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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Jul 05. 2020

코로나 100일 프로젝트 in 쿠바, 그 막을 내리다

곰은 백일 후에 사람이 되었는데, 나는 과연 백일 후에 무엇이 되었을까?


2020.07.03(금)


어제 남편에게서 아주 놀라운 얘기를 듣고(쿠바의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로 까먹기 전에 곧 써 볼 예정) 약간의 충격으로 과음을 했더니 해가 뜨고서야 일어났다. 그리고는 당연히 나는 세탁실로 갔고 창밖을 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말레꼰에서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낚시꾼들 옆으로 경찰차가 아무 말없이 그냥 지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전 날까지만 해도 말레꼰에 사람이 서 있으면 경찰이 쫓아내었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도로에 차량이 증가했고 갑자기 도시가 활기를 띠고 있었다. 뭐지? 남편이랑 술 마시며 이야기하던 간밤에 뭔 일이 있었던 게야? 아는 동생에게 카톡을 보내었다.


‘오늘 아바나 왜케 활기차지?”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다.


‘아마 fase 1(1 단계)이라 활기찬 게 아닐까효?’


‘아, 진짜야? 오늘부터야? 어쩐지 아침부터 낚시꾼들이 왔더라. 차도 많이 다니고 ㅋㅋㅋㅋㅋ’


아바나도 드디어 격리 해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2020.03.24부터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격리를 시작했던 쿠바는 06.18에 아바나와 마딴사스 주(아바나 옆에 위치한 주)를 제외한 쿠바 전 지역에 해제 1단계에 들어갔다. 그리고 해제 2단계로 07.01부터 몇몇의 섬에 외국인 관광객을 받기 시작했다. 아바나 공항이 아닌 해당 섬 근교 공항에 전세기로 관광객들이 입국을 하면 공항에서 코로나 검사를 한 후 음성 판정을 받은 외국인들만 경찰이 대동한 버스에 탑승을 한 후 곧바로 리조트로 가서 휴양을 할 수가 있다. 버스는 공항과 리조트 두 군데만 이동을 하고 운행 중간에 멈춰서는 안 된다. 그리고 관광객도 리조트 울타리 밖을 벗어나서는 안된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의 수가 전 세계적으로 1,100만이 넘었고 계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해서 쿠바에 와서 휴양을 하려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때에 마지막 남아있던 아바나와 마탄사스 주의 해제 1단계가 오늘 시작이 되었다. 내가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은 지 102일째 되는 날이었다.(소고기 받을 때 집 앞에 잠시 나간 것 제외) 그리고 이제 나의 [코로나 100일 프로젝트]는 막을 내렸다.


그동안 나는 지난 4월에 올린 [코로나 프로젝트]를 꾸준히 실행하고 있었고 세 번째 달력을 만들고 나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https://brunch.co.kr/@lindacrelo/24


곰은 100일 동안 동굴에서 마늘과 쑥만 먹고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는데 (호랑이띠인) 나는 100일 동안 집 안에만 있으면 과연 무엇이 될까?



요리•운동•글쓰기



결론적으로 나는 이 세 가지를 통해서 자가격리기간 동안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되었고 슬기롭게 위기인 순간을 잘 극복해 내었다.(답이 너무 빨리 나왔네) 세 가지를 꾸준히 하면서도 각 달마다 집중하는 분야가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4월에는 요리, 5월에는 운동, 그리고 6월에는 글쓰기에 좀 더 중점을 두며 변화를 하다 보니 지루함도 조금은 떨쳐 버릴 수가 있어서 더 효과적이었다.


요리의 경우는 마치 연구원이 된 듯 새로운 것에 도전을 많이 했는데 그중 단연 일위는 밥솥과 냄비로 해 본 케이크 만들기, 제빵이었다. 오븐이 있어야만 가능할 줄 알았던 당근 케이크를 우연한 기회에 밥솥으로 만들게 되었고 그게 성공하자 오븐 없이 다채로운 시도를 해 보았다. 결과가 만족스럽자 한동안 제빵에 푹 빠져서 카스텔라도 만들고 과자도 만들게 되었다. 물론 재료가 충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밀가루, 설탕, 기름 중 무언가가 내 몸과 잘 안 맞았는지 케이크를 자주 많이 먹고 난 어느 날부터 이마에 여드름도 아닌 좁쌀 같은 것들이 마구 올라오고 입술 아래턱 쪽에도 뾰루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학교 다닐 적에도 그런 건 이마에 나본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너무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세수를 몇 번씩을 해도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 계란도 없고 해서 케이크 만들기를 좀 쉬었더니 이마에 있던 좁쌀들이 조금씩 사라지게 되었다.(내가 케이크를 너무 많이 먹었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 상태가 나아지고 난 후 다시 만들긴 했다. 그리고 다시 좁쌀이 올라왔다. 엉엉


https://brunch.co.kr/@lindacrelo/38


제빵 이외에도 근대라는 식물의 발견으로 해 본 근대 무침, 근대 쌈밥, 근대 된장국, 빨간 무 래디쉬로 만든 물김치와 북엇국, 돼지고기와 메추리알 장조림, 각종 콩으로 만든 콩비지와 묵, 강낭콩 조림, 바삭바삭 최고였던 탕수육, 망고잼, 사과식초와 사과 피자, 고구마 맛탕, 동그랑 땡, 각종 피자와 샌드위치, 맛없는 햄버거 빵의 새로운 발견인 프렌치토스트, 수박 껍질로 해 본 태국 음식 솜땀, 직접 말린 고추를 갈아서 만든 김치까지 처음으로 도전을 한 음식들이 꽤나 많았다.


https://brunch.co.kr/@lindacrelo/49


새로운 음식에 도전을 하고 그 음식이 제대로 맛을 내었을 때 느끼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다. 나에게 요리는 명상이고 힐링이었다. 요리는 해도 해도 늘 즐거웠다. 그리고 하면 할수록 요리가 과학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손맛이란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거라 그야말로 매력 덩어리였다. 연기파 배우인 남편의 반응도 한몫을 단단히 했지만 요리 자체가 나는 너무나도 재밌어서 재료만 있으면 더 많은 요리를 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재료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하는 것도 좋았다. 창의력이 발휘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요리에 그랬듯이 운동도 연구를 많이 해 보았다.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며 어떤 게 내 몸에 가장 잘 맞는지 그리고 효과가 좋은지 내가 마루타가 되어 유심히 관찰을 해 보았다. 남편에게 동영상을 찍어 달라고 해서 동영상을 보면서 연구하기도 했다. 측만증이 심한 내 몸은 일단 발란스가 중요해서 발란스 맞추기에 중점을 두면서 근력 만들기를 병행해 나갔다. 이런저런 운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내 몸과 소통을 많이 하게 되었고 그동안 몰랐던 부분에 대해 많이 알게 되어 이 또한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부엌에서 요리를 하다가 틈나면 하는 ‘틈새운동’인 서서하는 팔 굽혀 펴기는 너무나도 간편하고 쉬워서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지금도 매일 꾸준히 하고 있다.


글쓰기는 달이 갈수록 탄력을 받아서 4월에는 6편을 브런치에 올린 데 반해 5월에는 18편을 그리고 6월에는 21편을 올렸다. 7월 1일에 올린 두 편까지 하면 100일 동안 47편을 브런치에 올렸다. 그중에서 사진과 예전에 써 놓은 시를 제외하고 글만 보면 총 45편이다. 물론 써 놓고 브런치에 올리지 않은 글도 있긴 하다.


글을 한 편 쓸 때마다 아주 정성껏 내 온 에너지를 다 해서 쓰고는 또 오랜 시간 고치고 고쳐가면서 브런치에 올리다 보니 나에겐 한 편 한 편이 너무 소중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조회수 13만을 넘기고 아직도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45살에 결혼하면 좋습니다]와 쓰다 보니 시리즈가 되어버린 [장 보러 국경 넘는 여자] 매거진이 쬐금 더 인상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면서 다른 분들과 소통을 하고 의견을 나누는 게 슬그머니 내 삶의 일부가 되었는지 이제는 글을 올리고 나면 이번에는 어떤 댓글이 올라올까? 하는 설렘이 앞서기도 한다. 그래서 브런치를 몰랐다면 이 힘든 시기를 어떻게 견뎠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도 든다. 나에게 글은 단순히 쓰는 것을 뛰어넘어 꿈을 키우는 매개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참, 4월에는 식물 키우기에도 도전을 하여 지금 방울토마토 5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크는 속도가 아주 느려서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모든 게 느린 쿠바라 그런가?) 게다가 남들은 아주 쉽게 잘 키우는 상추가 나에겐 왜 이렇게 힘든지! 싹은 잘 나오는데 좀 자라다가 계속 죽어버려 얼마 전에 세 번째로 씨앗을 딱 하나만 심어보았다. 이 녀석은 제발 잘 자라나서 나도 집에서 재배한 상추로 쌈을 한번 먹어보는 날이 오길 간절히 바래본다. 이 얘기를 하다 보니 며칠 전에 한국 뉴스에서 본 기사가 하나 떠올랐다.



쿠바에서는 대통령이 이 얘기를 한 지가 좀 되었다. 평소에도 도둑들이 물건들을 다 빼돌려 뒤로 팔다 보니 시중에 물건들이 없는데 코로나 시기가 되어 물건이 더 없다 보니 내가 먹을 건 내가 경작해서 먹으라는 지침인 것이었다. 나도 마당 있는 집에 살면서 채소들도 경작하고 닭도 키우고 싶다.(정말로!) 하지만 현실은 그럴만한 공간이 없는 작은 아파트라 대통령이 말한 저것은 쿠바 시민들에게는 그저 어이없는 부르짖음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들어 경찰들이 좀도둑들을 많이 잡아갔는데 대부분이 젊은 남자들이었다. 남편이 본 경우만도 여러 건이었다. 대부분 이들은 시골에 있는 감옥에 가서 농사를 짓거나 석탄을 캐는데(쿠바 석탄의 질이 전 세계 톱이라고 한다) 투입이 된다고 하였다. 먹을 건 필요한데 농사 지을 인력이 부족하자 사소한 걸로 죄를 짓는 이들을 잡아다가 노예처럼 일을 시킨다고 했다.






이 모든 일들은 생각만 해서는 잘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코로나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매일 한 일을 내가 만든 달력에 채워가기 시작했다. 달력에 채워지는 내용은 주로 세 가지였다. 브런치에 글을 올린 유무, 그날 한 다양한 운동들 그리고 번역하거나(4월) 읽은 책의 쪽수. 그러다가 6월이 되니 조금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100일 프로젝트]로 이름을 바꾸어 100일 후에 내 모습은 어떻게 변할지를 상상해 보았다.


‘100일 후에 몸짱이 되려면 운동을 좀 더 힘들게 해야겠어!’라는 마음으로 5월에 새로 시작한 효과가 좋은 두 가지 운동을 하루에 100개 혹은 200개씩 했더니 잠이 쏟아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잠이 쏟아지니 글을 쓰면서도 계속 졸게 되어 결국 운동 양을 줄이고 매일 하던 것을 격일 아니면 3일에 한 번씩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원하던 몸짱에서는 조금 멀어지긴 했지만 100일 동안 꾸준히 운동을 한 탓에 코로나 시작 전보다 확실히 몸 상태는 좋아지긴 했다. 이제는 수영장에 가도 배를 내놓을 수는 있으니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배에 살짝 십일자 보임)


물론 100일 동안 매일 꼬박꼬박 다 지키지는 않았다. 우울해서 아니면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남편이 구해온 식재료들을 손질하고 몇 가지 요리를 하고 나면 하루가 다 가 버릴 때도 있었다. 또 다른 날은 밥 먹으며 남편이랑 얘기하다가 그 얘기가 길어져서 하루가 끝나버리기도 했다. 못 지켰다고 해서 좀 게을렀다고 해서 예전처럼 나를 채찍질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런 날들 다음날에는 아무것도 적힌 게 없는 빈칸을 보며 어제 아무것도 안 했으니 오늘은 몇 개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달력 한 칸이 모자랄 정도로 빡빡하게 적힌 날은 혼자서 엄청 뿌듯해했다.


이렇게 칸 채우기를 하다가 나의 [100일 프로젝트]는 무사히 마무리를 잘하였고 나는 지금도 그 여세를 몰아 요리를 하고 운동을 하고 글을 쓴다. 그리고 매일 식물들과 대화도 나눈다. 100일이 지나 곰이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무슨 엄청난 반전을 이룬 건 아니지만 전 세계가 힘든 시기에 나를 잘 다독여서 스스로에게 충분히 희망을 주었고 발전을 한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음식 구하기도 힘들고 외출도 힘든 와중에 슬기롭게 격리생활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단연 남편의 공이 가장 크다. 남편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쿠바에 있지도 않았겠지만 이렇게 잘 지내지도 못했을 테다.


게다가 격리가 해제된 오늘 나는 얼떨결에 소고기 안심과 돼지고기 그리고 오징어를 구하게 되었다. 소고기 안심과 오징어는 쿠바에 와서 처음 본 거라 좀 많이 놀라긴 했다. 덕분에 엄마랑 동생이 보내 준 돈을 아낌없이 탈탈 다 털어 쓰고는 엄마께 이 기쁜 소식을 전해 드렸다. 그제야 엄마는 안심을 하셨다. 오징어 손질은 처음이라 몇 시간을 서서 엄청 많은 작은 오징어들을 손질했더니(3.5킬로 정도) 허리가 뻐근하긴 했다. 내장이랑 눈과 입들을 다 떼어내고 껍질도 다 벗긴 후 깨끗이 씻어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어두고는 초저녁에 오징어볶음을 해 보았다. 오징어 손질이 처음이라 오징어 볶음도 처음이었다. 아, 역시 너무 맛있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걸신들린 듯 먹었더랬다. 역시 시장이 반찬이다.


해제가 풀리자 말레꼰은 늦은 밤까지 사람들의 소리로 왁자지껄했다. 그러자 갑자기 조용히 평화만이 존재했던 그때의 말레꼰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이젠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겠지?


내일 아침에는 첫나들이로 동네 야채 시장엘 가 보아야겠다. 아, ATM에서 돈도 찾아야 하는구나. 더워서 많이 다니지는 못 하겠지만 조금씩 아바나 시내 공기에 적응을 해 보아야겠다. 나간다는 사실에 마구 흥분되지 않는 걸 보니 나도 알고 보니 집순이였던 걸까? 아님 집순이의 삶으로 최적화되다 보니 헤어 나오기 싫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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