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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Aug 05. 2020

변화하는 쿠바, 그 역사적인 현장에 내가 있었다-3화

자꾸만 카드가 긁고 싶어 큰일이다


남편은 그 날 볼일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혼자서 달러 상점에 가 보기로 했다. 천천히 아침을 먹고 외출 준비를 꼼꼼히 마친 후(지갑, 핸드폰, 마스크, 선글라스, 양우산, 에코백 확인) 말레꼰으로 설렁설렁 걸어가는데 그 날은 모로성 뒤로 펼쳐진 구름이 장관이었다.(대문 사진) 그 광경을 보자 또 기분이 좋아져서 룰루랄라 걷고 있는데 갑자기 말레꼰 위로 검은색 잠수복을 입은 한 남자가 훅 하고 올라왔다.


뭐지? 하면서 끼고 있던 미러 선글라스를 벗고 자세히 보았다. 말레꼰 바다 안에서 잠수를 해서 득템 한 그 날의 물고기가 그 남자의 허리춤에 걸려 있었다. 삼사십 센티미터 가량 되는 꽤나 큰 물고기의 배가 열려 있는 걸 보니 내장은 이미 제거를 한 상태였다. 마치 코난 같은 이 청장년층의 남자는 도로에 차가 오는 지를 재빨리 살피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나를 한번 곁눈질하더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코난 1-허리춤에 하얀 게 큰 생선이다. 머리가 아래로 향해 있다.


허리춤 저 물고기가 몹시 탐났다. 코난 같은 그 남자에게 물고기가 얼마인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눈길이 너무 시크해서 약간 쫄린 탓에 그냥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그런데 두 번째 잠수부가 또 훅하니 올라왔다. 이번 코난은 남자 손바닥보다 좀 더 큰 사이즈의 물고기 열다섯 마리 정도를 철사 같은 것에 꿰 놓은 꾸러미를 손에 들고 있었다. 각자 종목이 다른 건지 운이 달랐던 건지 아무튼 두 코난의 물고기는 아주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 남자도 차가 오는 지를 확인하고는 길을 건넌 후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갈 길을 가 버렸다. 나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도 지켜보았다.


코난 2-왼손 꾸러미에 걸려있는게 죄다 생선이다


팔 건지 직접 먹을 건지는 모르겠지만 두 코난은 그 날 꽤나 행복했겠지? 지천이 바다인 섬나라 쿠바에는 생선을 판매하는 가게를 찾기가 몹시 드물다. 지금까지 딱 한 번 보았나? 생선을 직접 본 건 아니고 생선이 들어온다며 기다리는 사람들만 잔뜩 본 기억뿐이다. 남편 말로는 쿠바에는 큰 어선이 없다고 했다. 예전에 하나가 있었는데 문제가 생겨서 지금 물고기 배들은 모두 개인들이 운행하는 아주 작은 통통배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통통배는 우리 집 창문에서도 종종 구경을 하고 있다.


코난 아저씨들을 떠나보내고(알아서 잘 갔지만) 나는 모로성이 조금이나마 가까이 보이는 곳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는 본격적으로 쇼핑을 하러 갔다. 월요일에 방문했던 두 군데를 다시 가 볼 생각이었다. 월요일과 순서도 같았다. 세제 상점에 먼저 도착을 해서 줄을 확인해 보니 월요일과 줄이 다른 곳에 있었다. 마지막이 누구인지 확인 후 줄을 섰다. 월요일보다 경찰과 군인의 수는 줄어든 듯했다. 역시나 한 두 명씩 들여보내고 있었는데 줄을 선지 약 사십여분이 지나자 내 앞에 서 있던 부부가 입장을 했다. ‘아, 나도 이제 곧 들어가겠구나!’ 하며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 분들이 계산대에 서서 나오지를 않았다.


한참 줄이 줄어들지 않자 나뿐만 아니라 모두들 무슨 일인지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카운터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캐셔 아주머니가 카드 결제를 하다가 실수를 했거나 손님 카드에 문제가 있어서 계산한 걸 취소하고 새로 하는 것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십 여분을 좀 더 기다리자 문제가 해결이 된 듯 그 커플은 상점을 조용히 떠났고 다음 사람인 나에게 들어오라며 손짓을 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땡볕을 지나 상점 안으로 들어갔고 손 세정제로 손을 닦은 후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그새 물건들이 많이 줄어든 것 같지는 않았다. 쿠바인들 중에 외화 카드를 소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 날 세제 상점에서의 나의 목표는 샴푸였다. 코로나 기간 중에 대통령이 쌀뜨물로 머리를 감으라는 얘기까지 할 정도로 쿠바에 샴푸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고 지금도 달러 상점 이외에는 샴푸를 파는 곳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 상점에서 인기가 가장 많은 물건은 단연 샴푸였다. 나는 머릿결이 몹시 좋지 않아 아무 샴푸나 사용이 힘들어 멕시코에서 조금 괜찮은 종류로 여러 개를 사놓은 지라 월요일에 샴푸를 보고도 사지를 않았었다. 그런데 남편과 얘기를 하다 보니 다 들 샴푸가 없어서 난리라고 해서 일단 (선물용으로) 샴푸 네 개를 샀다. 그리고 월요일에 샀지만 혹시 몰라 퐁퐁도 하나를 더 샀다.


계산대에 갔는데 월요일과는 완전 분위기가 달랐다. 나에게 감동을 안겨 주었던 친절한 언니도 이제는 없었고(일회성 친절이었나!) 캐셔 아주머니는 카드를 기계에 제대로 꼽을 줄도 몰랐다.(그땐 세 명이었는데 이젠 한 명뿐이었다) 딱 봐도 이 아주머니의 실수로 앞 커플이 계산대에서 이십 분을 넘게 기다렸던 것이었다. 아주머니가 카드를 잘못 꼽으시는 것을 내가 얘기해서 똑바로 꼽고는 무사히 계산을 마칠 수가 있었다.


첫번째 세제 상점에 사람들이 대체 저 안에 뭐가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세제 상점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두 번째 상점으로 이동을 했다. 그곳에서도 한 시간 가량 줄을 선 후(이번에는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았다) 입장을 해서 내부를 살펴보니 커피는 아예 흔적을 감추없고 소고기와 3킬로짜리 치즈 덩이들은 냉장고에 한 가득 그대로 있었다. 덩이가 크고 비싼 탓에 얌전히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동안 고기 못 먹은 게 한이 되었는지 나는 자연스레 소고기 안심을 한 덩이 더 샀다. 그리고 둥근 쌀 2 봉지(둥근 쌀은 보이면 꾸준히 사서 쟁여놓아야 한다)를 사고 참치와 정어리 통조림도 5개씩을 샀다.


아, 월요일에 사서 먹어봤더니 너무 맛나서 금세 해치워버린 초코칩 쿠키도 있는 대로 다 담았다. 무슨 쿠키가 한 봉지에 달랑 6개만 들어서 밥 먹고 디저트로 하나 뜯어서 남편과 세 개씩 먹고 나면 금세 사라져 버렸다. 무게 때문에 쿠키까지만 담고는 계산대로 향했다. 이 곳 캐셔 아주머니는 카드 결제가 아주 능숙했다. 신속하게 계산을 하고 남편이 하던 대로 나도 소고기와 물건들을 남색 에코백에 담고는 내용물이 보이지 않게 비닐로 위쪽을 막았다. 두 군데서 쇼핑을 한 탓에, 게다가 거의 일 킬로가 되는 샴푸 네 개에 퐁퐁도 하나를 샀더니 물건들이 꽤나 무거웠다.


일단 큰 도로까지 물건들을 낑낑 대며 잘 들고 와서 지나가는 비씨 택시(자전거 택시)를 한 대 세웠다. 외국인인 나에게는 항상 가격을 높게 부르는 탓에 잔 돈이 얼마 없다며 기사님과 협상을 잘하고는 비씨 택시에 올랐다. 천천히 덜컹덜컹 골목 구경을 하다 보니 금세 우리 집이었다. 계산을 하려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데 아저씨가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원래 이까지는 2 쿡이야. 잔 돈 없다더니 돈 있구먼.” 그래서 아저씨께 “원래 우리 집까지는 1 쿡이에요. 감사합니다.” 하면서 약속한 금액을 드리고는 아파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 밉상이다! 헤어지는 마당에 쿨하게 놓아줄 것이지 쓸데없이 돈 얘긴 또 왜 하는 건지. 아저씨가 한 말에 살짝 기분이 상할뻔 했지만 이내 무시하고는 소고기 장조림을 만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그날 밤늦게 집에 도착을 했다. 오전에 시댁에 갔다가 대부님 댁에 가서 일을 좀 도와드리고 온다고 했었다. 대부님을 오랜만에 만난 탓에 럼을 한 잔 하며 담소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가 버린 데다가 버스가 잘 안 다니는 지역이라 버스를 기다리느라 많이 늦게 된 것이었다. 대부님은 연세가 일흔이 훌쩍 넘으신, 쿠바에서 한 우리의 결혼식에서 내 손을 잡고 신부 입장을 해 주셨던 남편이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다음으로 존경하는 남자 어른이시다. 그리고 대부님과 대모님은 우리의 결혼식에 증인도 되어 주셨다. (쿠바에서는 서류상의 결혼을 할 때 두 명의 증인이 필요하다.) 증인을 해 주시러 공증 사무실에 오셨을 때 그곳 변호사들이 대모님께 인사를 하며 반가워하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


쿠바 결혼식에서 식이 끝나고 대부님과 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그런 대부님과 대모님께서 사시는 곳을 작년에 남편과 한번 방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 도착한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곳은 마치 어느 첩보 영화 혹은 액션 영화에나 나올 법만 빈민가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었다. 좁고 어두운 골목 양 쪽으로 집들이 빽빽이 줄지어 있는 곳을 지나 마지막 즈음에 대부님의 집이 있었다. 나의 기준에서 집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곳에 남편이 너무나도 존경해 마지않는 대부님과 대모님이 살고 계셨다.


대부님은 왕년에 장사를 하셨고 대모님은 은퇴 전까지 법무부에서 디렉터를 하신 아주 인텔리셨다. 그래서 변호사들이 대모님을 알아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한 것이었다. 대모님은 말씀을 아주 재미있게 잘하시는데 법무부 디렉터를 하실 때 아바나에서부터 동쪽 산티아고 데 쿠바까지 안 가보신 데가 없으셨고 출장을 가실 때마다 특급 호텔에 머무르셨다고 하셨다. 그래서 지금도 예전 특급 호텔들을 줄줄 꾀고 계신다. 그런데 그런 분이 이런 빈민가 같은 곳에 살고 계신다는 건 나에게 충격이었다.


대모님은 어릴 때 대궐 같은 집에서 자라셨고(지나가면서 예전에 대모님이 사셨던 집을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이태리 사람이 살고 있다.) 지금도 가족들은 그 근처에서 살고 계시다고 했다. 자식이 없으신 두 분은 가족들과 함께 사시는 게 불편하시다며 오롯이 두 분이서만 사시려고 하시다 보니 이런 곳에 살게 되셨다고 남편이 설명을 해 주었다. 하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상황들을 이해하기가 아직은 힘들었다. 이 곳에 계속 살다 보면 언젠가 이런 일들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할 뿐이다.


연로하신 두 분이 사시는 작은 집의 내부에는 공사재료가 있었고 대부님은 틈나는 대로 집수리를 하신다고 했다. 그런데 비가 많이 쏟아지던 어느 날, 그 빈민가의 나쁜 이웃 청년이 대부님 댁의 물 배관 파이프를 훔쳐 가서(정말 별 걸 다 훔쳐간다) 대부님의 댁에 물이 못 들어오게 되어 버렸다. 대부님이 남편에게 그런 사정을 말씀해 주셨고 남편은 나에게 대부님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단수가 되면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대부님의 딱한 사정을 듣고 새로운 배관 파이프를 살 돈을 남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남편은 그 길로 대부님과 함께 철물점을 가서 배관 파이프를 샀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 배관 밸브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두 분의 노인만 사시는 곳에 이런 일이 발생을 하면 문제 해결이 아주 힘들어진다. 게다가 그 빈민가 이웃들은 다 들 각자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이다 보니 대부님께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줄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 대부님 물건에 손을 안 대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남편의 얘기를 듣고 또 마음이 아파서 밸브를 구입하는 데 필요한 돈을 주었고(얼마 안 되었다) 그래서 남편이 그 날 밸브를 사는 것을 도와주러 대부님 댁에 간 것이었다.


다음 날 남편은 다시 물탱크를 수리하러 시댁에 간다고 하였고 대부님 댁에도 다시 갈 일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시댁과 대부님 댁에 보낼 물건들을 조금 챙겨 보았다. 샴푸와 식빵, 참치와 정어리 캔 그리고 초코 샌드 하나씩(치즈와 소고기는 이미 나누어 드렸다)을 봉투 두 군데에 담았다. 혹시라도 남편이 헷갈려서 물건이 바뀔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공평하게 똑같이 물건을 담았다. 카드 결제를 하게 되니 왠지 모를 마음의 여유가 좀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시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대모님이 샴푸가 없어서 머리를 감기 힘드신 걸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짠하고 아파서 뭐라도 해 드리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다행히 대부님은 머리카락이 없으셔서 샴푸가 필요가 없다:-)






한창 회사에서 따박따박 월급을 잘 받으며 살 때 나는 한 단체에서 어린이 다섯 명을 후원했더랬다. 대륙별로 한 명씩이었는데 한국에서 중학교 때 나의 후원을 받기 시작해서 대학까지 간 혜주는 몇 번을 직접 만나서 같이 밥도 먹고 선물도 사 주곤 했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그 단체 회장님을 개인적으로 만나 뵙게 되었는데 그 후 그 단체에 대한 마음이 바뀌게 되었다. 그러다가 퇴사를 했고 결국 그 단체에 십 년을 훌쩍 넘게 후원했던 것을 모두 끊게 되었다.


나는 예전부터 어린이 교육재단에 관심이 많아 직접 캄보디아에 가서 13명의 어린이들에게 100불씩 장학금을 전달을 한 적도 있었다. 혼자서 한 것은 아니고 주위의 도움을 받아 내가 대표로 가서 어린이들을 직접 만나서 얘기를 하고 장학금을 전달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후원을 받을 상황이라 아무도 후원을 하지 않고 있는데 대신 이 열악한 쿠바에서 착한 쿠바인들에게 나의 한도 내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꾸준히 하려고 노력 중이다.


결혼 전에 남편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더랬다. “자기는 모든 조건이 좋아지면(먹고살만해지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야?” 그랬더니 남편이 말했다. “어린이 교육을 위해서 일하고 싶어.” 그 얘기를 듣고 나는 완전 깜짝 놀라버렸다. 모든 게 부족한 상황에 살고 있는 쿠바인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도 내 인생의 목표 중 하나도 어린이 교육재단을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나는 이 남자와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소울 메이트라는 것을.







같은 상점만 두 번씩 가 본 나는 아바나에 있는 다른 달러 상점들도 다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드 긁는 재미를 자꾸 느끼고 싶어 큰일 났다. 그래서 다음 날 남편과 또 외출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어디를 한번 가볼까? 그리고 그곳엔 또 뭐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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