리 맛있게 먹고 마시며 맘껏 즐기는 그런 파티가 되었다.(일단 파티에 오면 배가 불러야 한다는 게 내 철칙이다.)


다 들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불가리아 요리들과 행복에 겨웠던 나


당시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 아주 가까운 친구 같은 고객 몇몇과 내가 다니던 회사 사장님 및 팀원들 이렇게 해서 25명을 초대했다. 모두 나에게 이래 저래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그룹의 동생들이 일찍 도착해서 바 내부를 내 생일 컨셉에 맞게 예쁘게 꾸며주었다. 나는 그 날을 위해서 머리도 자르고(뱅 헤어로 변신) 까맣게 염색도 하였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입을까 말까 하는 내 최애 원피스(쿠바 공항에서 사라져서 이제는 없는)를 꺼내어 입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통해 친구가 되고 다들 즐겁게 노는 걸 보니 이 자리를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며 뿌듯했다. 그 날 나는 다 함께 건배를 하며 매 십 년마다 이런 자리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물론 멤버는 바뀌겠지만)


절친이 준비해 준 불혹 생파 케잌(중간에 내 사진은 초콜렛)


내가 40을 맞이하면서 이런 자리를 만든 이유가 있다. 폭풍 같은 20대를 지나 30대에 들어와서는 나도 이 사회에 서서히 정착을 하게 되었고 커리어를 쌓게 되면서 고마운 분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항상 마음속에서는 어떻게 그들에게 고마움을 갚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불혹 생파’가 떠올랐고 그런 고마움을 표출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본 결과, 매사에 고마워할 줄 알고 고마움을 잘 표현하는 사람들이 결국 잘 되는 걸 많이 봐온 터라 나도 그렇게 하기로 했던 것이다.(난 따라쟁이다) 내가 잘 되는 게 나 혼자 잘해서 된 게 아니라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이라는 것도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브런치만 해도 그렇다. 나 혼자의 힘으로 글을 써서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올리는 게 아니라 나의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들 그리고 애정을 가지고 응원해 주시는 분들의 에너지가 함께 모여 글 한편이 완성되는 것이다. 결국 그 에너지로 내가 글을 쓰는 거니까. 그리고 이것은 실로 엄청난 사실이다.






불혹 생파를 한 지도 벌써 5년이 지나(만 40세에 했음) 나도 이제 40대 중반을 살아가고 있다. 40대에 나는 결혼을 했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이랑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살고 있다. 은퇴는 아니지만 자발적 퇴사를 했고 백수로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 있지만 이 모든 건 앞으로의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일 뿐이다.


우리는 매일 밥을 먹듯 나이도 먹는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어떤 이들에게는 두려운 일일 수도 있고(나도 그랬으니) 속상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보니 나도 모르게 삶의 연륜이라는 게 느껴져서(언니 오빠들 죄송합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마음은 더 편해졌다. 언젠간 잘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이것저것 꾸준히 하다 보면 빛을 발하는 때가 오리라 믿는다.(무슨 도인 같기도ㅋㅋ) 무엇보다 나는 어느 정도 경험할 건 한 다음 나이 들어서 결혼을 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생물학적인 이유는 제외하고다.)


박명수는 말했다지. 늦었다고 생각한 때가 늦은 게 맞다고. 하지만 난 다른 생각이다. 우리들은 모두 다른 존재들이고 어느 누구도 같지 않다. 각자의 배경이 다르고 주어진 환경도 모두 다르다. 그러니 무엇을 하는 데 있어서도 빠르고 늦은 게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이러한 다양성에 대한 고찰은 여행을 통해서 많이 하게 되었다.) 물론 어릴 때 했으면 더 빨리 그리고 더 쉽게 했을 일이 나이가 들어서 하면 더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릴 수는 있다. 그럼 어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거다. 그럼 그게 내 때인 것이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아주 좋아한다.)


내가 스무 살이든, 서른 살이든, 마흔 살이든 상관없이 마음속에 꿈을 품고 내가 하고픈 걸 계속하면서 살다 보면 내가 몇 살인지도 잊게 되고 나이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이에서 자유로워지면 내 삶이 한결 가벼워지고 편안해진다는 것도 경험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십이 되는 것도 육십이 되는 것도 두렵지 않다. 그때가 되면 나는 또 그만큼의 연륜으로 삶을 대할 것이고 그때에 누릴 것을 맘껏 누리고 있을 테니.


그래서 지금은 그저 나를 사랑하며 현재 주어진 내 삶에 감사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소소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베풀면서 사는 삶은 적어도 후회하는 삶은 아닐 테니.







매거진의 이전글 천국의 맛, 핫 스톤 비빔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