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다는 말보다 더 바쁘게 사는 이 시대의 갓생러, 고르미온느의 시작
나는 누가 쫓아오지 않는데 나는 그렇게 바쁘게 살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안다
이상한 습성이고 나 스스로를 끊임없이 못살게 군다는 것도 아는데
어쩌겠는가. 보고 배운 게 이뿐인걸
60 넘어 실용음악과에 입학해서 드럼도 치시고 기타도 배우시고 화성학이랑 작곡 배우는 엄마 아래서 자란 나는 이게 그냥 당연한 일인걸.
그렇게 나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내 삶을 하루도 빠짐없이 바쁘게 살아왔다.
항상 잠들기 전 다음날 스케줄을 되네이며 몇 시에 일어나 씻고, 버스를 타고, 몇 시 즈음 어디에 가 있어야 하고 등등
물론 20대 때에는 숙취로 바쁜 날도 있었다.
그렇게 항상 발바닥에 땀나듯 뛰어다니던 내가 갑자기 멈춤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내 이름대신 “주재원 배우자”라는 타이틀이 씌워진 순간.
내 이름 석자 대신 ㅇㅇ엄마, “주재원 배우자”로 불리자 몸은 한국에서보다 더 바쁘지만 내 이름은 없어졌다.
(누가 미국 사교육 없대?! 한국 급식 그리워요, 한국의 도보 생활권 그리워요..)
영어를 하나도 모르는 그저 뛰어노는 시간이 많고, 엄마 밥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엄마가 해준 도시락을 매일 먹을 수 있어 행복하다는 티 없이 맑은 아이들과
새로운 환경과 도전적인 상황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습성을 가진 남편이 매일 얼굴이 똥빛, 잿빛으로 퇴근해서 이 세 사람 수발드느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랐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내 이름도 찾고 싶고, 아이들 적응도 도울 수 있는 최적의 일?
발룬티어였다. 우리나라말로 번역하면 사실 ‘봉사활동’인데, 왜인지 모르게 봉사활동이라는 단어와 발룬티어가 주는 괴리감이 있다.
봉사활동은 마치 고등학생 때 학적부에 기록되는 ‘봉사활동 시간‘과 연관이 지어져 그런 것 일수도.
미국은 정말 사회 저변에 생각지도 못한 곳곳에 발룬티어가 활성화되어 있다.
학교라는 공간도 학부모 발룬티어가 없다면 절대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다.
모든 행사에 학부모가 필요하다.
아이들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학교 캠퍼스.
아이들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학교 스태프들.
아이들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학교 친구들.
그 안에 들어가야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한 첫 해의 발룬티어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원래 한번 마음먹으면 무조건 꾸준히 해야 하는 나의 습성 탓인지
1월 31일에 전학 오고 나서부터 학기말이던 6월 초까지 접수하라고 하는 모든 발룬티어에 모든 날 다 갔다.
그러자 스태프들과 친구들과 그 속의 내 아이들이 점차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내와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아도, 엄마가 학교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감을 느꼈다고 한다.
어느 날은 아이들이 전학 온 지 몇 주 되지 않아서 화장실 가고 싶어요 정도의 말만 할 수 있었을 때,
내가 북페어(특정 출판사의 책을 학교에서 위탁판매 하는 행사) 발룬티어로 점심시간에 와 있던 날이 있었다.
당시 1학년이었던 아들이 선생님한테 “My mom, book fair, I go see”라고 하고 나를 보러 온 날도 있었다.
그렇게 와서는 내내 내 옆에 붙어 있다가 꼭 안아주고 엄마 사랑해, 엄마 이따 만나, 엄마 내가 선생님한테 엄마 여기 있다고 말했어, 엄마 사랑해!!! 뽀뽀해 줘야지 하고 갔다.
둘째처럼 살갑지 않은 첫째는 캠퍼스 내에서 나를 보면 씩 웃거나 달려와서 내 앞에서 조잘조잘 그날의 일을 이야기하고 간다.
아마 이때부터 내 안의 무언가가 꿈틀대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가 이곳 미국이라는 곳에서 “주재원 배우자”라는 틀에만 갇히지 않고 내 이름 석자로 할 수 있는 일.
학교에는 정규직 스태프들 말고 학군 소속의 계약직들이 존재하고, 그중 대체선생님이라는 직종이 존재한다는 것.
미국 오기 전부터 미국 가면 뭐 하지. 하면서 수도 없이
주재원 배우자, 미국 주재원, 캘리 주재원을 검색했었다.
이렇게 낸 인생의 4년을, 아직 40년도 살지 않았는데, 내 인생의 10%도 넘는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낼 수만은 없으니까.
도대체 캘리포니아 주재원의 배우자가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나는 여기서 이 사회에 어떻게 속해서 어떻게 적응해 나갈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미하고 그려보고 꿈꿔왔다.
물론 한국에서의 커리어를 기반으로 여기에서도 직장에 다녀볼까 라는 거대한 꿈은 꾸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어떤 글을 찾아봐도 내가 살고 싶은 하루는 적혀있지 않았다
이곳 미국에는 substitute teacher(서브티쳐) 일명 섭티칭, 즉 대체교사라는 직종이 있다.
담임교사나 학교 내 어떤 스태프의 휴가로 생긴 그 공백을 채워주는 땜빵교사랄까.
자격 요건도 생각보다 쉬워 보였다.(쉬워 ‘보였다’ 내가 재시험이라는 걸 보게 될 줄이야)
학사학위 이상 소유자 + 캘리포니아에서 인정하는 특정 시험(CBEST :California Basic Educational Skills Test) 세 과목을 통과(reading, writing, math) + 결핵 검사 + background test(fingerprint)를 거치면 가능했다.
나는 운 좋게도 아직 이 시험이 무료일 때(캘리포니아에서 코로나 당시 선생님이 너무 부족해서 시험 응시료를 재정적으로 지원해주고 있을 시기였다. 물론 이때 또 다르시험인 CSET도 등록했어야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 세 과목을 응시했고,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영어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나는 이 또한 시험 준비를 하면 크게 큰 코 아주 여러 번 주저앉게 되었다.
나의 언어에 대한 자신감이 너무 커서 자만했을 뿐, 사실 미국식 에세이 적기, 미국식 객관식 답변 찾기 등 언어라는 도구만 내밀었지 하나도 제대로하고 있는 게 없었다.
사실 언어에 대한 자신감에는 그만한 배경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1년 미국에서 살았던 나는, 반쯤 리터니였고,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한국에 돌아간 초등학교 4학년 이후 단 하루도 영어학원을 가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는 토플학원을 다녀야 했고, 중학생 때는 거의 한 달에 한 번씩은 토익시험을 보러 가야 했다.
전교에서 1,2등 한다는 애들이 굳이 굳이 영어는 나한테 와서 물어봤고, 당연히 모의고사에서도 영어는 항상 다 맞거나 하나 틀리는 수준이었다.
언어에 대한 능력도 있는 편이라 대학에서 전공을 선택할 때도 영어가 아닌 외국어 두 개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 반면 미국이나 영미권에서 영어라는 언어로 고등교육 이상을 받은 경험이 없기에 도대체 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 지 가늠해 보고 도전해보고 싶었다
(실제로 회사에서 고객 미팅은 미국대학 출신 다른 동료가 가고 나는 그의 프레젠테이션 대본을 적어준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무슨 대필 작가도 아니고…)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캠퍼스에 들어가서 미국의 학교를 경험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내 아이들에게서 왔다.
미국에서 초등학교는(다행히 그것도 아이가 가야 했던 딱 3학년은) 경험이 있었지만, 곧 아이가 가야 할 중학교부터는 경험이 전무했다.
아이가 닥칠 문제에 대해 공감할 수도 없고 나름의 지혜를 발휘해 대책을 제안해 줄 수도 없다.
아무리 on your own 이어야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정보가 전무한 상태에서 아이를 내몰 순 없지 않은가.
그렇게 해서 정한 나의 첫 목표.
그것은 서브티쳐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학교로 출근하는 것.
아이들의 삶을 이해하고, 내 영어를 한번 시험해 보겠다는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은 사소한 이유로 시작한 이 일정.
시험 준비를 하며 마주한 몇 번의 고비들.
미국과 한국의 학교 생활의 차이에 대해 매일 느끼던 중 다행히 첫 여름방학이 다가왔다.