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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생각이 세상이 될 때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보고

by 꿈꾸는자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 게 아니라,

아이가 한번 그렇게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세상이 그렇게 돼 버리는거야.”



자신의 엄마가 은중을 더 좋아한다고 믿었던 상연에게,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라고 은중이 묻자 상연이 대답한 말이다. 상연은 가장 가까워야 할 엄마와 오빠에게조차 늘 자신이 2순위라고 여겼다. 자신이 가진 걸로는 엄마를 기쁘게 해 줄 수는 없고, 오빠를 웃게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사랑받고, 오빠를 웃게한 은중이 미울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엄마나 오빠가 직접 그런 말을 한 것도, 분명한 증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상연이 느낀 여러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결국 그것이 ‘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상연은 단 한번도 자신의 믿음을 의심해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 굳어진 그 생각은 오랫동안 상연을 괴롭히고 마음을 다치게 만들었다.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될 수 있지만, 우리도 종종 그런 믿음을 붙들고 살아간다.


상연은 겉으로는 차갑고 방어적인 모습이었지만, 내면에서는 사랑받지 못해 슬프고, 버려질까 두려워하며 불안과 분노를 동시에 경험하는 모습이었다. 은중과 비교당하고 밀려난다고 느끼는 마음은 상연에게 큰 상처이자 무거운 짐이었다. 사실 상연도 은중을 좋아했고, 충분히 서로 아끼는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파괴적으로 흐르고 말았다.


반대로 은중은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에서도, 질투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도, 상학과의 이별과 상연과의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아픔을 계기로 자신을 돌아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더 분명히 알아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상연은 달랐다. 그의 모든 경험은 결국 “나는 사랑받지 못한다, 나는 그럴 가치가 없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바로 상연의 핵심 신념(core belief)이었다.


핵심 신념은 어린 시절의 경험 속에서 형성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 틀이 된다. 한 번 굳어지면 이후의 모든 경험을 그 틀에 맞춰 해석하게 된다. 상연의 경우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신념이 삶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리고 오빠의 자살 이후, 본인 때문에 오빠가 죽어서 자기에겐 인사도 없이 떠난 거라고 생각하며 그 죽음을 자신 탓으로 연결하며 살아갔다. 오빠의 죽음자체도 충격적인데 그것에 대한 책임까지 떠안은 어린 상연이 겪었을 고통과 괴로움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고 상연과 같은 자살 유족들이 겪는 마음의 고통과 죄책감의 무게를 생각해 보게 된다.


드라마를 보며 나 역시 상연이 되었다가, 은중이 되었다가 하며 내 삶 속의 여러 관계들을 떠올리고 그 속에 있는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나를 다시 마주하게 하는 거울이 되었다.


특히 1화에서 은중이 빈 아파트에 붙여놓은 “너는 참 좋겠다”라는 스티커가 생각난다. 우리는 늘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동경한다. 그 부러움과 질투, 동경이 나를 성장으로 이끄는지, 아니면 파괴로 이끄는지는 결국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사람들은 사건 그 자체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 때문에 괴로워한다.”
(Men are disturbed not by things, but by the view which they take of them.)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말이다. 즉, 외부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이다. 상연에게는 왜곡된 핵심 신념이 세상을 그렇게 보이게 했고, 그것이 곧 그의 삶이 되었다.


이 부분은 인지행동치료(CBT)에서 설명된다. 에픽테토스의 말처럼 외부 사건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문제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CBT에서는 왜곡된 핵심 신념을 찾아내고, 그것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돕는다.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믿음에 대해 도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새로운 관점이 열린다. 상연에게 필요한 것도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자신 안에 자리 잡은 신념을 다시 질문해 보고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세상이 전부 적대적으로만 보이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자신만의 핵심 신념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그 신념이 왜곡되어 있다면 불필요한 고통 속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하고 다시 점검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만날 수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시 보고 싶은 드라마다. <은중과 상연>은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라,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가는 믿음과 그 무게를 깊이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특별히 상담학을 공부하는 나에게는, 만약 상연이 내 앞에 내담자로 앉는다면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상상하게 만든, 의미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네 말이 맞다고.. 아이가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정말 그렇게 돼 버린다고.. 그래서 네가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 네 세상이 그렇게 굳어지도록 아무도 깊이 너와 마주하지 못했고, 또 너 자신을 다시 바라보도록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먼저 이야기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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