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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Aug 23. 2020

전기가 사라졌다


오전 9시경이 되자 전기가 나가버렸다. 정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쿠바의 경우,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센뜨로 아바나에 있는 아파트의 경우는 정전보다는 단수가 훨씬 자주 발생한다. 단수가 되면 하루 종일 물이 안 나오기도 하지만 정전의 경우 보통 2~3시간 혹은 4시간 정도 후면 전기가 다시 들어오기 때문에 몇 시간 정도 참는 건 이 곳에서 전혀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침 9시경에 시작된 정전이 점심때가 지났는데도 계속되고 있다. 집에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는 요즈음이지만 더위쯤이야 참을 수 있다. 너무 더우면 찬 물에 샤워하면 되니까. 그런데 냉장고. 저 애증의 냉장고가 문제이다. (아래 글 참고)


https://brunch.co.kr/@lindacrelo/22


냉동고 청소 기록을 보니 성애를 제거한 지가 아직 2주가 안 되었다. 빠르면 2주, 늦으면 한 달 정도 간격으로 냉동고 성애 작업을 하느라 전기선을 뽑고 청소를 하지만 그럴 때면 반드시 냉동고에 든 내용물을 확인 후 진행을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집 냉동고에는 아주 귀한 식품 몇 가지가 고이 모셔져 있다. 생선, 새우, 소고기와 돼지고기 약간. 물론 양이 많지는 않지만 소고기를 제외하고는(달러 숍이 생긴 후 소고기 구하는 게 가장 쉬워졌다.) 블랙마켓을 통해서도 구하기도 쉽지 않은 음식들이다 보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냉장고 걱정을 하며 점심 준비를 하다 보니 아주 예전에 일을 하면서 겪었던 잊지 못할 냉장고 사건이 떠 올랐다.(아무 생각 없이 요리를 하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문득문득 떠 오른다.)








모 외국계 회사 대표님이 서울에서 새로운 집을 구하신다고 했다. 이미 한국에 거주하신 지가 몇 년이 되셨는데 자녀의 학교 문제로 동네를 옮기시기로 하신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여기저기를 통해서 집을 많이 보았으나 워낙 기준이 높고 까다로운 분이셔서 집을 아직 못 구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느 날 그 회사 담당자에게서 연락을 받게 되었다.


“저희 대표님 집 좀 알아봐 주세요!”


대략 상황을 알아보니 그 사장님은 유럽분이신데 사모님이 한국 분이셨고 이 사모님은 이미 여러 부동산들 사이에서 유명하셨다. 당시 우리 회사는 외국인 렌트 부동산 중에서도 경력이 최소 15년에서 25년 정도의 아주 노련하고 신뢰도가 있는 부동산 4군데 정도와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사모님의 이력을 듣고는 한 군데 부동산 사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 사장님이 이 까다로운 사모님에게 가장 적합한 분이라는 확신이 왔기 때문이었다.


사장님께 고객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렌트를 의뢰드렸다. 나의 확신에 보답이라도 하듯 그 사장님은 나의 고객인 사모님이 원하는 집을 찾으셨고 집을 결정한 후에 우리는 입주 전 집수리 사항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까다로운 고객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던 그 고객은 우리 팀에서 가장 경력이 많고 일을 잘했던 L차장이 맡아서 진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작스레 수술을 하게 되면서 그녀가 하던 일을 내가 맡아서 진행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 대신 내가 방문을 한 첫날, L차장이 아파서 갑자기 수술을 하게 되었다고 그들에게 설명을 해 주었는데 그 부부는 나의 말에 반응이 전혀 없었다.(오히려 그녀의 상사인 내가 와서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동안 L차장은 그 까다로운 그들의 얘기를 하나하나 다 들어주면서 집을 찾느라 무지 고생을 했고 그 부부의 수족이 되어 이것저것 도와주었는데 그녀가 아프다는 말에, “이런, 괜찮아요? 많이 아파요?”라는 내가 예상했던 반응은 전혀 나오지가 않았던 것이었다. 친구 집 개가 아프다고 하면 호들갑을 떨 사람들이 말이다.


하지만 곧이어 시작된 집의 이야기에는 미주알고주알 설명을 참으로 잘하셨다. 속으로 무척 어이가 없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일을 하였는데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이층 방 하나에 있던 옷 서랍장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이 집으로 정한 날 그 부부는 L차장과 부동산 사장님과 함께 이 집을 방문하였고 이층 방에 있는 가구가 마음에 들어 임대인이 두고 갈 건지 물어봤다고 했다. 그리고 임대인은 세입자가 써도 된다고 했다는 답을 주었다고 나에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런 상세한 사정에 대해서 몰랐던 나는 일단 확인하고 알려주겠다는 답을 하고는 회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동산 사장님과 고객이 한 얘기에 대해서 확인을 해 보았다. 그랬더니 사장님은 그 일을 기억하고 계셨고 그 가구는 임대인이 가져가시겠다고 하셔서 그 사실을 분명히 그 부부에게 알려주었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나의 고객인 대표님께 그 상황에 대해서 다시 말씀을 드렸더니 그는 임대인이 분명히 가구를 두고 간다고 했다며 그것 때문에 이 집으로 정했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면서 자신들은 그 가구가 꼭 있어야 한다며 빡빡 우기기 시작했다.


당시 그 대표님은 아주 중요한 고객이었다. 그의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면 그 이후로 우리 회사가 그 회사와 계약을 맺어 계속해서 일을 하는 게 확정이 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부동산 사장님께 혹시 임대인이 가구를 다시 가져다 놓으실 수는 없는지 부탁을 드려 보았지만 안된다는 대답만 받을 수가 있었다. 그제야 나는 왜 그 대표님 부부가 L차장에서 나로 담당자가 변경이 된 걸 좋아했는지 알 수가 있었다. 담당자가 바뀌었으니 문제의 책임을 전 담당자에게 지우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걸 취하기 위함이었다.


양 측의 의견이 팽팽히 맞선 상황에서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나의 고객의 편이 되어 나도 한번 부동산 사장님께 떼를 써볼까? 아니면 뒷 일은 상관하지 않고 원리 원칙대로 가구는 없으니 본인들이 알아서 하시라고 말을 해 버릴까? 두 가지 모두 답이 될 수가 없었다. 고민을 한 끝에 결국 그 서랍장은 우리 회사에서 제공을 해 주기로 하였다. 특별 케이스였다.


금액을 100만 원으로 정하고 사모님께 원하는 가구를 찾으면 정보를 보내 달라고 했다. 그제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나의 고객 부부는 아주 만족을 하였다. 물론 나는 회사 담당자에게 이 사건에 대해서 빠짐없이 다 설명을 드렸고 우리 회사가 어떻게 이 일을 마무리했는지에 대해서 강조를 하며 계약을 맺는 것에 대해서 한번 더 보이지 않는 도장을 꽝 찍었더랬다.


집을 구할 때부터 그 사모님의 인격은 유명했는데 입주를 하고 나서도 그녀의 명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었다. 집이라는 곳은 살다 보면 소소한 문제들이 꾸준히 발생을 하기 마련인데 그럴 때마다 사모님은 부동산 사장님께 연락을 드렸고 부동산 사장님이 재빨리 수리기사를 보내시면(수리 비용은 임대인이 내심) 90프로 이상의 기사님들이 두 번 다시 그런 집에는 가기 싫다며 학을 띄고 나오셨던 것이었다.


더구나 청소를 해 주시는 필리핀 아주머니들도 그 집에 가면 며칠을 못 견디고 끊임없이 바뀌어서 결국은 나에게 청소하시는 분을 찾아달라며 도움을 청하셨다. 당시 나는 너무 바빠서 친하게 지내던 필리핀 아주머니가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집에 오셔서 청소를 해 주셨는데 그 아주머니를 그 댁에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착한 아주머니가 사모님이 인격적으로 자신을 너무 무시해서 도저히 일을 못하겠다고 울먹이며 나에게 전화를 해서 얘기를 하시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나는 아주머니께 미안하다고 하며 더 이상 그 집에 가지 말라고 말씀드렸고 사모님께는 둘러서 설명을 드리고는 청소하시는 분은 직접 찾으시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녀의 행동은 그동안 봐왔던 (외국인 주재원과 결혼한) 한국인 사모님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다행히도 나에게는 그나마 예의를 갖춰주셨으니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유럽으로 여름휴가를 다녀온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집 전체에 전기가 떨어져서 냉장고에 있던 물건들을 모두 버리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전기가 떨어진 것은 부동산 사장님을 통해서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사모님이 돌아오시기 며칠 전 그 집에 갑자기 전기가 떨어져서 보안업체인 세콤이 출동을 했지만 열쇠가 없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설명해 주셨다. 원래 세콤을 설치하게 되면 열쇠를 하나 맡겨 두는데 그 사모님은 세콤을 믿을 수 없다며 처음부터 열쇠를 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세콤은 출동을 하였지만 밖에서만 집을 확인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단 냉동실에 있던 고기와 식품들이 녹으면서 냉장고 주변이 엉망이 되었고 냄새도 고약했기 때문에 재빨리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를 보내어 깨끗이 청소해 드렸다. 물론 그 청소비용은 우리 회사가 처리했다. 이런 일은 돈을 떠나서 무조건 빨리 처리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청소가 끝나자 사모님은 전기로 인해 냉동. 냉장실에 보관하고 있던 음식들 중에 못 먹게 된 음식들 사진을 찍어 나에게 보내었다.


“이 고기는 내가 갤러리아에서 산 최상급인데 한 번에 하나씩 먹도록 소분해서 열 번 먹으려고 넣어뒀는데 고스란히 버리게 되었네요.” “이 치즈는 프랑스산인데 구하기도 힘든 거예요.” 이거는 어디서 산 것이고 저거는 어떤 건데 다 버리게 되었다며 나에게 하소연을 줄줄줄 늘어놓았다. 집이 큰 만큼 냉장고도 컸던 지라 음식도 당연히 많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밑밥을 깔더니 결국 그녀는 못 먹게 된 음식들에 대해서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사이 나는 임대인 측의 상황을 확인해 보았다. 전기가 갑자기 떨어졌으니 그 집에 전기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만약 그게 그 집에서 발생한 전기 문제라면 이 상황은 임대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 부동산에서 그런 상황을 설명드리자 임대인은 바로 전기기술자를 그 집으로 보내어 상태를 확인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 집 자체적인 전기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아마도 여름이라 폭우가 쏟아지거나 번개가 친 날 갑자기 전기가 뚝 떨어진 것 같았다. 아니면 어딘가에서 합선이 되었거나. 여름에 한 번씩 발생하는 일이었다.


하물며 그 집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세콤도 들어갈 수가 없었으니 전기가 떨어진 상태로 며칠이 흘러가 버렸던 것이었다. 폭우나 번개로 전기가 떨어졌다고 하면 그것은 천재지변에 속하는 것이고 본인이 집에 없었고 또한 세콤에게 열쇠를 주지 않아 발생한 일이기 때문에 이 상황은 명백히 세입자의 잘못이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집의 문제라고 하며 일이 커질 것을 예상하고는 이 일을 회사 담당자에게로 넘겨 버렸다. 회사 담당자는 무슨 잘못인가? 아무튼 나는 고객 측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라 부동산 사장님께 연락을 드려 어쩌면 합선이 되어 전기가 떨어진 것일 수도 있으니 임대인께서 어느 정도 책임을 지시는 건 어떻겠냐고 여쭤 보았다.


고급 주택이나 빌라의 경우 말이 안 통하고 본인은 한 푼도 쓰지 않으려고 생떼를 부리시는 임대인들이 간혹 있는 반면, 이 임대인은 그동안 수리를 할 때마다 협조를 잘해주신 나름 괜찮은 분이셨다. 그리고 고맙게도 본인의 집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이번 일에 대해서 일말의 책임을 지시겠다는 의견을 전달해주셨다. 물론 부동산 사장님께서 말씀을 잘해 주셔서였다. 그리고 월세가 아주 비싼 집이어서 그나마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임대인이 가만히 생각을 해 보시더니 명백하게 본인 잘못이 아닌 일에 백 프로 돈을 다 물어주게 되면 본인이 하지도 않은 잘못을 인정을 하는 거라며 40프로까지 도와주시겠다고 하셨다고 했다.(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나는 참 많이 배운다.) 그래, 40프로가 어디냐! 임대인께서 그만큼이라도 부담을 해 주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결국 나머지 60프로는? 우리 회사에서 또 한 번 비용을 부담하였다. 이것은 순전히 회사 담당자를 봐서 해 드린 것이었다. 이 일이 마무리가 되지 않으면 할 일도 많은 그녀가 계속 힘들어지고 이 일로 모두가 낭비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재를 해야 하는 내가 가장 힘들었다.


그렇게 그 집에서 몇 년을 살았던 유명했던 그 가족은 싱가포르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싱가포르에서는 한국에서보다 더 했는지 싱가포르 회사 담당자가 한국에서 도대체 집을 어떻게 찾았냐며 연락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참 웃었던 기억이 있다. 역시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오전 9시에 시작된 정전은 저녁 6시가 되어 끝이 났고 그동안 나는 혹시라도 (따로 문이 없는) 냉동실에 있는 물건들이 문제가 생길까 봐 꼭 필요한 것만 빨리 꺼냈다가 빨리 닫으며 최대한 냉기를 유지하고자 노력을 했다. 물도 제대로 못 마셨다. 드디어 냉장고에 전기가 들어오고 십여분이 지난 후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다. 냉동고를 보니 얼음 덩어리가 몇 개 떨어져 있었고(뚝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듣긴 했다) 다행히 새우와 생선 그리고 돼지고기는 녹지 않았다.


얼음덩어리는 버리고 몇 개 없던 식품들은 꺼내서 냉동고를 청소 후 다시 정리해서 넣어 두었다. 유일하게 녹았던 소고기는 저녁에 먹으려고 꺼내 놓았다. 그리고 냉장고 바닥을 장식한 물기는 걸레 세 개로 깨끗이 닦아 내었다.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라 이제는 놀라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서도 잘 처리를 한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전기가 사라졌을 때 나의 가장 큰 걱정이 냉장고이지만 미래에는 어떻게 될까?


당장 어제 9시간 동안 전기가 없어서 나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사용을 할 수가 없었다. (배터리가 너무 빨리 나가버렸다) 그리고 불이 안 들어오니 방도 깜깜했다. 선풍기도 에어컨은 생각도 안 했다.


예전에 혼자서 이 나라 저 나라를 여행할 때 길치인 나에게 구글맵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런데 핸드폰 배터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 날 깜빡하고 보조배터리도 숙소에 두고 옷 것이었다. 두려움이 찾아오고 있었다.


나는 이제 길을 잃어야 할까?


미래 시대에는 많은 일을 인간 대신 로봇이 하게 되고 전기차를 타며 디지털 화폐를 사용한다고 한다. 모든 게 전기로 움직이는 미래 시대에 만약 전기가 없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때는 전기가 사라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까? 전기도 자원인만큼 무한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이때가 되면 지금 내가 고민하는 냉장고 문제는 아마도 귀엽게 여겨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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