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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Apr 05. 2020

애증의 쿠바-냉장고 이야기

양문형 냉장고는 언제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아바나로 와서 살기 시작한 게 17개월이 되었고, 지금 살고 있는 아바나에서의 6번째 집에서의 생활은 오늘 이번 달 월세를 내면서 7개월째 접어들었다.


한국이든 쿠바든(한국 생활을 잠시 한 쿠바인 남편은 늘 한국은 쿠바의 비교대상이 아니라고 하지만) 문제없는 집이 없지만 이 곳은 남편의 말대로 비교불가의 문제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가격에 비해 말레꼰 뷰가 나오는 위치라든가 아바나 시내인데도 꽤나 안전하고 이웃들이 조용하다는 훌륭한 장점들로 인해 장기로 거주 중인 이 집도 살아보니 깔끔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문제들(샤워, 싱크대, 옷장 서랍, 에어컨, 선풍기 등등)이 끊이지 않고 나오는데 그중에 최고봉은 바로 이 쪼그만 냉장고이다.

대체 언제 생산되었는지 모를 삼성 브랜드의 문 한짝 냉장고


도대체 몇 년도에 생산이 되었을지 몹시 궁금해지는 무늬만 삼성인 이 냉장고는 일단 쿠바에 와서 처음 만난 생소한 비주얼이다. 여긴 뭐 처음 보는 가전제품 투성이고 대부분 물건들이 거의 골동품 수준이지만 물자가 부족하고 아주 비싼 탓에 고장이 나도 조금씩 고쳐가며 엔진이 가동만 되면 어떻게든 쓰는 게 일상적인 일이다.


이 쪼그만 문 한 개짜리 냉장고는 냉동실 문은 어디다 떼다 팔았는지 아예 없는 데다 냉동실에 성애가 어찌나 빨리 자라는지 속도가 LTE를 능가한다. (인터넷 속도나 어떻게 좀...) 덕분에 매일 냉동실 물건들을 꺼내서 붙어있는 얼음을 제거하고 다시 넣는 게 거의 하루 일과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어제는 성애를 제거하는 날이었는데 이것도 하도 해서 이젠 전문가 수준이 되어버린 듯하다. 이 작은 냉장고 안에 더 작은 냉동실의 양쪽과 위아래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큰 얼음덩어리들 제거 및 냉장고 전체 청소를 한 시간 만에 다 끝냈다. (물론 전원은 몇 시간 동안 빼 두었다) 어떨 때 보면 냉동실의 삼분의 일이 얼음이라 이건 뭐 얼음공장인 건지 냉동실인지 헷갈리기까지 한다. 내가 어릴 적에나 경험했을 법한 냉장고 안의 성에를 이 곳에 와서 성애 제거 전문가가 되어 버리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그래도 난 웃는 걸 택하겠다 헤헤)


그런데 요즘 어린 친구들은 냉장고에 성에가 낀다는 걸 알까?(궁금)


그러던 오늘은 이상하게 자꾸 밥솥에서 무언가가 썩은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깨끗한 밥솥을 씻고 닦고 심지어 드라이버로 분리해서 내부까지 확인했으나 아무 이상이 없었다.


‘아, 대체 어디야? 어디서 이런 냄새가 나는 거냐고?’


냄새에 예민한 나의 코는 어떻게든 원인을 찾으려고 부엌 여기저기를 킁킁 대고 있었는데 남편이 어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여기야!”

그 소리에 돌아보니 그 기분 나쁜 냄새는 밥솥 아래에 있는 냉장고 뒤쪽 아래 물받이에 물이 가득 고여서 난 거였다. 한 마디로 냉장고에서 떨어진 물들이 고여서 썩은 물 냄새였다.


그걸 보는 순간 갑자기 짜증이 확 나서(냉장고에 한이 많이 맺혔다) 소리 한번 지르고 물받이를 떼서 물을 버린 후 물받이 통을 열심히 빡빡 씻어댔다. 씻고 또 씻었다. 냉장고 뒤편 아래에 물받이가 있다는 것도 여기 와서 알게 된 사실이다.


냉장고가 넘나 쪼금 해서 원래 나의 취미 중 하나인 사재기는 꿈도 못 꿨는데 다행히도 공사하는 아파트(아직도 진행 중이다...)에 작년에 산 냉장고를 작동시켜서 김치랑(최근에 7포기를 했다) 음식들을 그곳에 보관하고 필요할 때마다 남편이 집으로 조금씩 가져오고 있다. 다행히도 현재 거주 중인 집과 공사 중인 집은 걸어서 7-8분 거리이다.


사람들이 “쿠바에 사는 게 좋아요?”라고 물어보면, 선뜻 “네”라고 하는 게 망설여지는 이유 중 하나가 아마도 처음 겪어보는 이러한 불편함일 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버튼 하나면 끝이 나는 일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노력이 끊임없이 요구되고 참다 참다 인내심에 한계를 느껴 한 번씩 화를 내기도 하지만, ‘그래, 쿠바니까 내가 이런 일도 해 보네’ 하면서 웃다 보면 또 하루가 지나가버린다. 이래서 다 들 ‘애증의 쿠바’라고 하는 게 아닐까?


힘든 환경에서 남들이 하기 힘든 무언가를 해 냈을 때의 그 뿌듯함이 내게 주는 희열은 생각보다 강해서 어쩌면 이 나라가 나에겐 잘 맞는 것 같기도 한데 냉장고 요놈 이랑은 심히 작별을 하고 싶으다. 그런데 내 집이 아니라서 맘대로 바꿀 수도 없다.


그래도 이 집에서 계속 살 거냐고요?


아... 집 생각만 하면 할 말이 백만 개인데..
할 말이 너무나도 많을 때에는 그냥 입을 다무는 게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좋을 테다.


냉장고랑 지지고 볶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네. 어쩐지 배가 계속 고프더라니... 오늘은 얼마 전에 담았던 얼갈이김치에 엄마표 멸치 볶음이랑 쇠고기 고추장 볶음을 밥 위에 놓고 그 위에 계란 프라이 하나 올린 후 참기름을 살짝 뿌려 쓱싹 비벼먹어야겠다.


역시 한국인은 밥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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